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4)-수정사(水精寺)는 제주에서 어떤 내력을 지닌 사찰인가?
상태바
(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4)-수정사(水精寺)는 제주에서 어떤 내력을 지닌 사찰인가?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0.26 1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 관련 글 모음

 

(1)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2) <우도가(牛島歌)>

(3)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

 

수정사(水精寺) 탑 몸돌에 새겨진 인왕상(仁王像) 모습(사진제공 : 국립제주박물관)

 

【절문(切問)】

○ 충암(冲庵) 김정(金淨) 선생의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은 어떤 내용이 담긴 글인가?

○ 수정사(水精寺)는 제주에서 어떤 내력을 지닌 사찰인가?

○ 충암(冲庵) 김정(金淨) 선생은, 제주로 유배를 오기 전 중앙 조정에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을 정도로, 대단한 유학자(儒學者)이다. 그런데 평소 불교를 숭상하는 불자처럼, 어째서 불사(佛寺)의 중수(重修)를 권장하는 글을 짓게 된 것일까?

○ 이 글 첫머리 부분의 원주(原註)에 보면, “홍유손(洪裕孫)도 앞서 이런 글을 지은 바 있다.[洪裕孫亦先有此文]”라고 했다. 이런 내용을 이례적으로 서두에 언급한 까닭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홍유손이 남긴 글이란 어떤 것인가?

○ 본래 홍유손(洪裕孫)의 글인데, 착오로 인해 충암(冲庵) 김정(金淨) 선생의 글이라고 잘못 소개한 사례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게 그러한가?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 (전문)

【원문(原文)】

【판독(判讀)】

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 正德辛巳正月旣望 洪裕孫 先亦有此文

維耽羅 國於海島 舟道敻遠 有風濤寇剽之虞 土之人士率憚於遊學北方 聞道者蓋鮮 以故

【해석(解釋)】

○ 도근천(都近川) 수정사(水精寺)의 중수(重修)를 권하는 글

정덕(正德) 신사(辛巳, 1521)년 정월 기망(旣望, 음력 16일)에 쓰다. 앞서 홍유손(洪裕孫)도 이런 글을 썼다.

이른바 탐라국(耽羅國)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기에 그 뱃길은 아득히 멀다. 바람과 파도, 혹은 왜구의 약탈에 대한 근심이 많기에 토박이 사람들은 북쪽의 뭍으로 나가 학문에 전념하기를 꺼린다. 도리(道理)를 들어 아는 자가 적기에 (…)

【원문(原文)】

【판독(判讀)】

甿俗朴鄙而癡 野而好敎 凡有所求祈禳病厄 得喪福禍 一聽於神 乃奉貍鼠蛇鬼以爲神 䕺祠相望 錚鼓相聞 有名日朔望七七之祠 祠 一作祀 必殺牲牢糜酒食以爲饗 以是祠益謹 而畜益耗業益損 以至災沴妖訛 饑饉癘疫 盜賊繁興 而益虔不怠 雖揭之以仁義 敺之以刑威而不能已也 求其所以化之之方 唯佛爲最近 佛之爲敎 主慈而禁殺 有緣業福罪之權 空寂出離之妙 聳動大勝之機 俗易怵而人易趍也 由

【해석(解釋)】

이곳의 풍속은 자연스레 질박하고 비루하며 어리석기까지 해서 어떤 믿음을 좋아한다. 대개 구하는 바가 있으면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는데, 병이나 액운 때문에 상(喪)을 당하면 그 복과 화를 하나같이 신에게 들으려 한다. 급기야 삵괭이나 쥐, 뱀 귀신마저도 신으로 여겨 모신다.

수목이 우거진 곳에 있는 사당들이란 여기저기 서로 마주 보일 정도이고, 징 소리와 북소리가 연이어 들려나올 정도이다. 명절 때 가는 사당, 초하루 보름이면 가는 사당, 7일 자 되는 날 찾아가는 ‘일렛당’ 등이 있다. 이 제사에는 반드시 가축을 죽여 희생을 삼고 죽과 술, 음식 등으로 향연을 삼는다. 이러기에 사당은 날로 삼가는 곳이 되고, 가축은 날로 소모가 되며, 사업은 날로 손해가 일어난다.

급기야 악기(惡氣)로 인한 재앙이 나타나기도 하고, 요사하고 거짓된 말이 나돌며, 기근(饑饉)과 전염병이 도는가 하면 도적떼가 자주 발생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제사는 더욱 경건하고 태만할 줄을 모른다. 비록 인(仁)과 의(義)를 내걸어도, 형벌과 위엄으로 옥죄어도 막무가내이다. 그들을 교화시킬 방편을 찾아내야하는 까닭에 그것을 찾다보니 오직 부처만이 가장 근접한 해결책이었다.

부처를 믿는 종교란 자비를 위주로 하면서 살생을 금한다. 세상에서 지은 업(業)의 인연이 바로 복을 내리고 죄를 주는 저울[權인] 셈이다. 공(空)과 적막함의 세계로 떠나올 수 있는 오묘함이 있기에 충동하면 크게 이길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따라서 풍속은 쉽게 두려워할 수 있게 만들 수 있고 사람들은 이에 쉽게 붙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원문(原文)】

【판독(判讀)】

是而崇其棟宇 嚴其像設 俾得有歸依 其病厄得喪祈求 有所憑恃 作善 躍然有所欣 造惡 瞿然有所忌 夫然則妖淫之祠 無益之殺 可以少弛也 由是而良心介然 孝弟油然 日遷善遠罪 沛然流入於仁義之途 以服上之敎化 則其於理化 豈少裨乎哉 由是而人化旣融 天和幸應 災沴癘疫消息 夫然則雖持卷而普勸之 從而鼓舞之縱臾之 起發其信心 共結良緣 捐財倂力 更新舊刹 未爲過也已 或曰 子儒者 不務敷

【해석(解釋)】

이런 연유로 말미암아 그 암자의 건물을 숭상하게 되고 그 불상의 시설에 위엄을 갖추게 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레 불가에 귀의(歸依)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병과 액운 때문에 상(喪)을 당한 사람들이, 빌고 얻고자 함에는 착한 일을 지음에 의지하는 바가 생기게 되고, 눈앞에 전개되는 행동에는 나쁜 일에 두려워하고 기피하게 만드는 것이다.

무릇 그렇다면 요사하고 나쁜 사당은 적어지고 무익한 살생은 느슨해질 것이다. 따라서 양심이 고결해지면서 저절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질 것이며, 날마다 잘못을 바로잡아 고쳐나가면서 죄를 멀리함이 활기차게 전개될 것이다.

이것이 인의(仁義)의 길로 들어서면서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교화가 일어나게 한다면 그 이치에 맞는 교화가 어찌 적은 보탬이 된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사람의 교화가 무르익고, 하늘의 화기(和氣)가 다행스럽게도 조응(照應)하니 악기(惡氣)로 입은 재난은 자연스레 사그라지고 전염병의 창궐은 그치게 되는 것이다.

무릇 그렇다면 비록 책을 지닌 채 널리 따라오기를 권면함이나 신심(信心)이 일어나도록 직접 고무시키면서 부추김이나 매한가지로 모두 좋은 인연을 맺도록 함인 셈이다. 이에 재물을 출연하고 힘을 한데 모아 다시 옛 사찰을 새롭게 함이란 사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은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게 말을 하기를,

“그대는 유자(儒者)로서 (…)

【원문(原文)】

【판독(判讀)】

揚孔子之道 以牖乎遠俗 而顧且屢屢焉資誕謾異敎以爲說 豈亦信道不篤也歟 且將陷溺人心 靡靡不可止 子焉所逭其諐 余曰然 子固以是而病我乎 夫無所爲而爲善 雖學者猶病之 彼民俗之所喩者 利害也得喪也 所喜而惡者 福與禍也 彼但知利之利 不知仁義之利利 彼且恣睢奮敓 唯蘄利乎己而不暇顧夫病乎物 如是焉而驟而告夫仁義 彼寧知仁義爲何物 提耳而惇誨之 耳受而腹扞 悾悾然矣 然而罪

【해석(解釋)】

공자의 도를 널리 전파하고 선양하면서 먼 곳의 풍속을 이끄는 일에 힘써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곧 황당한 이교(異敎)를 들먹거리며 누누이 강조함이란 이 어찌 도를 신뢰함이 옮아가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미미한 일에 인심을 빠뜨리게 함이 멈추지 않을 듯한데 그대는 어찌 그 허물을 면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에 내가 이르기를,

“허나 그대는 참으로 이것을 두고 나의 병폐라고 여기십니까? 무릇 달리 할 바가 없는데도 선(善)을 행하라 함은 비록 배우는 학자라고 해도 오히려 그것을 병폐로 여깁니다. 저들 백성들의 풍속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는 한마디로 이해득실(利害得失)입니다.

기뻐해 할 것은 복(福)이요 두려워해 할 것은 화(禍)입니다. 저들 백성들은 다만 이해관계에서의 이익에 대해서만 알 뿐이지 인의(仁義)의 가치로 말미암아 생기는 이익은 알지 못합니다. 설사 저들을 이롭게 한다 하더라도 제 고집대로만 할 뿐 오직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만 분연히 태도를 바꾸면서 돌아다 볼 겨를조차 없습니다.

무릇 사물에 대한 병폐가 이러할진대 갑작스레 인의(仁義)를 들먹거린다면 하물며 저들이 인의를 어떤 것으로 알겠습니까? 귀를 잡아끌며 열심히 가르쳐 깨우친다 해도 귀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마음속으론 막아서면서 멍멍한 모습을 보일 게 뻔합니다.

그러나 죄와 (…)

【원문(原文)】

【판독(判讀)】

福迫己之言 猶或有時竦然動乎中而聽嚮焉 其下者猶怯乎罪福而不敢肆焉 由是而漸之乎善而除乎惡 其不愈也耶 茲固納約自牖之道也歟 彼佛氏者 生於西蕃獷悍之區 雖使畢世談仁義道德 未必有一二化也 唯其廣張罪福而脅誘之 彼其垂首受敎 不闞然屬刃以相視者亦幸矣 此亦其設敎之權也 彼爲敎雖誕謾憋慌 其歸使人去惡從善 復其良心則一也 不知者 固且以是而病吾 後有知者 必且因是

【해석(解釋)】

복이 자신을 옥죄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은 그래도 간혹 움찔해 하며 몸을 떨게 만들 수도 있기에 도중에 귀를 기울이게도 할 것입니다. 한 단계 아래 수준의 사람의 경우엔 오히려 죄와 복으로 겁을 주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점차로 선에 다가가면서 악이 제거된다면 더 낫지 않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간략하면서도 사람을 절로 바른 길로 인도함이 아니던가! 부처란 사람은 본래 서번(西蕃)의 거칠고 사나운 지역에서 태어났기에 설령 생이 다할 때까지 인의와 도덕을 얘기하게 한다 해도 한둘의 교화도 필히 이루어질 수 없다고 봅니다.

오직 그는 죄와 복을 널리 열어서 저들을 협박하고 유혹해냈던 것입니다. 저들은 머리를 수그리고 교리를 받아들면서도 입을 열어 한 마디의 불평도 늘어놓지 않습니다. 칼날에 추종하면서도 서로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 또한 설교의 한 표본인 것입니다.

저들이 믿는 교리가 비록 황당하고 어리둥절케 한다 해도 그 미덕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내쫓고 선을 따르게 해서 그 양심을 회복케 해준다는 점인데, 결국 이는 하나로 통합니다. 알지 못하는 자가 잠시 이를 두고서 나의 병폐라고 여길지 모릅니다만, 훗날 아는 자가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원문(原文)】

【판독(判讀)】

而得吾心焉耳 吾固有所不得已於斯言 而於吾心 有惻然焉 高君根孫 信佛而心乎善者也 念元朝舊物巋然獨存者 唯都近川之水精寺 風掀雨淋 甍桷侈剝 惜其且遂圮而無餘存也 慨然奮思與同志者仍其舊而重營之 庶幾其不墜 乃來求文於余甚勤 於是乎撰其答客之語 書以畀之

【해석(解釋)】

내 마음을 진정 이해시킬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내가 참으로 부득이하게 이런 말까지 해야 함이 내 마음에 서글픈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고근손(高根孫) 군은 불교를 믿으면서도 마음이 착한 자이다. 생각건대 원(元) 나라 때의 오래된 유물로서 우뚝하게 홀로 남아 존재하고 있는 게 오직 도근천(都近川)의 수정사(水精寺)뿐이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흔들리고 젖어들면서 건물의 용마루와 서까래가 썩고 벗겨졌는데, 장차 그것이 허물어져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를 애석하게 여겼던 그는, 이에 보다 못해 생각을 강하게 떨쳐내어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더불어 그 옛 모습을 보존하면서 그것을 다시 중수(重修)하고자 한 것이다. 원컨대 그것이 무너지지 않기를 빌면서 나에게 찾아와 문장을 구하려 듦이 참으로 열심이었다. 이에 그 길손에게 답하는 형식의 글을 지어 그에게 주노라.

 

2. 수정사(水精寺)의 내력(來歷)

 

고려 충렬왕 20년(1294) 동판에 그린 인왕상(仁王像) 모습(사진제공 : 김진형)

 

제주시 외도동 월대천 서쪽 기슭에 자리했던 수정사(水精寺)는 현재 그 절터만 남아있다.

고려말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에 보면 작자 ‧ 연대 미상의 수정사(水精寺)를 소재로 한 고려가요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 본래 제주 백성들이 부르던 민요였는데, 이를 악부체의 한시로 해역(解譯)한 것이다. 부패한 사대부들과 승려들의 방탕한 생활을 늙은 기녀의 말을 통하여 폭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인즉슨 이렇다.

“도근천 제방이 터져[都近川頹制水防] / 수정사 안에 물이 출렁이네.[水精寺裏亦滄浪] / 승방에다 이 밤 미인을 재우니[上房此夜藏仙子] / 주지는 도리어 뱃사공이 되었네[社主還爲黃帽郞]”

특히 뱃사공[黃帽郞]을 등장시켜 기녀와의 행각을 풍자적으로 노래함이 특징적이다.

한편 《조선왕조실록》 ‘태종(太宗) 8년(1408) 2월 28일’조에 보면, 의정부(議政府)에서 제주(濟州)의 법화(法華) ‧ 수정(修正 * ‘水精’의 오기인 듯함) 두 절[寺]의 노비(奴婢)의 수를 정한 기록이 보인다. 곧, “제주 목사(濟州牧使)의 정문(呈文)에 의거하면 주경(州境)에 비보 사찰(裨補寺刹)이 두 곳인데, 수정사(修正寺)에는 현재 노비 1백 30구가 있고, 법화사(法華寺)에는 현재 노비 2백 80구가 있으니, 비옵건대 두 절의 노비를 다른 사사(寺社)의 예(例)에 의하여 각각 30구를 주고, 그 나머지 3백 82구는 전농(典農)에 붙이소서.”라고 하니 임금이 이를 윤허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 불우>조에 보면, “수정사는 도근천 서쪽 언덕에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고, 담수계편의 《증보탐라지》에는 “제주읍 도근천 서쪽 기슭에 있으니 고려 충렬왕 26년(1300)에 원(元)나라 황후가 창건한 절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사찰이 창건된 지 220년이 지난 중종 15년(1520)에 제주도에 유배된 충암(冲庵) 김정(金淨) 선생은, 수정사(水精寺)의 중수(重修)를 계획하는 제주 토박이 불자 고근손(高根孫)의 간절한 요청으로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靜寺重修勸文)>이란 글을 써 주게 되었던 거다. 이 글에서 충암은 "원대(元代)부터 있었던 고찰(古刹)로서 제주에 남아있는 것은 도근천의 수정사 하나뿐이다."라고 적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편 국립제주박물관에는 현재 수정사 터 출토품이 전시되고 있는데, 지난 1998년 발굴작업 당시에 발견된 탑 몸돌에서 인왕상(仁王像)이 음각된 형태가 매우 인상적이다.

이는 참고로 인용한 그림인 고려 충렬왕 20년(1294)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의 사경(寫經) 동판에 그려진 인왕상(仁王像)의 모습과 빼닮았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다음 호에 계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