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제주도 북쪽 해안 5개 연륙포구 중 하나..조천리 조천포구
상태바
[향토문화] 제주도 북쪽 해안 5개 연륙포구 중 하나..조천리 조천포구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0.10 11: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진시황이 술사(術士) 서불(徐巿)에게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3천명 파견한 전설의 장소

조천리 조천포구

위치 : 조천리 2690번지의 남쪽
시대 : 미상(탐라시대 추정)
유형 : 포구

조천리_조천포

 

조천포는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포구이다. 이 포구는 제주도의 북쪽 해안에 있는 5개의 연륙포구 중 하나였다.

이증의 南槎日錄(숙종6년2월16일)에 따르면 舊時待風無定處 吊則 禾北浦 於等浦 朝天浦 遇東風向陸 泊白道 館頭 珍島 等處 在西則朝貢川 涯月浦 遇西風向陸 泊於蘭浦 館頭 珍島 草島 等處이라고 하여 화북, 조천, 행원, 외도, 애월포를 연륙포구라고 하였다.

조천리에는 알개와 개낭개(또는 큰물성창)이라는 2개의 포구가 있다. 알개는 겨우 테우나 들여매는 정도이다. 규모로 볼 때 조천포는 개낭개(큰물성창)을 가리킨다.

조천포는 개발머리와 대섬 사이에 있다. 개발머리는 개(浦口)의 바른쪽에 있는 머리라는 뜻이다. 즉 포구에서 볼 때 오른쪽에 있는 코지이다. 지금의 조천항은 개발머리와 똥섬을 의지하여 만들었다.

조천포는 진시황이 술사(術士) 서불(徐巿)을 시켜 발해의 어느 섬에 있다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3천명을 파견했다는 전설의 장소로 진시황구선입해처(秦始皇求仙入海處)’가 있다.『사기』 ‘진시황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제나라 사람 서불이 글을 올려 말했다.
“바다 속에 세 개의 신산(神山)이 있는데, 이름을 봉래산(蓬萊山), 방장산(方丈山),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신선들이 살고 있으니, 청컨대 재계하고 어린 남녀와 함께 신선(神仙)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서불을 보내 어린 남녀 수천 명과 함께 바다로 들어가 신선을 찾도록 했다. 진시황의 명을 받은 서불이 중국을 떠나 맨 처음 도착한 곳이 이곳 조천포였다고 한다.

서불은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하늘의 기운을 살피고서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하여 ‘조천(朝天)’ 이라는 글자를 바위에 새겼다는데 서불이 글자를 새긴 조천바위는 고려시대에 조천관을 건립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선조34년(1601) 조천포로 입도한 김상헌(金尙憲)은 남사록(南槎錄)에서 조천관포(朝天館浦)라고 하였으며 조천방호소 소속 전선(戰船) 1척과 함께 병선도 감출 수 있다고 하였으며, 사공(沙工)의 말을 빌어 朝天館浦口石勢甚惡若日昏則泊船可怕(조천관포구는 석세(石勢)가 매우 험악하여 해가 저물면 배를 붙이기가 두렵다)라고 하였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에는 〈各浦古有監考今廢只朝天浦禾北浦有監考又梁直譏察浦口出入之人(각 포구에는 옛날에 감고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하였다. 다만 조천포와 화북포에는 감고가 있다. 또 양직이 있어 포구를 드나드는 사람을 살핀다.)〉라는 기록이 있다.

숙종5년(1679) 제주어사로 부임한 이증(李增)은 남사일록(南槎日錄)에서 조천포에 대하여 環島皆亂石嵯峨於浦口不得泊船 而此浦非徒船路平順浦口環抱臟船極好矣 嵯우뚝솟을차, 峨높을아, 怕두려워할파
(섬을 둥그렇게 돌아가며 모두 난석(亂石)이 포구에 높이 솟아 있어 배를 붙일 수 없으나 이 포구는 뱃길이 평안하고 순탄하다. 또 난석은 포구를 둥그렇게 에워싸 배를 감추기가 아주 좋다)라고 썼다.

조천항은 제주 지역 선민들이 내륙과의 교통을 위해 이용했던 자연 포구였으나 일제강점기 육지와의 개항지로서 1935년 3개년 계속사업으로 100m의 방파제 축조 공사를 시공하였다. 1개년 사업이 끝날 무렵 방파제 38m가 축조되었으나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공사는 중지되었다.

해방 이후 풍랑으로 인하여 38m 길이의 조천항 방파제마저 무너져 감에 따라 제주 동부 지역에 온전한 포구는 전무한 상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북제주군에 방파제의 보수와 함께 당초 계획대로 100m에 달하는 방파제를 건설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으나 그때까지 조천항에 대한 뚜렷한 투자는 진행되지 않았다.

1972년 3월 13일 조천항은 제주도 고시 제733호에 의거 제2종 어항으로 지정되어 제주도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3년 3천만 원의 예산으로 북방파제 30m를 축조하였다.

1994년 6월 조천항에 대한 개발 계획이 수립되었으며 전체 계획은 방파제 170m, 물양장 320m, 선착장 180m에 총 26억 2500만 원이 투입될 계획이었다.

2005년 12월 1일 「어항법」이 폐지되고 「어촌·어항법」이 제정됨에 따라 조천항은 제2종 어항에서 지방어항으로 변경되었다.(고광민, 『제주도포구연구』,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황경수 글)
《작성 17071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