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고려 충렬왕 때 명월현, 제주서부의 중심지..옹포리 명월포전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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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고려 충렬왕 때 명월현, 제주서부의 중심지..옹포리 명월포전적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08.04 14: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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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포는 삼별초, 여몽연합군, 고려의 목호토벌군이 상륙한 고려시대 최대 역사의 현장이다.

옹포리 명월포전적지

 

위치 ; 한림읍 옹포리 포구
유형 ; 전적지
시대 ; 고려시대

옹포리_포구

 


옹포리의 포구인 ‘독개’는 예전 지명이 ‘명월포’로 명월진성과 이어지는 통로역할을 했다. 역사기록에는 ‘명월포’로 쓰여 있는데, 원래 ‘독개’는 군항(軍港)이었다.

‘명월리’는 1300년 고려 충렬왕 때 명월현으로 되어 제주서부의 중심지의 역할을 했고, 16세기까지 그 명성이 이어졌다.

17세기 초부터 현재의 금악리가 분리되었고, 18세기 초에 독개가 현재의 ‘옹포리’로 분리되었다. 따라서 옛날에는 옹포리 지역도 명월리에 속해 있었으며 그 포구가 명월포였다는 말이다.


옹포리 포구에는 역사유적임을 알리는 표석이 하나 서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明月浦戰跡地 ; 삼별초(三別抄)항쟁과 목호(牧胡)의 난 때 상륙전을 치른 전적지. 1270년(원종11) 11월 이문경(李文京)장군은 삼별초의 선봉군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 고려관군을 무찔러 승리함으로써 처음으로 제주를 점거하게 되었다. 그 뒤 1374년(공민왕23) 8월에는 최영(崔瑩)장군이 314척의 전선에 2만5천의 대군을 이끌고 상륙 몽고의 목호 3천기(騎)를 무찌른 격전의 땅이다.〉


고려 때 원종은 즉위 과정에서 원의 도움을 받았었기 때문에 강화에 천도해 있던 수도를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고(1270년5월23일), 5월29일에는 환도를 반대하는 삼별초를 혁파(해산)했다.


그러자 배중손 등은 삼별초군과 반몽세력을 규합하고 승화후 온(溫)을 추대하여 정부조직까지 갖추고 봉기했다.

고려사에 의하면 환도할 경우 그 동안 반몽투쟁을 했던 세력을 몽고가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 때문에 봉기한 것이라고 썼다. 봉기 후 15,000명 정도의 인원이 남행하였다.

이는 강화를 지키던 군사들이 육지로 도망가서 강화성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삼별초 일행은 6월 19일에야 진도에 도착했다.


이에 관군은 진도를 공격하는 한편 삼별초의 퇴로를 미리 확보하려고 1270년 9월 김수․고여림을 제주에 보내어 지키도록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삼별초는 이문경을 제주로 보냈다. 11월 3일 별장 이문경이 명월포로 상륙하여 관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제주를 점령함으로써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그 후 1271년5월 여몽연합군에 의해 황제로 추대된 왕온과 대장 배중손이 사망하는 등 진도 정부가 붕괴되자 김통정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 애월읍 고성리에 통성을 쌓고 항전을 준비했다. 관군은 삼별초를 회유해 봤으나 사신을 죽이는 등 듣지 않았다.

삼별초는 제주를 점령한 동안 군항포(물자운반 및 정박), 명월포(선발대 입항 및 군선정박), 애월포․조공포(물자운반과 군선정박), 조천포․함덕포(선발대 작전수행, 군선정박, 물자운반) 등을 주요 전략 포구로 활용하였다.


1273년 1월 원 세조가 炘都, 鄭溫, 洪茶丘에게 탐라를 정벌하도록 명함에 따라 3월에 몽고군 6,000명과 고려관군 6,000명(장군 김방경) 등 12,000명의 여몽연합군이 3군으로 나뉘어 명월포, 귀일포, 함덕포로 상륙했다.

약 사흘 간의 접전 끝에 4월28일 삼별초의 항복을 공식선언하였고 6월에는 김통정이 자결하여 삼별초의 난은 끝났다.


그로부터 100년 동안 제주는 원의 직할식민지가 되어 말 생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 땅을 다스리는 관청의 명칭이 탐라총관부-제주목-탐라총관부로 변화가 있었다.

그 동안 제주에 온 원의 목호(1400~1700명)들은 제주 사람들과 통혼하여 함께 어울려 살게 되었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시행되자 탐라의 목호들도 반기를 들었다. 1356년 조정에서 파견한 도순문사 윤시우를 살해하였고, 이후 3차례나 고려의 관리들을 죽였다. 이에 공민왕은 1366년 100척의 군선을 파견하여 목호를 굴복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368년 몽골의 원나라가 망한 후인 1369년에까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공민왕23년(1374)에는 명나라가 탐라에 있는 말 2000필을 고려 조정에 요구했다. 목호는 고려조정의 요구를 듣지 않았고 공민왕은 탐라(목호)정벌을 결심하게 되었다.

공민왕의 이런 결정에는 ‘목호의 반란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제주를 명에 복속시키겠다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으므로 미리 차단해야 한다’는 의도가 들어 있었다.

공민왕의 명을 받은 최영 장군은 25600명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명월포로 상륙하였다.

하담이라는 사람이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고 표현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3개월이나 치르고 목호의 난은 평정되었다.


지금은 조그만 포구로서 한가로운 풍경이지만 이렇듯 명월포는 삼별초, 여몽연합군, 고려의 목호토벌군이 상륙한 고려시대 최대 역사의 현장이다.


참고문헌 ;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통사, 새로쓰는제주사, 답사자료「탐라․고려․몽골그리고민족」
《작성 11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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