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남녀가 모두 교대하며 야간근무를 섰다..신풍리 마을성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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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남녀가 모두 교대하며 야간근무를 섰다..신풍리 마을성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8.18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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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남 면장 ‘주민 없는 면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나를 죽이고 피난시키라’고 군당국에 청원 관철

신풍리 마을성담

위치 : 성산읍 신풍리 1060-1번지와 1378번지의 경계
시대 : 대한민국(1949)

신풍리_마을성담
 신풍리_성담

 

1947년 경에는 신풍리에 야학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없었기 때문에 겨울방학이 되어 육지에서 돌아온 학생들에게서 배웠는데 그들을 통하여 건국준비위원회(建準)의 지회가 조직되었다.

한편에서는 청년동맹위원회(靑同) 지회도 조직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느 쪽에 가입해야 좋을지 몰랐기 때문에 대개 친족이나 친지의 권유에 따랐으며 서로 자기 쪽이 좋다고 하여 분간할 수 없었다.

1947년부터는 머리를 올린(하이카라) 청년들이 민주주의, 공산주의, 신탁, 반탁 등 들어보지 못한 말들을 하고 다녔다. 1948년에 들어서자 밤에는 낯모르는 외지 청년들이 마을 안을 돌아다녔고, 낮에는 순경들이 와서 마을을 지키다가 저녁이면 지서로 돌아갔다.

1948년 5월에는 선거가 있었다. 투표를 독려하는 사람,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 투표와 선거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나랏님 격인 대통령을 뽑는다고 하자 노인 중에는 일본에 계신 황태자를 모셔 오지 왜 백성이 나랏님을 뽑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그럴 즈음(1948년 10월) 섯(西)신작로 전봇대를 잘라 버렸다 하여 마을 청년 거의가 신산지서에 잡혀갔다. 김경한, 김중현은 폭행과 고문으로 사망하였다.(2006, 냇가의 풍년마을) 앞의 책 233쪽에서는 4명은 죽어 돌아오고 12명은 제주시로 압송되고 나머지는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입산자 가족이란 이유로 총살을 당하기도 하여 민심이 흉흉하였다.

11월16일(음력 10월16일)에 소개령이 있어서 상동 주민들은 초석(돗자리)으로 가마니를 만들어 곡식을 전부 소에 싣고 간단한 짐만 가지고 하동으로 내려갔다. 집이 없으니 남의 집 우영을 빌어 조짚으로 바람을 가려 자야 했다.

살지 죽을지 모른다고 하면서 닭·돼지를 잡아가며 서로 나누어 먹었다. 하지만 성산면장 오성남씨가 ‘주민 없는 면장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나를 죽이고 피난시키라’고 군당국에 청원하여 관철시켰으므로 3일만에 귀가하라고 하여 초토화를 면했다.

밤에만 다니던 하이카라 청년들 일부가 산에 올라가 무장대가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장대원들은 밤에만 이 마을 저 마을로 다니며 양식을 털고 우마를 약탈하였다. 1948년 하반기부터 신풍리 주민도 민보단에 가입하여 마을 경비에 나섰는데 향사를 민보단 본부로 쓰기도 했다.

1차 성담은 신풍리 경계만 마을을 돌아가며 쌓았으며 서쪽은 천미천을 끼고 쌓았다. 성을 쌓은 후에는 경찰 3명이 파견되어 민보단과 합세하여 마을 방위를 맡았다. 초소에는 15세 이상 남녀가 모두 교대하며 야간근무를 섰다. 무장대가 침입하면 종을 치거나 싸이렌을 울려 마을에 알렸다.

성은 높이 320㎝, 너비는 성굽이 150㎝, 맨 위는 50㎝였다. 100m마다 초소를 만들었다. 1개월로 계획했던 것이 마을 주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18일만에 완성하였다. 성을 쌓는 동안에는 ᄆᆞᆯ방애에서 곡식을 찧을 수 없어 절량(絶糧)되는 집에서는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집집마다 울창했던 대나무숲은 모두 베어내었다. 2차는 12월에 마을 주위에 삼달리와 연결시켜 내외성을 쌓았다. 사장터와 고삭드르는 제외되었다.

주민들은 안성과 밧성이 있었다고 하며 성 안쪽에는 사람 키 높이 정도의 외담을 쌓아 침입자가 성담 위에서 안으로 뛰어내리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성담의 맨 왼쪽 부분(위 사진)에 초소막이 있었다고 한다.

“무장대는 마을에 3번 왔다. 첫 번째는 마을 청년들의 회식 자리에 나타나서 권총으로 위협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다음에 습격이 있을 거라 짐작해서 죽창이나 작살도 준비하여 무기가 될 만한 것을 모았으며 마침 고기 잡으려고 사다 둔 다이너마이트도 있었다.

어느 날 밤에 펜안밭 위 지금의 보건소 뒤에 있는 촐눌(목초 낟가리)에 불이 붙었다, 무장대의 기습에 의한 방화였다. 마을 복판이라 온 하늘이 밝고 날아오른 재와 불씨가 하늘을 뒤덮었다. 용당ᄆᆞ루에서는 무장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다이너마이트 심지에 화승으로 만든 불씨로 불을 붙이고 던졌다. 손이 떨려 그것도 쉽지 않았다. 적은 장총 2자루가 전부여서 저항이 계속되자 배회하다 여의치 않자 퇴각하였다. 주민들이 죽었고 침투하던 무장대도 1명 죽었다. 3번째 습격은 무장대가 족새ᄆᆞ루에서 한가름으로 들어오려는 것을 다이너마이트를 던지며 저항하자 달아났다.

이 때에는 안쪽에 성담을 둘렀지만 고시랑골 쪽 성담은 완전치 않아 불안하였다. 그 후 성담이 모두 완성된 후에는 습격이 없었다. 전체 성담은 1952년 동ᄆᆞ루와 사장터 쪽이 완성되어 안정되었고 경찰은 1955년까지 있다가 본소로 돌아갔다.”(1934년생 강금용씨 2005년 증언)

1948년 음력11월25일(양력12월25일)에 무장대의 습격이 있었다. 축성경비를 서던 강만진, 오원화, 정태삼, 강태진, 오홍봉이 숨졌고, 집에서 잠자던 23살의 어머니와 생후 6개월의 여아가 피살되었다. 4·3 당시 신풍리의 인명 피해는 25명이다. 12월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도청굿(마을굿)을 하였다.

이 성담은 1970년대에 감귤 밭담을 쌓으면서 모두 헐어 없어지고 북부 지역 등 일부만 남아 있다.(2006, 냇가의 풍년마을) 남아 있는 성담의 길이는 약 30m인데 중간에서 120°정도 꺾여 있다. 높이 2.8m, 폭은 1∼1.2m이며, 성담의 안쪽에 약 1.2m 높이에 폭 30∼50㎝의 회곽도가 설치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성남(吳成南)은 광무6년(1902)에 신풍리에서 유향별감을 지낸 아버지 오주식과 어머니 김유반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소봉(小峰)이다. 어려서 족숙(族叔)인 청봉 오주언 선생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업사(業師)의 뜻을 따라 정의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그는 1920년대에는 하천리에 설립된 신진서숙에서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고향을 떠나 전남 진도에서 경찰공무원으로 공직에 몸을 담았다.

일제강점기였으므로 우리 국민들이 많은 세금과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약탈을 당하고 특히 조선인의 황민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1939년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설정하여 협박과 강요로 창씨개명을 강행할 때에도 창씨개명 반대에 앞장섰고 결국은 12면만에 공직을 그만두고 신풍리로 귀향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뛰어난 능력이 아깝다며 추천하여 성산면사무소에서 행정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성품이 강직한 그는 민족혼을 일깨웠고 공출을 줄이기에 진력하였다. 정의향교 훈장을 지냈으며 해방후에는 초대 신풍리장을 지낸 그는 리민들과 성산면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어 제5대 성산면장을 지냈다.

면장 재임시에는 한국전쟁 전후의 피난민 보호와 마을 피해 복구, 구호사업에 행정력을 종동원하여 면민의 칭송을 받았다. 수산2리에는 그를 기리는 복구기념비가 세워졌다. 지역민들과 애환을 같이 하며 청렴하게 살다가 1960년 세상을 떠났다.(냇가의 풍년마을)
《작성 17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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