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7)-우암(尤庵)이 남인(南人) 측과 벌인 예송논쟁(禮訟論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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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7)-우암(尤庵)이 남인(南人) 측과 벌인 예송논쟁(禮訟論爭)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01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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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증주벽립(曾朱壁立)’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3. 제주도(濟州島) 유배길, 보길도(甫吉島)의 ‘송시열 암각시문’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한 보길도란 섬에 가면, ‘우암 송시열 글씐바위’(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 백도리 산 1-1)란 게 있다. 바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제주로 유배를 떠나면서 자신의 심회를 암각 시문으로 남겨놓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보길도란 섬은 당시 남인의 거두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세연정(洗然亭)을 짓고서 머물던 상징적인 곳이기도 하다. 우암이 83세의 나이로 인생을 마감하는 그 해에 유배지인 제주로 향했는데, 이 시가 그 길목에서 지어졌음이 특이하다.

여기에 덧붙여 후학 임관주의 시문도 그 옆에 암각되어 그것을 통해서 읽을 수 있는 우암에 대한 인물평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보길도 현지의 안내 글에는, “우암을 태운 배가 백도 부근을 지나던 중 풍랑을 만나 며칠간 머물러 있으면서 우암이 이 시를 지어 자신의 심경을 읊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우암 자신의 심경을 밝힌 이 시문의 창작 장소가 제주로 향하기 전 잠시 머물렀던 강진의 백련사(白蓮寺)란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이는 우암의 종손인 운곡(雲谷) 송강석(宋康錫)의 행장(行狀)과 그의 묘갈명(墓碣銘)을 통해서 잘 드러나기도 한다.

숙종 14년(1688) 10월에, 희빈 장씨가 뒤에 경종(景宗)이 된 왕자를 출산하게 되자, 임금은 서인(西人)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듬해 정월에 원자(元子)로 정호(定號)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에 고(告)하게 된다. 서인의 영수격인 우암은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그해 3월에 제주도로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결국 우암은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던 그해 6월에, 국문(鞫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던 중 정읍(井邑)에서 후명(後命)을 받고 향년 83세로 세상을 하직한다.

보길도의 ‘우암 송시열 암각시문’

 

우암(尤庵)의 오언율시

 

八十三歲翁(팔십삼세옹) / 여든셋이나 난 늙은이가

蒼波萬里中(창파만리중) / 푸른 바다 건너 먼 길을 떠나네.

一言胡大罪(일언호대죄) / 한 마디 말쯤이야 어찌 큰 죄가 되랴만

三黜亦云窮(삼출역운궁) / 세 번씩 쫓겨남 또한 궁색하다 이르리.

北極空瞻日(북극공첨일) / 북녘 하늘 괜스레 솟은 해 바라보고

南溟但信風(남명단신풍) / 남녘 바다 오로지 순풍에 돛 달 테지.

貂裘舊恩在(초구구은재) / 담비 갖옷 내려주신 옛 성은(聖恩) 잊지 못해

感激泣孤衷(감격읍고충) / 외로운 충정(衷情), 감격에 겨워 흐느끼네.

 

한편 암각 시문 바로 옆에서 또 한 수의 시가 새겨져 있음을 찾아냈다. 바로 임관주(任觀周, 1732~?)의 시로서 우암의 시를 차운(*평성 ‘東’운) 하여 남긴 오언율시다.

암각 시문으로 우암의 시 외에 또 다른 한 편의 시가 있다는 정보는 이곳 어느 곳에도 없다. 그러고 보면 작자인 임관주가 우암의 시문이 보길도란 섬의 바위에 암각(岩刻)된 걸 보고서 자신이 제주로 유배를 떠나던 정해(丁亥, 1767)년 가을에 차운시를 옆에다 추가로 새겨놓은 것이란 추정이 들게 한다.

 

임관주(任觀周)의 차운시

 

東國有尤翁(동국유우옹) / 우리나라에 우암(尤庵)이란 어른 계셔

題詩白島中(제시백도중) / 백도(白島)에 머물던 중 시 한 수 지었네.

斯文從古厄(사문종고액) / 유가(儒家)의 글, 예로부터 액운 따르는 법

大老遭時窮(대로조시궁) / 나라의 원로, 매우 어려운 시절 만났네.

留墨春秋筆(유묵춘추필) / 춘추필법(春秋筆法)의 글, 먹글씨로 남아

泣貂漢海風(읍초한해풍) / 큰 바닷바람, 담비 옷 눈물 적셨네.

孤臣無限感(고신무한감) / 외로운 신하, 한없는 감회에 젖음이

天日照丹衷(천일조단충) / 하늘의 해가 붉은 마음을 비추네.

丁亥秋七月後學(정해추칠월후학) 任觀周謫瀛洲登(임관주적영주등)

정해(丁亥, 1767)년 가을 칠월, 후학 임관주(任觀周)가 유배지 영주(瀛洲)로 오르며 지음.

보길도의 우암이 남긴 암각자를 확인하는 필자

 

 

4. 우암(尤庵)이 남인(南人) 측과 벌인 예송논쟁(禮訟論爭)

조선의 제17대 임금인 효종(孝宗)이 승하하자, 인조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 1624~1688)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른바 예송논쟁(禮訟論爭)이란 게 그것이다.

이에 대해 송시열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중심으로 한 서인(西人) 측은 1년간의 기년상(朞年喪)을 주장했는데, 효종이 임금이긴 하나 인조(仁祖)의 차남이라는 ‘체이부정(體而不正)’의 논리를 내세웠다.

반면 남인(南人) 측을 대표하는 학자인 윤휴(尹鑴)와 윤선도(尹善道)는 효종이 차남이긴 하나 군왕(君王)이었으므로 사가(私家)와 달리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며 대치했다.

그런데 효종의 장남으로 왕위에 오른 현종(顯宗)은 우암이 속한 서인 편의 손을 들어줘 결국 남인이 몰락하게 되는 형국을 초래했다.

 이번에는 효종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1618~1674)가 승하(昇遐)했을 때 벌어진 일이다.

서인은 장씨가 둘째 며느리이므로 대공설(大功說, 9개월)을, 1차 논쟁에서 패한 남인은 둘째 며느리이긴 하나 중전(中殿)이었으니 기년설(朞年說, 1년)이 타당하다고 맞섰다. 왕심(王心)이 남인에게 쏠리며 결국 서인이 퇴출당하게 되는 형편으로 변했다.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손자인 제18대 현종(1659~1674)이 훙서(薨逝) 하자 이번엔 3차 논쟁이 일어났다. 이에 대한 명분 또한 1 · 2차 논쟁 때와 거의 유사하다.

조선의 제19대 새 임금 숙종(肅宗)은 우암의 논리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남인 측 주장을 수용해 우암을 제주로 유배 보낸다. 물론 그 유배의 직접적인 동기는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칭해 종묘에 고함에 대해 우암이 부당하다고 상소했기 때문이긴 하다.

제주도에서 귀양살이하던 우암이 친국(親鞫)을 받기 위해 상경하다가 도중에 정읍에서 후명(後命)을 받아 사사된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5. 우암의 묘소(墓所)와 신도비각(神道碑閣)

우암 송시열 선생의 묘소는 처음에 수원에 있었다가 충북 괴산으로 이장해 와서 매봉산(330m) 남쪽 230m 고지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위치(位置)했다.

매봉산 산 전체가 우암의 묘역이란 인상이 들 정도로 그 면적(600m×1.2km)이 광활하다. 묘소의 남쪽 경계면 가운데로 별도의 묘실 및 신도비의 비각이 지어져 있는데, 묘소는 비각으로부터 200미터 쯤 계단으로 올라간 거리인 고도 50미터 지경에 있다.

특히 비석 전면에 새겨진 글의 서두에 ‘有明朝鮮(유명조선)’이라 함이 인상적이다. 우암이 서거한 숙종 15년(1689)은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 시절이기에 ‘유청조선(有淸朝鮮)이라 함직 한데 ‘유명조선(有明朝鮮)’으로 표기되어 있어서다.

우암 송시열의 묘소를 찾아가 배례하는 필자

 

그리고 묘소의 아래로 내려와 남쪽 오른편으론 그의 후손들의 기와집 고택들이 이어져 있다. 아울러 그곳 남쪽으로 청천면 마을이 들어서 있고 구룡천이 흐른다. 한편 후손들의 고택은 19세기에 들면서 우암의 8대손인 송병일이 충청 감사 때 지어 종택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충북 양로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의 신도비각(神道碑閣)

 

우암의 신도비(神道碑)는 정조(正祖) 임금이 내리셨다. 그런데 신도비각의 구조가 팔작지붕에 창살 형태로 감싸져 있는 울타리형 구조로 되어있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서 밖에서만 그 내용을 확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신도비각 옆으로 수령 370여 년 된 은행나무(보호수 ‧ 괴산 제 55호)가 있어 이곳 주변 땅의 기운을 대변하는 듯하다.

참고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묘소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는 32km 정도로, 자동차로 약 45분가량 소요된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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