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8)-스승 우암(尤庵)과 제자 명재(明齋)가 벌인 ‘회니시비(懷尼是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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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8)-스승 우암(尤庵)과 제자 명재(明齋)가 벌인 ‘회니시비(懷尼是非)’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0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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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증주벽립(曾朱壁立)’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6. 스승 우암(尤庵)과 제자 명재(明齋)가 벌인 ‘회니시비(懷尼是非)’

명재(明齋) 윤증(尹拯) 초상화(일본 천리대 소장본<br>
명재(明齋) 윤증(尹拯) 초상화(일본 천리대 소장본)

 

조선 후기 ‘회니(懷尼)’란 말은 송시열(宋時烈)의 고향인 회덕(懷德)의 ‘회(懷)’와 윤증(尹拯)의 집이 있던 논산 노성면의 옛 이름인 니산(尼山)의 ‘니(尼)’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신조어(新造語)이다.

그래서 ‘회니시비(懷尼是非)’라 함은 결국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명재(明齋) 윤증(尹拯)이 다투면서 벌인 논쟁을 상징하는 말로서 서인(西人)이 급기야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되는 동인(動因)으로 작용한다.

윤휴(尹鑴)의 글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인가의 여부에 대해 두 차례나 우암과 논쟁을 벌인 바 있는 윤증(尹拯)의 부친 윤선거(尹宣擧)가 현종 10년(1669)에 향년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그로부터 4년이 지난 뒤 명재는 우암에게 부친의 묘비명을 지어주기를 요청했다.

이를 수락한 우암이 약 반년이 지난 뒤에 지어준 비문을 보고 아들인 윤증이 크게 실망했다. 그 내용이 자신이 기대한 바와는 달리 크게 부실했을 뿐만 아니라 부친의 생애를 조롱하고 비판적인 내용이 있는 표현이 담겨 있어서였다.

이에 명재의 몇 번의 수정 요청에도 우암은 고치지 않고 그대로 고수하자 사제지간(師弟之間)이었던 두 사람의 관계가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면서 급기야 당시 집권 세력이던 서인(西人)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서게 된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조선 사회의 통념상 ‘배사(背師)’라는 말은 그 혐의 자체만으로도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는데 노론 측은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러나 윤증의 처지에서 볼 양이면 송시열은 스승이지만 윤선거는 아버지였고, 한편 스승이기도 했다. 결국 이 시비론(是非論)에 대한 최종 판단은 임금이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숙종은 송시열과 윤증 중 누가 옳은가가 기준이 아니라, 누가 더 힘이 되는가 하는 관점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송시열의 편을 들어주는 소위 ‘병신처분(丙申處分)’을 내리게 되었고, 그와 함께 노론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우암이 서거한 지 28년이 지나고, 명재가 서거한 지 3년이 지난 뒤의 일이다.

 

7. 백호(白湖) 윤휴(尹鑴)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서인의 거두 송시열이 북벌이라는 명분만 따르고 실제로 추진할 의사가 없었던 데 비해, 윤휴(尹鑴, 1617~1680)는 유학뿐만 아니라 천문과 지리, 병법에도 통달해 일관되고 구체적으로 북벌을 추진했다.”

역사소설가 이덕일이 그의 저서 《윤휴와 침묵의 제국》에서 밝힌 내용이다.

명(明) ‧ 청(淸) 교체기인 17세기 후반,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양대 외세와의 큰 전쟁을 겪은 뒤라 그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백성의 삶은 피폐해지고, 자연스레 민심의 이반은 크게 요동치곤 했다.

이를 타개해 나가기 위한 자구책으로, 조정에서는 국민 통합의 명분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씻어낼 북벌론(北伐論)을 강력하게 표방해 추진해나갔는가 하면, 서인(西人) ‧ 남인(南人)으로 갈린 사대부층에서는 주자학(朱子學)을 바탕으로 한 예론(禮論)이 활발하게 주류를 이뤄 논쟁으로 이어지곤 했다.

당시 서인의 영수(領袖) 격인 우암 송시열과 대척점(對蹠點)에 섰던 윤휴는 지패법, 호포법 등 신분제를 뒤흔드는 개혁안도 만들었지만, 《중용주해(中庸註解)》를 지어 주자와 다른 논지를 폈다고 해 서인으로 대표되는 기득권 세력에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내몰리게 된다

역모(逆謀)에 가담했거나,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킬 만한 큰 죄를 지은 것도 아님에도 송시열은 “적휴(賊鑴)가 성인인 주희(朱熹)를 모욕했다.”고 비난하거나, 대비의 국정 간여가 일어나지 않도록 임금께서 조관(照管)해야 한다는 등의 주장에 불경죄(不敬罪)로 국문을 받고서 사사된 것이다.

윤휴가 죽기 직전 남긴 말이 이렇다.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죽일 것은 무엇 있는가!”

백호 윤휴의 초상화(부분도)

 

8.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은 조선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그는 달리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의 찬자(撰者)로도 유명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380여 년 전인 인조 15년(1637), 병자호란 패전의 표시로 현재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에 세운 항복 문구가 담긴 기념비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조선의 사대부 중 이 비문을 짓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에 발탁된 인물이 바로 이경석이었다. 당시 인조(仁祖)의 간곡한 요청은 이랬다.

“지금 나라의 존망이 이것에 달려 있다. 춘추시대 월(越)나라 임금 구천(句踐)이 오(吳)나라의 신하 노릇을 했지만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킨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훗날 나라가 일어서는 것은 오직 비문으로 저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사세가 더욱 격화되도록 하지 않도록 하는 것 뿐이다.”

이에 이경석은 자신이 평소 반청(反淸) 인사였음에도, 청(淸) 태종을 극구 찬양하는 구절을 어쩔 수 없이 삽입해 넣어 청나라 측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했던 것이다.

이때 이경석은 형 이경직에게 편지를 보내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고 했는가 하면, “수치스런 마음을 등에 업고 백 길이나 되는 강물에 몸을 던지고 싶소.”라는 시를 지어 한탄하기도 했다.

한편 이경석은, 대신들이 척화신(斥和臣)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 등을 공격하고 평소에 척화신들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인조가 이에 호응할 때도 김상헌과 정온을 적극 두둔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비록 현실에 입각해 주화(主和)를 따르고 왕을 위해 삼전도비문까지 지어 올렸으나 이경석의 가슴속에는 나라를 자주적으로 지키지 못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겪은 비운의 왕 인조가 재위 27년(1649)만에 승하하자 이경석은 원상(院相, *왕이 죽은 뒤 졸곡 때까지 어린 임금을 보좌하며 정무를 맡아 보는 임시 벼슬)이 되었으며, 효종이 등극한 뒤에는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효종을 도와 북벌운동을 벌이던 중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김자점(金自點)이란 자가 청나라에 고자질했기에 조선이 성곽을 보수하거나 신축하는 일련의 일들이 강화조약에 위배된다는 등의 일로 트집을 잡고서 심지어 왜와 내통한다는 의심까지 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조정으로서는 매우 난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영상인 이경석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홀로 기획한 일이라고 털어놓아 결국 청나라에 붙잡혀가 가까스로 사형을 면하고 예조판서 조경(趙絅)과 함께 의주에 있는 백마산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처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듬해 영불서용(永不敍用, * 죄를 지어서 파면된 벼슬아치를 영구히 재임용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효종에 이어 등극한 현종 또한 이경석을 믿고 의지했으나, 은퇴를 청하는 상소를 여러 번 올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현종 9년(1668)에 백헌 이경석은 인신(人臣)의 최고 영예인 궤장(几杖)을 하사받았고, 아울러 궤장연(几杖宴)에서 여러 인사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았다.

실제로 그때의 정경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실린 그림첩으로 전해지고 있다. 임금이 내리는 궤장을 맞아들이는 장면인 ‘지영궤장도(祗迎几杖圖)’와 임금이 내린 교서를 낭독하는 장면인 ‘선독교서도(宣讀敎書圖)’(*<그림 (9)> 참조), 그리고 궁중에서 보낸 악사와 무희들이 연주하고 춤추는 장면인 ‘내외선온도(內外宣醞圖)’가 그것이다.

<그림 (9)> 이경석의 사궤장 연회도(보물 제 930호) 정경

 

한편 이날 축하연의 자리에 우암 송시열이 쓴 축문(祝文)도 있었는데, 그 글의 문구 중에 ‘오래 살고 강녕하여[壽而康]’라는 말로 이경석을 송나라의 손적(孫覿)이란 인물에 빗대어 비난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왜냐하면 손적이란 인물은 송나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금의 비위를 맞추는 글을 써준 대가로 ‘오랫동안 편안하게 살았다’라고 주희(朱熹)가 비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훗날 이경석의 신도비(神道碑) 비문, 곧 <영의정 백헌(白軒) 이공(李公) 신도비명>을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이 지었다. 서계가 작고(作故)하기 한 해 전인 1702년에 쓴 글로 그 비문의 마지막 부분의 명(銘)에 이런 표현이 들어있다.

“… 함부로 거짓말을 하고 멋대로 속이는 것은[恣僞肆誕] / 어느 세상에나 이름난 사람이 있는 법[世有聞人] / 올빼미는 봉황과 성질이 판이한 지라[梟鳳殊性] / 성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네.[載怒載嗔] ….”

송시열을 두고선 ‘올빼미[梟]’로, 이경석은 ‘봉황[鳳]’으로 은근히 빗대어 표현하면서, 한편으로는 송시열을 불선자(不善者)라고 비난한 셈이다.

남인 계통인 서계 박세당이 쓴 저술인 《사변록(思辨錄)》을 두고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이 ‘사문난적(斯文亂賊)’의 표적으로 삼아 공격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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