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5)-'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 서두에서 밝힌 ‘홍유손(洪裕孫)의 이런 글[此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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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5)-'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 서두에서 밝힌 ‘홍유손(洪裕孫)의 이런 글[此文]’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0.29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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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게속) 

 

3. 유학자(儒學者)인 충암(冲庵)이 평소 불교를 숭상한 불자처럼 불사(佛寺)의 중수(重修)를 권장하는 글을 짓게 된 사연

 

주지하다시피 조선(朝鮮)조 5백 년의 기간은 이전 고려(高麗)와는 달리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그 사회적 이념으로 내세우던 시대였다. 심지어 유가(儒家)의 내부에서조차도 당색(黨色)의 논리에 의해 자신들의 정책과 노선이 다르면 이를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극단적으로 죄악시하던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던 때이기도 하다.

더욱이 충암(冲庵) 김정(金淨) 선생은, 제주로 유배를 오기 전 중앙 조정에선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했을 정도로, 대단한 유학자(儒學者)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평소 불교를 숭상하는 불자처럼 불사(佛寺)의 중수(重修)를 권장하는 글을 짓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그가 지은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이란 글 가운데 자문자답(自問自答)의 형식을 빌려 특별히 밝혀놓고 있기도 하다. 충암은 그 글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그대는 유자(儒者)로서 공자(孔子)의 도를 널리 전파하고 선양하면서 먼 곳의 풍속을 이끄는 일에 힘써야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제 곧 황당한 이교(異敎)를 들먹거리며 누누이 강조함이란 이 어찌 도를 신뢰함이 옮아가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라고 하며 먼저 스스로 묻는다.

“ … 죄와 복이 자신을 옥죄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은 그래도 간혹 움찔케 하며 몸을 떨게 만들 수도 있기에 도중에 귀를 기울이게도 할 것입니다. 한 단계 아래 수준의 사람의 경우엔 오히려 죄와 복으로 겁을 주면 마음을 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 저들이 믿는 교리가 비록 황당하고 어리둥절케 한다 해도 그 미덕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내쫓고 선을 따르게 해서 그 양심을 회복케 해준다는 점인데, 결국 이는 하나로 통합니다.”

결국 충암이 백성들로 하여금 불교를 믿도록 권장함이란, 당시 음사(淫祠)만을 숭상하는 제주도의 어리석은 백성들을 교도하고 계몽하기 위한 방편(方便)의 하나로서 부득이 불가의 논리인 죄와 복의 논리를 끌어들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자 해명인 것이다.

이는 자신의 또 다른 글인 <제주풍토록(濟州風土錄)>에서도 강조한 바 있다.

“대체로 그 마음의 이익에는 몹시 밝으면서도 그 밖의 것은 모르니 염치와 선함을 말하면 이롭지 않다고 여기고 이를 몹시 싫어하는 것이다. 만일 고승이 있어서 입을 잘 놀려서 천당과 지옥을 가지고 겁준다면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라고 함이 보인다.

아울러 제주 토박이인 고근손(高根孫)이란 자가 있어 허물어져만 가는 수정사 법당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겨 중수(重修)할 수 있도록 이를 권장하는 글을 간절히 부탁해왔기에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짓게 되었음도 아울러 밝히고 있다.

아마도 충암 자신이 예상하기로, 이러한 교화적 방편의 글이 당시 식자층이나 지도층에게 반발을 사게 하면서 지탄과 비방으로 이어질 것이기에, 이처럼 그 명분과 당위성을 그 가운데 내세워 이를 구체화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기에 충암이 유학자일 뿐만 아니라 불가에 대한 깊은 사상을 지닌 사상가였음을 두고서 어떤 이는 이르기를, ‘외유내불(外儒內佛)’이란 표현을 써서 강조하기도 했다.

수정사(水精寺) 터 석탑재 출토 모습(사진제공 : 국립제주박물관)

 

4. 충암의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 서두에서 밝힌 ‘홍유손(洪裕孫)의 이런 글[此文]’

현재 규장각 장본으로 전해지는 《충암선생문집(冲庵先生文集)》에 보면, 충암 선생이 지은 제주 관련 글 가운데 특별히 ‘존자암(尊者庵)’을 대상으로 해 쓴 글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의 글에서조차 ‘존자암’을 언급한 대목은 없다.

다만 글 첫머리 부분에 보면, 원주(原註)에서 이 글을 쓴 날이 조선조 중종(中宗) 16년(1521) 음력 정월 16일임을 밝히고 난 뒤, 이어서 “홍유손(洪裕孫)도 앞서 이런 글을 지은 바 있다.[洪裕孫亦先有此文]”라고만 적시(摘示)하고 있다. 충암이 이런 내용을 이례적으로 서두에 언급한 까닭은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홍유손이 남긴 글이란 어떤 내용이 담긴 글인가?

‘자신 보다 앞서 홍유손도 썼다’라고 한 글은, 다름 아닌 <존자암개구유인문(尊子庵開構侑因文)>이다. 이는 곧 ‘존자암(尊者庵) 개축(改築)의 당위성을 들어 그 개축을 촉구하는 글’을 쓴 셈이다. 이에 비해 충암 선생이 쓴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은 ‘도근천(都近川)에 위치한 수정사(水精寺)란 절의 중수(重修)를 권장하며 쓴 글’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일련의 글들은 조선조 사회에서 우선 유자(儒者)로서 불가(佛家)의 사상을 옹호하는 인상을 줄 법하기에 식자층이나 지도층으로부터의 지탄과 비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충암 선생은 자신보다 앞서 홍유손(洪裕孫)이란 선비도 이런 유(類)의 권선문(勸善文)을 지었다는 전제를 단 것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이는 충암 선생 자신이 홍유손이 지은 <존자암개구유인문>이란 글을 미리 얻어서 읽어보았을 것이란 예상도 해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홍유손(洪裕孫)은 연산군 4년(1498)에 생긴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그해 9월에 제주 정의현(㫌義縣)에 유배되어 8년간 생활을 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던 해(1506)에 해배(解配)가 되었다. 그런데 해배가 된 지 2년 후에 <존자암개구유인문>이란 글을 지은 것으로 돼 있어 그때까지 제주에 머물러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홍유손은 충암(冲庵) 선생보다 22년 앞서 제주에 유배를 온 셈이다. 그의 <존자암개구유인문>이란 글은 그의 문집 《소총유고(篠䕺遺稿)》에 실려 전한다. 그 글에서 홍유손이 주창하는 바의 큰 골격은 불가(佛家)의 독특한 사상인 인과(因果)의 논리로써 설파하고, 이를 화복(禍福)을 재는 저울로 삼아 백성들에게 공덕(功德)을 닦을 것을 강조한다.

곧 “선(善)을 닦으면 곧 복을 얻고 아울러 천당에서 태어나고, 악업(惡業)을 위하면 곧 화를 얻어 지옥에 들어간다.”는 논리로 일관하면서 공덕을 실천하는 일에 절[寺]을 세움이 제일이기에 이에 보시(布施)의 일을 권장하게 된다.

따라서 자신이 문장을 지어서 보시를 권함이란, 그것으로써 말미암아 선한 마음이 되게 함이지 남을 속여 꾀려 함이 결코 아님을 피력한다. 따라서 인과(因果) ‧ 화복(禍福)이니, 천당(天堂) ‧ 지옥(地獄)이니 하는 말들은 그만두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것임을 새삼 강조하게 된다.

그러면서 홍유손은 존자암이 위치한 곳의 지세(地勢)에 대한 풍수지리적 해석을 덧붙이며 길게 문장을 이어갈 뿐만 아니라 한라산(漢拏山) 예찬론을 천하 명문(名文)의 활달한 필체로 일괄한다.

이를테면, “한라산(漢拏山)만이 지닌 물외(物外)의 정갈하고 빼어난 정취가 저 곤륜산(崑崙山) 구렁[墟]과 판동(版胴)의 골짜기보다 더 빼어나고, 산의 감춰진 경계는 금강산보다도 훨씬 다 많고, 괴이하고 험준함은 그보다 몇 배나 더 된다.”라고 함이라든지, “한라산은 열어구(列禦寇)가 《열자(列子)》란 책에서 언급한 원교(圓嶠)의 산이요, 동방삭(東方朔)이 <만천기(曼倩記)>에서 언급한 영주(瀛洲)의 땅이라 지칭했던 곳이다.”라고 힘주어 설파함은 매우 이색적이다.

그러면서 예로부터 중국의 유명한 산수화 그림에서 불우(佛宇)가 빠짐이 없듯이 한라산이란 명산에 그 비보(裨補) 사찰인 존자암이란 절의 존재가 없을 수 없기에 그 개축의 당위성을 새삼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지닌 문장 짓는 재능의 빼어남이란 일찍부터 유명했는데, 평소 그의 동료였던 남효온(南孝溫)은 그의 <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서 이미 이렇게 갈파한 적이 있다.

“홍유손의 사람됨이란 이렇다. 문장(文章)은 칠원(漆園) 장자(莊子)와 같고, 시문(詩文)은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의 경계를 넘어섰으며, 재능(才能)은 제갈공명인 제갈량(諸葛亮)의 자질을 몸에 지녔고, 행동거지는 만천(曼倩) 동방삭(東方朔)을 닮았다.[(洪裕孫)爲人 文如漆園 詩涉山谷 才挾孔明 行如曼倩]”라고 할 정도이다.

 

5. 홍유손(洪裕孫)의 <존자암개구유인문(尊子庵開構侑因文)>의 내용을 충암(冲庵) 김정(金淨)의 글로 잘못 소개한 사례(事例)

 

제주 향토 사료와 관련된 글을 찾아 읽다 보면, 간혹 원저자의 착오로 말미암아 원전의 사료가 잘못 전해진 경우와 맞닥뜨리게 될 때가 있다. 특히 역서(譯書)에서 그대로 원용될 때는 적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존자암(尊者庵)과 관련된 기록을 전하는 두 권의 책, 곧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과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南宦博物)》에서 그런 사례가 보인다.

우선 《남사록》의 경우, ‘충암(冲庵)의 <존자암중수기(尊者庵重修記)>’라고 소개하고 있는 게 그렇다. 그 글의 내용을 홍유손(洪裕孫)이 쓴 <존자암개구유인문(尊子庵開構侑因文)>의 글과 대조해보면 똑같이 들어맞는다. 다만 본래 홍유손의 글에서 불가(佛家)적 요소의 내용은 전부 빼고서 자연의 형세나 풍수지리적 고찰 등의 내용만 포함시켜 소개하고 있는 게 그 한 특징이다.

그런데 《남사록》에 보면, 충암(冲庵)의 <도근천수정사중수권문(都近川水精寺重修勸文)의 소개는 극히 일부분에 한정되어 있고, 글의 제목도 ‘충암(冲庵)의 <수정사중수기(水精寺重修記)>’라고만 달고 있어서 온전하지 않다. 이로 미루어보건대, 원저자인 청음 선생이 두 저작물을 순간적으로 착각하여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게 아닌가 하고 짐작할 뿐이다.

다음은 《남환박물》의 경우 <지지(誌地)>편에서다. 한라산을 두고서 표현한 내용을 <풍토록(風土錄)>이라고 언급했는가 하면, 영실과 존자암을 언급하는 대목의 글에선 <충암기(冲庵記)>라고 잘못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인즉슨 둘 다 모두 홍유손이 쓴 <존자암개구유인문(尊子庵開構侑因文)>의 글이 맞는데, 이를 두고서 홍유손의 저작임을 언급하지 않고 달리 표현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원저자인 이형상(李衡祥) 목사가 참고한 사료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남사록(南槎錄)》이었기에 벌어진 착오인 듯하다.

《남사록》이나 《남환박물》이 제주 향토 사료로서 지닌 소중한 가치를 생각하면, 위에서 지적한 기록의 착오란 극히 미미한 부분으로서 호수 위의 미세한 티끌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다만 어째서 그런 착오가 생기게 된 사연인지에 대해선 흥미롭게 이를 정밀 추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기획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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