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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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0.1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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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전 호에 이어서 계속)

 

2.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한라산(漢拏山)’ 관련 기록

○ ‘한라산(漢拏山)’ 관련 기록(<제주풍토록> 중)

“만약 한라산 정상에 올라 푸른 바다를 돌아보고, 아울러 남극(南極)의 노인성(老人星)을 굽어보노라면(노인성은 그 크기가 샛별과 같고 하늘 남극의 축에 있어 땅 위에 나오지 않는다. 만약 이 별이 나타나면 땅위에 어질고 장수하는 이가 많을 상서로운 징조이다.

오직 한라산과 중국 남악에 올라야 이 별을 볼 수 있다.) 월출산(月出山)이나 무등산(無等山) 등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면, 흉금을 호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이태백(李太白)이 천태산(天台山)에 올라 ‘구름 드리움은 대붕(大鵬)이 날개짓 하는 것이고[雲垂大鵬飜], 파도가 치는 것은 거오(巨鰲)가 잠수하는 것이라[波動巨鰲沒].’라는 시구를 남김이 오직 여기에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귀양 온 죄인의 몸이라 그럴 수가 없구나. 그러나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큰 바다를 가로지르고, 이러한 색다른 곳을 한번 밟아보고, 이 유별난 풍속을 보았으니, 또한 세상의 기이하고 장쾌한 일이다. 대개 오고 싶어도 오지 못하고, 그만두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또한 운명에 미리 정해져 있는 듯하다. 어찌 만족하지 않을 수 있으랴.

[若登漢拏絶頂 四顧滄溟 俯觀南極老人 老人星 大如明星 在天南極之軸 不出地上 若現則仁壽之祥 唯登漢拏及 中原南嶽 則可見此星 指點月出无等諸山 可盪奇胸 如太白所云 雲垂大鵬飜 波動巨鰲沒者 唯此可以當之 惜吾覇囚 勢不能耳 然男兒落地 橫截巨溟 足踏此異區 見此異俗 亦世間奇壯事 蓋有欲來不得 欲止不免者 似亦冥數前定 何足與焉]”

○ 현재 한라산 정상 암벽에 남겨진 ‘김정(金淨)’ 석각명(石刻銘)

 

 

○ 과연 충암(冲庵)은 당시 한라산(漢拏山)에 올랐을까?

- 당시 제주목사 이운(李耘)의 배려와 선처가 예상됨

* 《충암집(冲庵集)》에 보면, 충암이 이운목사를 위해 특별히 지은 <한라산기우제문(漢拏山祈雨祭文)>과 더불어 <장올악기우문(長兀岳祈雨文)>이 함께 실려 있음

<참고자료>

 조경(趙絅, 1586~1669)의 《용주일기(龍洲日記)》의 부록으로 소개된 <백마산성에 위리안치되었던 일을 기록하다[白馬山城圍籬記]>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있다.

 “옛날에 김 충암공(金冲庵公)은 탐라(耽羅)로 귀양 갔을 때 반드시 한 달에 두 번은 한라산(漢拏山)을 올랐는데, 우리인들 무슨 죄 될 것이 있겠습니까?[昔金冲庵公 謫耽羅也 登漢拏山 一月必再 吾等何罪哉]”

 

3.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우도가(牛島歌)>

 

〇 聞方生談牛島歌以寄興 / 방생(方生)의 우도 이야기를 듣고 노래로 흥을 부침

瀛洲東頭鰲抃傾 / 영주산 동쪽머리, 산을 졌던 자라[鰲] 춤추면서 기울더니

千年閟影涵重溟 / 천년 비궁(閟宮)의 모습, 깊은 바다에 잠겼어라.

群仙上訴攝五精 / 뭇 신선들 상제께 호소하여 오정(五精)을 끌어들이매

屭贔一夜轟雷霆 / 하룻밤 힘써 일을 내니, 우르릉 벼락 천둥소리 요란했네.

雲開霧廓忽湧出 / 구름 개고 안개 걷히자 홀연히 솟아나니

瑞山新畫飛王庭 / 상서로운 산, 새로 그려내어 급히 조정에 보고됐네.

溟濤崩洶噬山腹 / 성난 파도, 높이 솟구치며 산허리 잡아채고,

谽谺洞天深雲扄 / 툭 트인 산골짝, 깊게 구름 빗장 걸렸어라.

稜層鏤壁錦纈殷 / 깎아지른 절벽, 온통 비단 무늬 아로새겨놓아

扶桑日照光晶熒 / 부상(扶桑)에 해 비치니 수정처럼 빛 반짝거리고,

繁珠凝露濺輕濕 / 흩어진 물방울 이슬 맺혀 물기 촉촉한데

壺中瑤碧躔列星 / 호중(壺中) 별천지의 푸른 구슬, 별자리를 심어놓았네.

瓊宮淵底不可見 / 옥 궁전 수궁(水宮) 속, 물 깊어 볼 수 없고

有時隱隱窺窓櫺 / 때로 언뜻언뜻 그 창살만 어렴풋이 보인다네.

軒轅奏樂馮夷舞 / 황제 헌원씨의 풍악에, 수신(水神) 풍이는 춤을 추고

玉簫䆗窱來靑冥 / 그윽한 옥퉁소 소리, 먼 하늘에서 들려오네.

宛虹飮海垂長尾 / 휘어진 무지개, 바닷물 마시느라 긴 꼬리 드리우고

麤鵬戱鶴飄翅翎 / 거친 대붕새, 학을 희롱하며 날개 짓 퍼덕이네.

曉珠明定塵區黑 / 영롱한 샛별 밝게 빛나건만, 진세는 아직도 깜깜밤중

燭龍爛燁雙眼靑 / 촉룡(燭龍)의 부릅뜬 두 눈, 푸른 기운 뻗쳤네.

驂虯踏鯶多娉婷 / 용이 끄는 수레 타고 잉어 밟고 놂이 하도나 아름답고

天吳九首行竛竮 / 머리 아홉 달린 천오(天吳)귀신 어슬렁대며 가는구나.

幽沈水府囚百靈 / 물속 깊고 으늑한 궁전에 온갖 바다영령들 가둬놓아

邪鱗頑甲毒風腥 / 고약한 물고기, 딱딱한 조개들 독한 비린내 풍겨내네.

太陰之窟玄機停 / 태음(太陰)의 기운 서린 굴에 현묘한 이치 머물고,

仇池禹穴傳神蹟 / 구지산(仇池山), 우(禹)임금 무덤에선 신의 자취 전하는데

惜許絶境訛圖經 / 애석하게도 절경(絶境)이라 도경(圖經)엔 빠졌구나.

蘭橈拏入㩳神形 / 조각배 노 저어 들어가니 심신(心身)이 쭈뼛하고

鐵笛吹裂老怪聽 / 날라리[太平簫] 요란히 불어대니 늙은 용이 듣는구나.

水咽雲暝悄愁人 / 물은 오열하고 구름 짙어지며 사람을 근심 속에 빠뜨리니,

歸來怳兮夢未醒 / 황홀하다, 돌아옴이여! 아직도 꿈속인 듯 몽롱하기만 하네.

嗟我只道隔門限 / 아, 난 다만 문이 막혀있어 나갈 수 없다고 말해야 하나!

安得列叟乘風泠 / 어찌하면 열자(列子)처럼 맑은 바람 타고 맘껏 날아볼까.

※ 운자 : 평성(平聲) ‘靑(청)’운 - 溟, 霆, 庭, 扃, 熒, 星, 櫺, 冥, 翎, 靑, 婷, 竮, 靈, 腥, 停, 經, 形, 聽, 醒, 泠

○ 우도에 건립된 충암의 <우도가(牛島歌)> 시비(詩碑)

 

'우도가(牛島歌)' 시 낭송 - 원문 : 김응일(충암17대종손) ‧ 역문 : 현행복 
제막식 광경(우도면장 여찬현 외 주민 다수)

 

참가자 기념 촬영<br>
참가자 기념 촬영

 

4. 임절사(臨絶辭)

충암이 제주에서 사약을 받아 운명하기 전 지은 절명사(絶命詞)가 바로 이것이다. 선생의 나이 36세이고, 제주로 귀양 온 지 1년 2개월 만의 일이다.

 

投絶國兮作孤魂 /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몸을 던져 외로운 넋이 되매

遺慈母兮隔天倫 / 어미 홀로 남겨둔 채 천륜(天倫)을 어기누나.

遭斯世兮殞余身 / 이런 세상 만나 이 한목숨 다할진대

乘雲氣兮歷帝閽 / 구름 기운 얻어 타 천제(天帝) 문전 밟아보고,

從屈原兮高逍遙 / 굴원(屈原)을 따라 높은 곳을 거닐어도 볼까나.

長夜暝兮何時朝 / 긴 밤이 너무 어둡구나! 아침이 오긴 오는 건가.

炯丹衷兮埋草菜 / 빛나는 붉은 충절 잡초 속에 묻혀두고

堂堂丈夫兮中道摧 / 당당한 장부의 지조, 중도에 꺾이누나.

嗚呼 / 아, 슬프구나.

千秋萬歲兮應我哀 / 천만년 지난 뒤에라야, 내 슬픔 알아주려나.

충암 김정 묘소를 방문하여 배례하는 필자(2009. 11. 6.)

 

<참고자료> 백호(白湖) 윤휴(尹鑴, 1617~1680)가 <신사년 초겨울에 쓰다(辛巳孟冬書)>라는 제목의 글에 보면, 그가 외조부로부터 자세히 들었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 글은 그의 문집 제33권에 수록되어 있다.)

“충암선생이 제주로 귀양 갔는데 금부랑(禁府郎)이 사약 사발을 들고 갔다.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평소 주량이 커서 짐주(鴆酒: 짐독을 섞은 술) 한 병으로는 내 목숨이 끊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소주를 많이 준비해 두고 기다리라.’ 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음독을 하고서 얼굴빛이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하였다. 집에 보낼 편지를 다 쓰고 이어 절명사(絶命辭)까지 쓰고 나서 다시 소주를 가져오게 하여 몇 병을 다 마시고는 취한 채 누워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족자(族子)에게 쓴 편지는 글자 획이 평소와 다름이 없었는데, 거기에는,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되었는데 나의 죽음이 오히려 늦은 편이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 외조부가 직접 그 글을 보시고 내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의 절명사는 선생의 문집에 실렸는데, 그 내용과 기상이 속세를 초월하여 하늘에까지 뻗치고 있는 듯하여, 참으로 천년 뒤에 보더라도 눈물을 흘릴 만한 내용이다.

[冲庵竄濟 禁府郎以後命挈鴆至 公語人曰余酒量素寬 一壺鴆飮 有不足以盡吾命也可多辨燒春以須之 旣乃飮毒 顔色無變 嗄取紙筆 具作家書 繼述絶命詞然後 更呼燒春 痛飮至數壺 乃醉臥不起 其與族子書 筆盡與平日無異 其爲詞有曰 國事至此 吾死晩矣 余外祖父尙及見其親簡絶命詞 見文集 其辭氣逸發 上逼沈淵之辭 眞可以隕千載之淚矣 - 《白湖先生文集)》(卷三十三)]

제주에 가매장했던 그의 시신은 사후 1년 뒤인 중종 17년(1522) 겨울에 그의 계자(繼子, 선생의 후사가 없어 형의 아들을 계자로 삼음) 철보(哲保)와 동생 이(易)가 운구하여 청주 주안현 탑산리 을좌(乙坐)의 언덕에 모셔와 장례 지냈다. 현재 그의 묘소는 대전시 동구 신하동에 있는데, 지난 1978년 대청댐 수몰로 물에 잠기게 되자 이곳으로 묘를 옮기게 되었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다음 호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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