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1964년 7월 3일 개관식..이도1동 제주시민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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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1964년 7월 3일 개관식..이도1동 제주시민회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9.22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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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내에서 처음 시행된 철골구조 건축물로 최대 2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이도1동 제주시민회관

위치 : 제주시 이도1동 1700-1번지[고전길 26]
시대 : 대한민국(1964)
유형 : 관청건물

이도1동_제주시민회관(헤드라인제주)

 

이도1동_제주시민회관(한라일보)

 

제주시민회관은 제주시민들의 문화예술공연 및 각종 행사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문화시설이다. 1960년대 이전 제주 지역에 문화복지 공간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제주시에서는 약 1년여의 공사 끝에 옛 오일장 터에 부지 3,096㎡에 지상 3층, 연건축 면적 1만 2500여㎡ 규모의 제주시민회관을 건립하고 1964년 7월 3일 개관식을 가졌다.

이 때는 정부와 제주도가 '관광 제주'의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열을 올리던 시기이며, 시 승격(1955) 9년만에 당시 인구 8만 시민을 위한 문화공간을 만든 것이다.

연극·영화만이 아니라 실내 체육장을 구비한 공간이었으며, 수세식 변소를 갖췄다는 점도 당시로서는 시대를 앞선 건축이었다.

당시 1646만원의 예산이 투입된 제주시민회관은 서울시 공무원이던 김태식이 설계를 맡았다. 김태식은 앞서 제주관광호텔을 설계한 건축가였다. 제주시민회관은 제주도내에서 처음 시행된 철골구조 건축물로 최대 2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제주시민회관은 사무실과 공연장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사무실은 20㎡, 공연장은 1,962㎡ 정도이다. 공연장 1층은 접의자로 400석 규모이며, 2층은 고정석으로 505석 규모로 총 905석의 관람석을 보유하고 있다. 무대 상부 및 홀 중앙에 기본 조명이 설치되어 있으며, 측면에 4대의 조명기가 설치되어 있다. 부대시설로 대기실과 피아노, 마이크, 녹음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개관식엔 시민 1000명이 몰렸다. 고향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준비한 무용과 소인극이 제주시민회관 무대를 처음 밟은 공연으로 기록되었다.

이후 교양강좌, 건강 세미나, 연극, 음악회, 연주회, 청소년 어울마당, 예술제, 탁구, 태권도, 배드민턴, 단체 관광객을 위한 야간 레크레이션 장소로 이용되었다.

탐라문화제의 전신인 제주예술제와 한라문화제의 음악제, 민속예술제 등 제주지역 문화행사는 물론 뭍나들이가 어려웠던 제주 관객들을 사로잡는 초청 공연 장소로 쓰였다.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을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개관하던 해인 1964년 7월 8일자 지역신문엔 실내 방음 장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 개관 첫날부터 소음이 일었다는 기사가 게재됐다. 그 원인을 두고 설계 때문인지, 공사 과정의 문제인지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개관 초기 영화상영 장소로 쓰였던 제주시민회관의 장비 부족도 불거졌다. 당시 영화 상영에 필요한 물건을 구비하려면 200여만원이 필요했는데 열악한 지방 재정에서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여의치 않았던 것이다. 영사기와 영사막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개점휴업'상태라는 제목이 달린 기사가 또 한번 실렸다. 제주시민회관에서 일부 공연과 배구, 탁구 같은 실내경기만 치러지고 있다고 했다.

제주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를 수료한 김봉학(2001년 작고)씨는 1948년부터 천마합성수지를 운영했다. '애국가'의 작곡가로 널리 알려진 지휘자 안익태와 동행해 제주를 찾았던 재일교포 사업가인 그는 1969년에는 제주은행을 설립해 초대 은행장과 회장을 지낸 분이다.

1964년 2월, 김 회장은 안익태의 두번째 제주 방문길에서 제주시민회관에 물품을 기증하겠다는 뜻을 김인지 제주시장에게 밝혔다.

50만원 상당의 피아노와 20만원이 소요되는 무대막이었다. 안익태가 내도했을 때 지휘했던 탐라합창단을 제주시에서 육성시켜주라는 기증 조건을 달았다. 김봉학 회장은 탐라합창단 고문을 맡고 있었다.

제주석유 홍종언 사장 등이 의자를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1000만원이 넘는 공사비가 소요되는 현실에서 이 같은 물품 답지는 제주시의 숨통을 터주는 계기가 된다.

1964년 5월엔 제3차 재일교포모국방문단이 제주에 왔다. 이 때 강우준 제주도지사는 일본 도쿄에 있는 재일제주개발협회가 제주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며 감사장을 전달했다. 고향에 발디딘 동포들은 그에 대한 화답으로 제주시민회관에 써달라며 마이크, 앰프, 스피커를 기증했다.(한라일보 170704)

1979년 명창 초청 이웃돕기 민속예술 공연, 극단 민예의 '놀부뎐', 선명회 합창단 초청 무대가 잇따랐고 이듬해엔 추송웅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 국립합창단 연주회 등이 제주시민회관 무대에 올려졌다. 제주 음악사에 기억될 만한 무대도 제주시민회관에서 이어졌다.

제주시립합주단 창단 연주가 1985년 3월 열렸다. 같은 해 4월엔 제주시립합창단이 창단 기념 연주를 가졌다. 1987년 4월엔 제주시립교향악단이 이선문의 지휘 아래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등으로 신춘음악회를 열며 제주지역 교향악단 시대의 출발을 알렸다.

제주시민회관은 제주시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 시설로 1960~1980년대까지 제주 지역 문화예술의 성장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공공 집회 및 시민 문화 체육행사 등을 통하여 시민의 문화생활과 복리증진의 공간이 되었다.

제주지역에서 벌어진 굵직한 문화·실내 체육 행사는 대부분 제주시민회관에서 이루어졌다. 필자도 10대, 20대 때에는 이곳에서 영화를 보기도 하고, 여러 공식적인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으며, 30대에는 마당극을 관람하기도 했었다.

1988년 8월 대극장과 전시실을 둔 제주도문예회관이 건립됨에 따라 전문성에서 밀린 제주시민회관의 기존 시설로는 공연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워졌다. 그 대신 클래식 음악과 무대극이 떠나간 자리에 1990년대 이후에는 마당굿이 들어앉았다. 제주4·3을 자유롭게 말하기 힘들었던 1988년 11월 제주시민회관에서 굿판 '4·3의 밤'이 펼쳐졌고 이듬해 4월엔 4·3추모제가 진행됐다.

2002년 8월 30일 제주시에서는 제주시민회관의 시설이 낙후되고 공간이 비좁아 제구실을 하지 못함에 따라 철거 계획을 세웠다. 대신 그 자리에 주차전용 건물을 신축하여 중앙로 등 도심지의 주차난을 해소키로 하였다.

제주시는 예산이 확보되는 대로 제주시 보건소 서남쪽 시유지에 시민문화예술회관 신축 사업을 추진하여 각종 공연이나 행사 장소로 활용할 계획이다. 현재까지도 제주시민회관은 시민들의 집회 장소와 교양강좌, 레크리에이션, 탁구, 태권도, 배드민턴 등 체육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2016년 한해 공공 행사나 생활체육 시설로 제주시민회관을 이용한 인원은 모두 합쳐 5만명이 넘는다.

2016년 2월 제주시민회관은 '제주시민회관 체육관'이란 이름으로 문화재 등록 추진 대상에 오른 적이 있다. 문화재청이 전국적으로 건립된 지 50년 이상 경과한 근현대 체육시설 중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시설에 대해 문화재 등록을 추진하면서 보존 상태가 양호한 제주시민회관도 그중 하나로 제주시에 요청했다.

이 같은 내용이 알려지자 제주시민회관 인근의 일부 주민들은 '문화재'란 말에 민감한 반응을 드러냈다. 등록 문화재는 재산권 피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정 문화재처럼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따를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시 여러 언론에서도 〈제주시민회관은 1964년 준공돼 50년 이상 됨에 따라 건물 노후로 유지관리비가 증가하고 있고, 제주아트센터 건립 이후에는 활용도도 감소되고 있다.

아울러 당초 제주시민회관은 제주시의 문화공연, 집회, 랜드마크 및 원도심의 중심지였지만, 현재는 공연기능이 타시설로 이전되고 원도심 침체 등으로 인해 상징성마저 약화되고 있다〉는 논조로 문화재 지정보다는 활용 방안에 초점을 맞추었다. 결국 논란 끝에 등록 문화재 추진은 없던 일이 됐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민일보 160527, 한라일보170620)
《작성 170620, 보완 17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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