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영청(營廳)의 뒷마을 또는 뒷길..삼도2동 영뒤골
상태바
[향토문화] 영청(營廳)의 뒷마을 또는 뒷길..삼도2동 영뒤골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14 07:22
  • 댓글 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영업중인 동양여관이 있다.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이 묵은 곳이다.

삼도2동 영뒤골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1065-1번지(무근성7길18)에서 삼도2동 1053-9번지(관덕로3길13) 사이 도로
시대 : 조선
유형 : 도로

삼도2동_탐라여관

 

삼도2동_영뒤골

 

영뒷골은 영리청(營吏廳) 뒷길을 말한다. 민간 발음은 영두굴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관덕정에서 북쪽으로 상아의 서쪽을 따라 가다가(관덕로3길) 무진장모텔에서 서쪽으로 이어진 무근성7길의 좁은 샛길인 이 골목길과 주변 마을을 이른다.

영리청은 제주목관아내의 홍화각(弘化閣) 터에 있었다. 다시 말해 홍화각은 안무사영(安撫使營) 또는 영리청이라고도 했으며 군사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곳이었다.

홍화각이 영청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제주목사가 전라도 관찰사의 임무를 일부 넘겨받아 대정현감·정의현감을 지휘, 감독하여 제주도의 전권을 장악한 데서 유래한다.

또한 불에 타기 전의 관아 명칭은 망경루라 하였는데, 홍화각이라 이름 지었던 것은 왕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였다.

당시 제주목사는 목민관이면서 동시에 전라도관찰사의 군무를 위탁받은 수군, 병마의 군사령관의 역할인 절제사(후에 방어사로 바뀜)도 겸해 있었다.

이로 인해 목사의 집무처였던 목관아는 판관의 집무처인 찰미헌(察眉搟)을 이아(貳衙)라고 부르는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상아로 불렀으며, 목사가 군사령관이라는 의미 또는 홍화각(弘化閣)이라는 영청이 있어서 ‘영’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므로 영뒷골은 영청(營廳)의 뒷마을 또는 뒷길을 의미한다.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에 의하면 ‘홍화각은 제주읍 삼도리에 있다. 세종17년(1435) 최해산(崔海山) 안무사(按撫使)가 창건한 뒤, 인조26년(1648)에 김여수(金汝水) 제주목사가 중수하였다.

안무사와 절제사의 영청으로 사용되다가 숙종39년(1713) 제주목사가 방어사를 겸하면서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영조48년(1772) 양세현(梁世絢) 제주목사가 중수하였고, 순조29년(1829)에 이행교(李行敎) 제주목사가 개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문화원(2005),『譯註 增補耽羅誌』, p.196.
.
《탐라지초본(耽羅誌草本)》에 홍화각은 ‘在延曦閣 世宗乙卯 牧使崔海山創建 古安撫使政堂 今爲營吏廳(재연희각 세종을묘 목사최해산창건 고안무사정당 금위영리청)’으로, ‘(홍화각은) 연희각 남쪽에 있다. 세종17년(1435)에 목사였던 최해산이 창건하였다.

예전에는 안무사가 정무를 보는 곳이었는데 지금은 영리청으로 사용하고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홍화각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헐렸다.

영뒷골 무근성길16-10에는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영업중인 동양여관이 있다. 이곳은 이승만 대통령이 묵은 곳이다.

옛날에는 2개의 건물이었던 탐라여관이었으며 나중에 상속받은 자식들이 각기 따로 영업을 하게 되면서 탐라여관과 동양여관으로 나뉘었고 동양여관 103호에는 1950년대에 이승만 대통령이 묵었다고 하며 탐라여관에는 1960년대에 공연하러 온 신영균, 박노식 등 연예인이 투숙하기도 했다는데 탐라여관은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작성 17061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2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재학 2023-12-18 05:51:00
기사 내용 가운데 '관아 명칭은 만경루라 하였는데'에서 '만경루'는 '망경루'의 오기가 아닌지요

김재학 2023-12-18 05:49:40
기사 내용 가운데 '관아 명칭은 만경루라 하였눈데'에서 '만경루'는 '망경루'의 오기가 아닌지요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