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6)-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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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6)-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0.31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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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증주벽립(曾朱壁立)’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증주벽립(曾朱壁立)’

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

 

【절문(切問)】

○ 제주 오현단 경내의 돌에 새겨진 ‘曾朱壁立(증주벽립)’이란 석각명(石刻銘)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선생이 제주 적거시(謫居時)에 남긴 글이 맞는가?

○ 김창업(金昌業)이 그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초상화에 쓰인 찬문(贊文)의 글에서 ‘칠푼의 모습[七分之貌]’이란 무슨 뜻인가?

○ 서인(西人)의 영수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과 당시 대척점(對蹠點)에 섰던 조선의 대표적 인물은 누구인가?

○ 인조 때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씻고자 추진한 북벌론(北伐論)에 대해 효종(孝宗)이 적극적이었던 반면 우암(尤庵)이 소극적이었던 까닭은?

○ 숙종(肅宗)은 어째서 국가 대로(大老)인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 선생을 제주도(濟州島)로 유배 보냈고, 그 후명(後命, 임금이 내린 사약)을 유배지가 아닌 전라도 정읍(井邑)에서 받게 했는가?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대표적 유적지를 소개한다면?

(1) 괴산 청천 - 묘소(墓所) 및 신도비각(神道碑閣)

(2) 대전광역시 - 우암사적공원 남간정사(南澗精舍), 이직당(以直堂)

(3) 괴산(충북) - 화양계곡 내 화양서원(華陽書院)과 만동묘(萬東廟)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어떤 인물인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년~1689년) 선생은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李珥)의 학풍을 계승한 노론의 영수이자 조선 중기의 대표적 유학자다. 또 후에 효종이 된 봉림대군의 스승이었고,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정의 핵심 인사가 되어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우암의 학문과 사상은 크게 주자학(朱子學)과 춘추대의(春秋大義)로 표현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우암이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평생 변치 않고 지켜 온 것이다. 우암은 김장생(金長生)과 김집(金集) 부자로부터 주자학을 전수하였고 김상헌으로부터는 춘추대의를 배웠다.

그가 제주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불리게 된 때가 숙종 21년(1695)으로서 당시 귤림서원에 향사해오던 충암(冲庵) 김정(金淨) ‧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동계(桐溪) 정온(鄭蘊) 등 사현(四賢)에 이어 이 대열에 가장 늦게 합류해 추향(追享)을 받게 된다. 제주에서의 귀양살이란 불과 100여 일 남짓이었으나, 이 지방 유림 인사에게 끼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시집간 딸에게 가정을 다스려 나가는데 경계할 점을 <계녀서(誡女書)>란 책으로 엮어 전해주기도 했는데, 그 책이 우리나라 전통의 미풍양속을 전승하는데 값진 구실을 하는 것으로서 유명하다.

그의 사후 5년 만인 숙종 20년(1694)에 조정에서는 그의 관직을 복구하고 문정(文正)이란 시호를 내리고, 정조(正祖)는 왕명으로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 102책이란 방대한 저술을 간행케 한다.

그에게 ‘송자(宋子)’라는 칭호를 붙임은 공자(孔子) ‧ 맹자(孟子) ‧ 주자(朱子) 등 역대 성현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인정받았음을 뜻한다.

그리고 고종(高宗) 23년(1886) 11월에, 우암은 종묘(宗廟)의 효종묘정(孝宗廟庭)에 공신(功臣)으로 추배(追配) 되기에 이른다.

우암이 있는 곳에 학문이 있었고, 춘추대의(春秋大義)가 있었으며, 이 시대 사상적 논쟁의 진원지가 마련되기도 했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무려 3,000번이나 거명(擧名)될 정도로 대단한 활약상을 내보인 조선시대의 출중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肖像畵) - 칠분지모(七分之貌)

김창업(金昌業)이 그린 우암(尤庵) 송시열의 초상화(肖像畵)

 

<참고자료> 우암 송시열의 화제(畫題) 2편

(1) 김창업(金昌業)의 <우재선생화상찬(尤齋先生畫像贊)>

【원문(原文)】

以豪傑英雄之資 有戰兢臨履之功 斂浩氣於環堵之窄 可以塞宇宙 任至重於一身之小 可以抗華嵩 進而置之巖廊 爲帝王師而不見其泰 退而處乎丘壑 與麋鹿友而不見其窮 巖巖乎砥柱之峙洪河 凜凜乎寒松之挺大冬 苟億世之下 觀乎此七分之貌 尙識其爲三百年間氣之所鍾

【해석(解釋)】

영웅호걸의 자질을 지니고서 깊은 못에 임하듯 얇은 얼음을 밟듯 전전긍긍 근신하는 공을 닦았다. 좁은 방 안에 모은 호연지기는 우주를 채울 만하고 작은 한 몸에 짊어진 막중한 짐은 화산(華山)과 숭산(嵩山)에 비길 만하였다.

조정에서 불러들여 묘당(廟堂)에 두고 제왕의 스승으로 삼았으나 거만한 기운을 찾아볼 수 없고, 물러나 초야에 처했을 때는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였으나 궁색한 기색을 볼 수 없었다. 하수(河水)의 격류에 우뚝 선 지주(砥柱)처럼 당당하고 엄동설한에 홀로 푸른 소나무처럼 늠름하였다. 행여 억만대 이후에 이 화상을 살펴본다면 조선 삼백 년간의 정기가 한 몸에 모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의 <우암 선생(尤庵先生)의 화상(畫像)에 찬함>

【원문(原文)】

嶷嶷山嶽之氣像 恢恢河海之心胸 允矣集群儒之大成 蔚然爲百代之師宗 以一言而闢聖路於將堙 以隻手而擎天柱於旣倒 深闈密贊 吾不知其何謨 燕居長歎 吾不知其何抱 吁嗟乎 道之大而莫能容兮 吾將捨考亭而其誰從

【해석(解釋)】

<우암 선생(尤菴先生)의 화상(畫像)에 찬함>

산악같이 높은 기상이요, 하해(河海)같이 넓은 심흉(心胸)이로다. 진실로 뭇 유현(儒賢)을 집대성(集大成)하여 성대히 백 대의 종사(宗師)가 되시어 말 한마디로 막혀가는 성로(聖路)를 열어 놓았고, 한쪽 손으로 넘어진 천주(天柱)를 붙들어 놓았네.

깊은 궁궐서 비밀히 찬조한 것은 무슨 계책이었는지 나는 모르겠고, 평상시에 길이 탄식한 것은 무슨 회포였는지 나는 모르겠다. 아! 도가 커서 용납할 수 없어라. 내가 주자(朱子)를 버리고 누구를 따르리요.

<참고자료> ※ 《제민일보》 ‘아침을 열며’ 칼럼용 원고(2022. 11. 07)

칠푼의 모습[七分之貌]

현행복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제주 오현(五賢)의 유적과 관련된 글을 쓰기 위해 몇몇 자료를 찾던 중 우연히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초상화(肖像畵)와 마주하게 되었다. 그 그림 속 화제로는 권상하(權尙夏)와 김창협(金昌協)이 지은 두 편의 찬문이 함께 실려있고, 그림을 그린 화사는 김창업(金昌業)이다. 찬문(贊文)을 지은 두 사람은 우암의 문인들이고 화사 김창업은 화제(畫題)를 단 김창협의 동생이기도 하다. 기존 우암의 초상화들과는 달리 칠십 대 후반 노학자의 달관한 면모가 잘 드러나면서 우암의 인간적 모습이 비교적 잘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김창협이 지은 찬문의 글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보니 그 글 속에 ‘칠분지모(七分之貌)’라고 한 대목이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이를 곧이곧대로 풀면 ‘칠푼의 모습’이란 뜻이다. 대개 임금의 초상을 두고 어진(御眞)이라고 하고, 공신들 초상의 경우 진영(眞影)이나 진상(眞像)이란 말이 주로 쓰임에 비추어 ‘칠분지모’라 함은 다소 생소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칠분지모’란 표현이 초상화를 상징하는 말로 쓰인 건 어떤 바탕에서 말미암은 일일까.

이에 대한 궁금증은 율곡 이이 선생이 남긴 어록을 통해 풀릴 듯하다.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의 <어록(語錄)>편에 보면, ‘칠분지모(七分之貌)’에 대한 제자들의 물음에 선생이 답한 내용이 실려있다. 특별히 중국 송나라 때의 학자 정이천(程伊川)과 주희(朱熹)의 사례를 들면서 그 유래를 설명함은 매우 인상적이다.

정이천은 《역전(易傳)》을 짓고 난 뒤 문인들에게 “이것은 단지 칠분(七分)의 글이다.”라고 했다. 십분(十分) 안에서, 말한 게 칠분(七分)뿐이라면 나머지 삼분은 각자 스스로 알아서 터득한다는 의미이다. 그의 사후에 제자인 장역이 쓴 제문의 글도 인용했는데, “선생의 말씀이, 문자로는 ‘칠분의 마음’만 드러내고, 단청(丹靑)으로는 ‘칠분의 용모’만 드러낸다.”라고 했다.

한편 주희는 제자 정정사(程正思)가 죽자 그의 유상(遺像)에 찬(贊)을 달면서 “아! 이것도 오히려 ‘칠푼의 모습[七分之貌]’이 되기엔 아직 충분하진 못해도, 후인들이 우선 이것으로나마 잠시 그의 풍모를 상상해낼 수는 있으리라.”라고 했다.

한 인물을 그려냄에 있어 그 대상을 얼마나 실제와 닮게 그리느냐 하는 문제는 화가들의 처지에서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의 경우, 그 일을 맡은 화사들의 고충이란 엄청나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실제로 <세종실록>에 실린 한 기사를 보면, 태종이 자신의 초상을 그리도록 명하면서 “만일 한 올의 가는 털이라도 똑같지 않으면, 내 진짜 모습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끌게 한다.

한편 중국 진나라 때의 저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는 초상화를 그리면서 몇 년 동안 눈동자를 찍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그림 속에 정신을 전해서 살아나게 하는 것이 바로 눈동자 속에 있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래한 ‘전신사조(傳神寫照)’란 말은, 결국 그림 속에 내면의 정신까지 담아 표현해낸다는 뜻으로 널리 회자 되면서 초상화 화법의 전범처럼 인식하기에 이른다.

그러고 보면 우암 송시열의 초상화에 ‘칠푼의 모습[七分之貌]’이란 표현을 쓴 이면엔, 그 그림 속에 우암이란 인물의 고매한 인격과 내면세계를 표출해냄이 ‘칠푼의 완성도’를 내보일 정도면 더할 나위 없이 극진한 것으로 간주해 그렇게 표현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새삼 해보게 된다.

<참고> 정정사 화상 찬[程正思畵像贊] 주희(朱熹)

 

(1) <정정사(程正思) 군의 화상(畫像)에 주희(朱熹)가 찬(贊)을 짓는다.>

아, 정사여[鳴呼正思] / 옷도 이기지 못할 듯한 몸으로 오확(烏獲)이 짐을 지듯이 하였고[退然如不勝衣 而自勝有以擧烏獲之任] / 입에서 나오지 못할 듯한 말로 도(道)를 보위함은 곤연(髡衍)의 칼날도 꺾을 듯이 하였네.[言若不出諸口 而衛道有以摧髡衍之鋒] / 매일 부지런히 힘쓰면서[俛焉日有孶孶者] / 한 번도 중지한 적을 보지 못했네[吾方未見其止] / 하루아침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乃一朝而至此] / 하늘은 어찌하여 수명을 더 주어 완성하게 하지 않았는가[則天曷爲而不假之壽 以成其終] / 아, 이 유상은 칠푼의 모습도 보기에 부족하지만[鳴呼 此猶未足以見其七分之貌] / 후인들이 또한 우선 이것을 통하여 유풍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來者亦姑以是而想象其遺風] / 소희(紹熙) 임자년(1192) 9월 7일 쓰다.[紹熙壬子重陽前二日書]

(2) <율곡선생(栗谷先生) 어록(語錄)> 중 문답

【원문(原文)】

問七分之貌

曰 程子作易傳曰 此乃七分之書 謂十分內所說只七分 其餘三分 則在人自得云爾 門人張繹祭之曰 先生有言 見于文字者有七分之心 繪于丹靑者有七分之儀 此蓋用其語 此謂七分之貌者 謂程正思體貌柔弱 而中之所存至剛 故曰未足以見其七分之貌。

【해석(解釋)】

문 ‘칠분(七分)의 모습’이란 것은 어떤 것입니까?

답 정자(程子)가 《역전(易傳)》을 짓고 말하기를, “이것은 칠분의 글이다.”라고 하였다. 10분 내에서 말한 것은 7분뿐이니 그 나머지 3분은 각 사람이 스스로 깨달아 얻으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문인(門人) 장역(張繹)이 제문(祭文)을 지어 말하기를, “선생의 말씀이 문자에 나타난 것은 7분의 마음이 있고, 단청(丹靑)에 그린 것은 7분의 의용(儀容)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정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여기서 7분의 모습이라고 한 것은 정자의 체모(體貌)가 유약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것은 지극히 강하였기 때문에 그 마음 모습의 7분도 나타내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2.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석각명(石刻銘) ‘曾朱壁立(증주벽립)’

제주 오현단 경내에 들어서면 바위에 새겨진 대자(大字)의 해서체(楷書體) 글씨로 된 ‘曾朱壁立(증주벽립)’이란 네 글자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남긴 글로서,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증자(曾子)와 주자(朱子)처럼 지조(志操)를 지켜 나가겠다.”는 말이다. 결국 결기에 찬, 스스로의 다짐인 셈이다.

오현단 경내의 암각명 ‘曾朱壁立(증주벽립)’

 

그런데 위의 ‘증주벽립(曾朱壁立)’이란 석각명(石刻銘)이 우암이 제주에 유배와 쓴 글이 아님은 석각명 좌측의 다른 돌에 새겨진 작은 글씨체로 된 부분을 유심히 읽어보면 금세 확인된다.

‘증주벽립(曾朱壁立)’ 모각(摹刻) - 부분 확대

 

곧 ‘후학(後學) 채동건(蔡東健), 후학(後學) 홍경섭(洪敬燮) 숭정사병진(崇禎四丙辰) 모각(摹刻)’이라고 씌어 있다. 채동건은 제주 목사를, 홍경섭은 제주 판관을 역임한 관료들이다. 그리고 ‘숭정사병진(崇禎四丙辰)’이란 숭정(崇禎) 연호를 쓰기 시작한 후 네 번째 맞는 병진(丙辰)년이란 뜻이기에, 조선조 철종(哲宗) 7년(1856)에 해당한다. 아울러 ‘모각(摹刻)’이란 ‘본떠서 새김’의 뜻이다.

곧, “후학(後學)인 제주 목사 채동건(蔡東健)과 제주 판관 홍경섭(洪敬燮)이 우암 선생의 글씨를 본떠서 철종 7년 병진(丙辰, 1856)년에 돌에다 새깁니다.”란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본래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새긴 ‘曾朱壁立(증주벽립)’이란 석각명은 서울 종로구에 있는 ‘우암 송시열 집터[尤庵舊基](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57호)’의 암벽에 새겨져 있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 글씨의 탁본을 정조 10년(1786에 제주 출신 변성우(邉聖遇)가 성균관 직강으로 있을 때, 이것을 탁본하여 떠서 제주로 가져왔다고 한다.

이 글씨를 탁본하여 현재 오현단 경내에도 똑같은 크기의 석각명이 새겨져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뒤 제주목사 채동건과 제주판관 홍경섭이 이 탁본을 사용해서 오현단 경내의 돌에다 본뜬 글자를 다시 새겨놓게 된 것이다.

서울 명륜동 우암 송시열 집터 암벽에 새겨진 ‘曾朱壁立(증주벽립)’

 

그런데 두 글씨체를 자세히 비교해 보면, ‘曾(증)’이란 글자 ‘曰(왈)’ 부분의 자형과 ‘주(朱)’란 글자의 삐침 자형이 서로 다름이 확인된다. 아마도 세월의 흐름에 글씨가 마모되거나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귤림서원에 배향된 것은 제주를 떠난 6년 뒤인 숙종 21년(1695)이다.

오현단 경내에는 또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尤庵宋先生謫廬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김석익(金錫翼)의 《심재집(心齋集)》에 보면, “그의 적거지는 제주성 산저동의 김환심(金煥心)의 집이었다.”라고 밝히고 있기에 이 비석 또한 본래 그곳에 있었던 것인데, 뒷날 이곳 오현단 경내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 신묘(辛卯, 1771)년에 유배인 전 자의(諮議) 권진응(權震應)이 해배가 되자 우암의 유허지를 방문해서 제주의 사림(士林)들에게 비를 세울 것을 건의했고, 지암(止庵) 김양행(金亮行)이 이에 대한 기문(記文)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오현단)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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