[향토문화] 1953년 성을 쌓고, 마을 재건.. 남원2리 존다리못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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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953년 성을 쌓고, 마을 재건.. 남원2리 존다리못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5.09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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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생활을 하던 남원상동 주민들이 1953년경 복구하면서 쌓은 성이다.

남원2리 존다리못성담

 

위치 ; 남원읍 남원리 311번지 일대. 살림집과 창고가 있는 과수원 비닐하우스 남쪽에 있다. 1067-1번지 극락조화 농장과 경계돌담으로 남아 있다.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방어유적(성)

남원2리_존다리못성담311번지

 

남원2리_존다리못성담 西



남원1리는 해안을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고, 남원2리는 ‘버너리굴’, ‘서옷귀’, ‘존다리못’ 등의 자연마을로 넓게 형성된 마을이다. 모두 합치면 100호가 넘는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1948년 11월 28일을 ‘4․3사건의 시작’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날 남원리를 습격한 무장대가 민가를 불태우고 주민들을 보이는 대로 학살한 아비규환의 현장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 날 대부분의 가옥은 전소되고 3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되는 등 대규모의 희생이 발생했으며, 정남국씨는 처와 자녀 등 11명의 일가족이 퇴각하는 무장대에 끌려가 희생되기도 했다.


한편, 무장대의 습격이 있기 열하루 전인 11월 17일 응원경찰과 민보단에 의해 존다리못 주민들이 마을 안에서 붙잡혀와서 남원리 해안의 소금밭인 속칭 ‘진쟁이’에서 20여 명이 희생되는 사건이 있었다.

남원2리 주민들은 1948년 11월 초토화 이후 일부는 남원1리 등 해안 마을로 피난가기도 했으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많은 존다리못, 버너리굴 등 남원상동의 주민들은 인근 야산이나 굴에서 피난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현장에서 총살당하거나 붙잡혀 남원지서에 끌려가 즉결총살당하는 일이 많았다.


1리로 피난했던 2리 주민들은 남원지서 앞 바닷가에 함바집을 짓고 수년간 집단생활을 했고 이곳에서도 도피자 가족으로 내몰린 주민들의 희생이 많았다.

1953년이 되어서야 의귀리, 한남리, 수망리 주민들과 더불어 ‘존다리못’을 중심으로 성담을 쌓아 집단생활을 하다가 3~4년 후에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외진 곳에 있었던 버너리굴은 복구되지 않았다.


소개생활을 하던 남원상동 주민들이 1953년경 복구하면서 쌓은 성이다. 이들은 사태가 완화된 후인 1953년 존다리못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마을을 재건했다.

이 때 남원상동뿐만 아니라 의귀리, 한남리 주민의 일부도 이곳 존다리못 성안에서 집단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갔다.


지금은 과수원 경계로 사용되는 성담이 약 30m 정도 남아 있다. 하폭 1.5m, 높이 1~2m 정도 남아 있으나 원형은 거의 훼손된 상태이다. 비슷한 규모의 성이 1075번지, 1104-2번지 일대에도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 있다.(제주4․3유적Ⅱ 264~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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