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도민들의 시체로 즐비했던 끔찍한 역사의 장소..서귀동 소남머리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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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도민들의 시체로 즐비했던 끔찍한 역사의 장소..서귀동 소남머리학살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0.17 07: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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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사건 당시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희생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서귀동 소남머리학살터

위치 : 서귀포시 서귀동 94-1번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학살터

서귀동_소남머리
서귀동_소남머리(디서문)

 

제주4·3사건 당시 서귀리는 서귀면뿐만 아니라 제주도 한라산 남쪽 지역의 중심지였다. 면사무소와 남제주군청이 있었고 서귀포경찰서도 서귀리에 있었다. 때문에 토벌이 강화되면서 토벌대의 주요 근거지가 되어 대대본부가 위치해 있었고, 취조를 담당하는 정보과[대대2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귀포경찰서도 서귀리에 있어서 대부분 혐의자 및 중산간 초토화 이후 야산을 헤매던 피난민들이 붙잡히면 이곳 군부대에서 취조당하고 처형되었다.

4.3 당시 정방폭포를 중심으로 한 서귀리(현 송산동) 지역은 군부대가 주둔했던 토벌대의 거점지역이었다. 현재 송산동 주민센터는 과거 서귀포면사무소였으며 4.3 당시에는 2연대 1대대의 본부 건물로도 사용됐다. 현재 서귀포초등학교는 1대대 6중대 병력의 주둔지였다.

헌병대와 서귀포경찰서가 6중대 주둔지와 인접해 있었고, 인근 전분공장이나 단추공장 등의 시설은 수용소로 사용됐다.

군부대의 수용소에는 수감자로 넘쳐났다. 특히 군부대 정보과에서 산간에 피신한 주민들을 붙들거나 조그만 혐의를 내걸어 붙잡아 온 주민들을 고문 취조했던 농회창고는 악명이 높았던 곳이다.

즉, 당시 면사무소에는 군부대가 주둔했고 그 옆 창고에는 주민들을 수감시켜 취조를 하고 대부분 총살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군인들의 구타, 고문이 연일 자행되면서 비명 소리가 멈추지 않았고 이때 취조 받은 주민들 중 즉결처형 대상자들 대부분을 처형했던 일상적인 주민학살터가 된 곳이 정방폭포 상단과 이어지는 소남머리다.

소남머리는 동산에 소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흔히 4·3사건 당시 정방폭포에서 희생당했다고 하는 희생자 대부분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정방폭포와 소남머리에서 학살당한 희생자 수는 247명. 각종 자료를 통해 알려진 숫자지만 밝혀지지 않은 실제 희생자 수는 더 많다.

이곳에선 서귀리 및 서귀면 일대의 주민뿐만 아니라 남원면 의귀·수망·한남리 주민과 중문면, 멀리 안덕면 동광리 주민 등 산남지역 전체에 이를 정도로 많은 주민희생이 있었다. 산남 최대 학살장소라고 할 수 있다.

정방폭포를 비롯해 자구리해안, 소남머리, 소정방, 거믄여 등 절경을 뽐내는 서귀포 해안가는 4.3당시 도민들의 시체로 즐비했던 끔찍한 역사의 장소다.

서복전시관 야외 공연장은 4.3당시 전분공장 겸 수용소이며 학살이 벌어지던 논(畓)이었다. 이곳에선 서귀리 및 서귀면 일대의 주민뿐만 아니라 남원면 의귀·수망·한남리 주민과 중문면, 멀리 안덕면 동광리 주민 등 산남지역 전체에 이를 정도로 많은 주민희생이 있었다.

특히 당시 대동청년단들로 하여금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하는 등 학살은 광기를 띠고 있었다. 당시 서귀중학교 학생이었던 송세종[남, 2003년 71세] 씨는 “그 때 당시 어디 여자인지는 모르지만, 도망가다가 절벽으로 떨어졌는데 나무에 걸렸어. 그 여자가 임신을 하고 있었지. 떨어지니까 군인들이, 이건 하늘이 도운 사람이라 해가지고. 그러니까 사람 두 번 죽인다는 것이 없으니까. 나도 직접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이라 회고했다.

이곳은 당시의 지형과 별 차이 없이 옛터가 남아 있다. 정방폭포 등 절벽을 이루는 서귀포 해안의 특성 때문에 특별히 개발 흔적도 없다.(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김보성씨 답사 안내 자료)
《작성 17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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