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서귀포의 환상'...서귀동 이중섭(李仲燮)피난살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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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서귀포의 환상'...서귀동 이중섭(李仲燮)피난살이집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6.16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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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 김순복은 생면부지 이중섭에게 선선히 방을 내줬다.

서귀동 이중섭(李仲燮)피난살이집

 

위치 ; 서귀포시 서귀동 512-1번지
유형 ; 위인선현유적
시대 ; 대한민국

서귀동_이중섭초가
서귀동_이중섭 살던 방

 

천재화가 이중섭이 약1년 동안 살던 집이다. 세 칸짜리 초가에 1.5평 짜리 방에 이중섭과 그 가족이 살았다. 이 방에 이중섭의 사진이 놓여 있다.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열한 달 피란살이였다. 이중섭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와 화순항에 내린 뒤 한겨울 밤 걸어서 이 집에 왔다. 세간도 없이 보따리 둘만 들고 있었다고 한다. 집주인 김순복은 생면부지 이중섭에게 선선히 방을 내줬다.

그릇과 수저, 이불과 된장도 줬다. 이중섭 가족은 비만 안 오면 모두 바닷가에 나가 게를 잡아와 군용 반합에 쪄 먹곤 했다.

이중섭의 부인은 “제주도 시절 어찌나 먹을 것이 부족하던지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서 게나 조개를 잡아서 먹었는데 남편은 그것이 몹쓸 짓을 하는 것 같아 죽은 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게를 그린다고 말하곤 했지요.”라고 당시의 곤궁한 상황을 회상했다.


비운의 천재 화가 이중섭의 짧은 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서귀포 피란 시절이었다. 작품 주제가 가족과 아이들로 바뀌면서 '서귀포의 환상'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같은 걸작을 쏟아냈다. 예술 세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셈이다.


작품 '길 떠나는 가족'은 서귀포로 떠나는 이중섭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소달구지 위에서 여인과 두 아이가 꽃을 뿌리고 비둘기를 날린다. 소를 모는 사내는 감격에 겨워 고개와 손을 하늘로 치켜세웠다. 슬픈 피란이 아니라 즐거운 소풍을 가듯 흥에 겹다.

서귀포는 이중섭에게 유토피아였다. 아내도 서귀포를 떠나면서 집주인에게 "이 집에서 보낸 일년이 가장 행복했다"고 허리 숙여 인사했다고 한다.


김순복 할머니는 서귀포시가 초가로 복원한다고 했을 때도 순순히 허락했으며 아흔 된 지금도 이 집에 살고 있다.


이중섭(李仲燮 1916년4월10일~1956년9월6일)은 호는 대향(大鄕). 한국의 서양화가이다. 평남 평원의 조운면 송천리 명문 지주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희주는 이중섭이 다섯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8세 때 평양 이문리에 있던 외가에 머무르며 종로공립보통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 입학해 임용련으로부터 미술지도를 받았다. 임용련은 예일대학교 미술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학생들에게 향토적인 주제에 의한 미의식을 가르쳤고 이는 이중섭의 화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중섭은 18세에 학교건물을 새로 짓자는 이유로 오산학교 본관 화학실을 불태우기도 했으며 일제의 국어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자모로 구성을 시도했다.

이 무렵 그는 들에 있는 소를 관찰하며 스케치에 열중했고 훗날 들판에 풀을 뜯는 황소를 하루 종일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소를 좋아해 소와 입맞춤한 아이라고 소문이 날 만큼 소는 이중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림의 소재가 됐다.


이중섭은 오산학교 시절부터 자신의 그림에 서명을 할 때, 중섭을 한글로 풀어 ‘ㅈㅜㅇㅅㅓㅂ’이라고 썼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이름조차 일본 이름으로 바꿔야 하는 암울한 시기였기에 한글로 표기한다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주장이었다. 1935년 오산학교를 졸업할 때는 앨범의 서명란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에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소동을 빚기도 했다.


1937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제국 미술학교에 들어갔다가 분카(文化)학원 미술학부 양화과에 재입학해 20세기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토대로 한 자유롭고 진취적인 미술 수업을 받았다.

이러한 그의 학습은 프랑스 화가 루오의 거친 붓 터치를 닮은 『황소』그림을 완성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이 때 이정규·김환기·유영국·김병기·문학수 등과 사귀었다.


1938년부터 일본 추상 그룹인 미술창작가협회에 참여했으며 1940년 태평양전쟁이 심해지자 원산으로 돌아온 이중섭은 그 해 연말부터 도쿄에 있는 마사코에게 그림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엽서에는 꽃이 피고 물고기가 파도를 거슬러 오르고, 아이들이 물고기를 안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창세기 풍경과 당나귀, 말, 소와 여인이 함께 유희하는 신화적 풍경이 등장한다. 1941년에는 협회상인 태양상(원명 조선예술상)을 받았다.

그해 김환기·유영국·문학수 등과 서울에서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창립전을 가졌다.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형의 반대로 이루지 못했다.

1943년 귀국하여 2년 후 문화학원 2년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한국명 李南德)와 결혼하여 원산에 정착해 살면서 8·15해방을 맞았다. 마사코는 미쓰이 그룹의 일본창고주식회사 사장의 딸로 일본에서는 보기 드문 가톨릭 가정의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다.

마사코가 한국인과 사귀는 것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은 점도 이러한 연유가 있기에 가능했다. 1945년 4월, 편지로만 주고받던 연애는 마사코가 현해탄을 건너 원산에 도착함으로써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 해 5월에 둘은 전통 혼례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온 덕이 많은 여자’라는 의미로 남덕(南德)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 해 첫 아들이 태어났지만 디프테리아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중섭은 죽은 아들이 하늘나라에 가면 심심할까 봐 길동무 하라고 무릉도원에서 복숭아를 들고 아이들이 벌거벗고 뛰어노는 그림을 그려 함께 묻어 주었다. 그 후 1947년, 1949년 두 아들을 낳았다.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여 구상(具常)의 시집 〈응향 凝香〉 표지그림을 그린 후 구상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통을 받기도 했다. 그 뒤 불우아동들의 무료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쳤다.

1950년 겨울 집이 폭격을 당하자 아내와 두 아이를 데리고 원산부두에서 떠나는 대한민국해군 후송선을 겨우 얻어 타고 부산에 도착해 피난민 수용소에 머물게 됐다. 이때부터 이중섭의 인생은 끝없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었다. 부산·서귀포·통영 등지로 전전하며 피난살이를 했다.


1952년 국제연합(UN)군 부대 부두노동을 하며 양담배갑을 모아 은지화를 제작했다. 이중섭은 그림재료를 살 돈이 없어서 담배곽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릴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생활이 어려워지자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고 이듬해 부인을 만나러 일본에 1차례 건너갔다온 것을 제외하고는 만나지 못했다.


이중섭의 독특한 기법인 은지화는 이중섭이 제주를 떠난 후 1952년 부산에서 그리기 시작하였다. 은지화(銀紙畵)는 담뱃갑 속의 수분을 막기 위해 담배를 쌌던 은지에 그린 그림이다.

이중섭은 부산 범일동에 살 무렵, 그 주변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미군부대 쓰레기장을 돌아다니며, 빈 담배갑 속의 은지와 초콜릿을 쌌던 은지를 한 아름 주워와 선묘로만 그림을 그렸다.


은지화의 기법과 구성, 내용은 바로 한국적인 이미지를 독특하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실제로 은지화는 후에 대작을 그리기 위해 준비한 원화였다.

전쟁이라는 시대 상황 때문에 대작을 그릴 수 없었던 까닭에, 전쟁이 끝나면 대작을 그리려는 기대감으로 심혈을 기울여 그린 그림이다. 작지만 대작과 마찬가지의 구성을 보이는 은지화야말로 이중섭을 국민화가로 우뚝 서게 한 이중섭의 대표작인 것이다.


은지화의 제작 방식은 간단했다. 늘 해오던 방식의 선묘를 뾰족한 못이나 송곳으로 은박지 위에 힘껏 누르며 그린 후 담뱃진을 발라 마무리하면 그만이었다. 때로는 담뱃진 대신에 단색 물감을 발라 천으로 닦아 내기도 했다.

은지의 매력은 담배 포장 당시 자연스럽게 접혀진 선이 아름다운 추상의 형상이 되는 것과 담배를 뜯은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은지 귀퉁이를 잘라낸 자연스러움에 있었다.

이중섭은 그것을 활용하여 구도를 생각했고, 은지에 새겨진 이중섭의 거침없는 선묘는 마치 한국의 마애불의 선각과 청자의 상감기법을 떠올리게 하였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재료가 형식을 구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은지의 특성상 습기를 보호하는 기능 때문에 담배를 보호하고자 하는 코팅처리가 돼 있어서 물감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뾰족한 재료로 은박지를 누르면 음각선이 나오는 기법을 생각해 낸 것이다.

그것은 우연적 효과였으나 수 없이 반복함으로써 안정적인 기법을 찾게 된 것이다. 이중섭의 은지화 『신문을 보는 사람들』(9.8×15cm, 1954년), 『낙원』(8×14.4cm, 1954년, 2점)은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956년 4월 12일 아더 맥타카드(1956~1959 대구문화원장 재임)는 자신이 구입한 세 점의 은지화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였다. 엄격한 심의 끝에 이중섭의 은지화는 MOMA에 소장되었다.

전 세계적으로 버려진 은지에 선묘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없었고, 재료의 특이성과 함께 그 선묘의 내용이 한국적이었다는 데서 MOMA는 은지화를 소장하기로 결정하였다.


궁핍과 고독의 나날을 보내면서 종군화가로서 몇 차례 단체전에 출품했고 1953년에는 통영에서 유강렬과 함께 지내며 다방에서 40점의 작품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듬해 진주를 거쳐 상경했고 박생광의 초대로 진주로 내려가 작품 활동을 했다.

서울 누상동에 거주하면서 국방부·대한미술협회 공동주최의 대한미협전에 출품했다. 1955년에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도파 화랑과 대구의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1955년 7월 정신이상 증세가 나타나 대구의 성가병원에 입원했다. 친구들의 배려로 여러 병원으로 옮겨다니며 치료해 얼마간 호전되었으나 무단으로 퇴원한 후 불규칙한 생활로 병세가 악화되었고, 1956년 간염으로 적십자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중섭의 주검은 무연고자로 사흘 동안 영안실에 방치돼 있었으며 친구들이 수소문해서 찾아오니 하얀 시트에는 그 동안 밀린 병원비 계산서만 덩그마니 붙여진 채 적십자병원 영안실 흑판에는 이렇게 짤막한 문구만 남아 있었다.‘1956년 9월 6일 오전 11시 45분. 간장염으로 입원가료 중 사망. 이중섭 40세.’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1957년 조각가 차근호 제작으로 묘비가 세워졌다. 2007년 3월 6일에는 이중섭을 추모하는 음반인 《그 사내 이중섭》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2002년 이중섭이 살던 집 북동쪽 언덕 위 정방동주민센터 서쪽에 이중섭미술관이 건립되었다.

소장한 이중섭 작품 열한 점 중 아홉 점은 기증받고 2009년에 서귀포시가 9억원을 들여 두 점을 사 들였다. 초가 앞길은 '이중섭거리'로 이름 짓고 그의 걸작들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세웠다. 화가들의 창작 산실인 이중섭창작스튜디오도 지었다.

고은은 “이중섭은 이 세상에 있다. 그는 어디로 떠나간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한국경제매거진 2011년 10월호 최선호 글),(제민일보 111011 전은자 글),(조선일보 111021 오태진 글),(위키백과),(다음백과사전)
《작성 11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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