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1)..영화 '남한산성'의 그 김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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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1)..영화 '남한산성'의 그 김상헌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12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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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한편 송정규(宋廷奎)의 《해외문견록(海外聞見錄)》에 보면, 이 사건을 비교적 잘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참고> 송정규(宋廷奎)의 《해외문견록》에 소개된 ‘길운절(吉雲節) 사건’

【원문(原文)】

○ 吉雲節

吉雲節 本善山 校生也 狀貌魁梧 自以有奇相 當爲人君 常懷異圖 與益山庶孼蘇德裕 海南僧惠修等 結黨入濟州 潛誘土豪別監文忠基 洪敬源等十餘人 又結營軍官崔弘 儉都訓導姜應賢等 聚謀於冲菴廟 欲乘陸來載馬船多集之日 會兵馬躓川 馳入城中 殺牧使以下守令 因據一島 治兵北渡 刻日擧事 而德裕以三邑軍卒疲弱 雖得之無益 雲節 亦恐事成之後 權歸忠基等 先自首告 時萬曆辛丑六月初四日也 牧使成允文收捕德裕忠基等二十輩 械送京城 咸施典刑 雲節亦以首謀幷誅 餘赦不問 遣御史金尙憲宣布德音 以安反側 或云 雲節卽汝立謀主 所謂吉三峰者也 以其頭有鼎角類三峰 故以此爲號也 己丑之後 亡入濟州 復出死中求生之計 誑誘島民 有此告變 州之古老傳說如此 事或然也 趙敬南襍錄亦如此 又云德裕汝立之甥也 己丑安置濟州

【해석(解釋)】

길운절(吉雲節)은 본래 선산(善山) 출신의 교생(校生)이다. 생김새가 키가 크고 건장하여 절로 기인(奇人)에 맞먹는 풍채로 늘 마음에는 제왕이 되려는 이상한 의도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익산(益山) 출신의 서얼(庶孼) 소덕유(蘇德裕)와 해남(海南)의 승려 혜수(惠修) 등과 당(黨)을 결성하였고, 이들이 제주로 들어와서는 이곳 토호(土豪)들을 유혹하여 몰래 끌어들였다.

곧 별감(別監) 문충기(文忠基) · 홍경원(洪敬源) 등 10여 명과 결사를 맺었고, 또한 제주영(濟州營)의 군관(軍官) 최홍검(崔弘儉)과 우두머리 훈도(訓導) 강응현(姜應賢) 등을 취합(聚合)해서 충암(冲菴) 사당에서 모의(謀議)를 벌였다. 곧 육지에서 말을 싣기 위해 온 많은 배들이 운집하는 날에, 병사들을 마지천(馬躓川)에 모이게 해서 곧바로 치달려 성안으로 진격해 들어가서 목사(牧使) 이하 수령들을 살해하고 이로 말미암아 온 섬을 점거한다는 계책이었다.

그리고선 기일을 정해 병사를 거느리곤 북쪽으로 다시 바다를 건너가 거사(擧事)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덕유(德裕)가 3읍의 군졸들을 피폐(疲弊)시켜 나약하게 함이란, 비록 그런 결과가 얻어진다 한들 운절(雲節)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는 셈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일이 성공된 후에 권세(權勢)가 충기(忠基) 등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길운절은 자수(自首)를 해서 신고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새로 잡았다. 때는 만력(萬曆) 신축(辛丑, 1601)년 6월 초4일이었다.

목사 성윤문(成允文)은 덕유(德裕) · 충기(忠基) 등 20여 명의 무리를 체포해 수감하였다가, 형틀에 묶은 채로 서울로 압송했고, 일당 모두는 다 정해진 법률에 따라 형벌을 받게 했다. 운절(雲節) 또한 처음 모의(謀議)에 가담한 우두머리이면서 벌을 받게 함에 있어 고변자로서의 사면(赦免)의 여지가 있었지만, 불문에 부쳐져 처형되었다.

조정에서는 어사(御史) 김상헌(金尙憲)을 내려보내서 덕음(德音)을 선포토록 해 법도를 어겨 불안해하는 민심을 안심시키도록 했다. 혹은 운절(雲節)을 두고 일컫기를 곧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의 주동자인 소위 길삼봉(吉三峰)과 관련짓기도 한다.

길삼봉은 자신의 머리 부분에 세발 솥을 엎어놓은 듯한 뿔이 달려있기에 세 봉우리란 뜻의 ‘삼봉(三峰)’이라 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자신의 아호를 삼았던 것이다. 그는 기축(己丑, 1589)년 옥사(獄事) 이후 도망하여 제주로 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는데, ‘죽음 속에서도 삶을 구해내는 계책[死中求生之計]’이라 해서 도민(島民)을 속여 꾐으로 인해 이러한 고변(告變) 사건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주(州)의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전설이 이와 같은 일이거나 혹은 비슷하다. 조경남(趙慶男)의 《잡록(襍錄)》에 실린 이야기 또한 이와 같다. 게다가 덕유(德裕)는 여립(汝立)의 외조카인데, 기축(己丑, 1589)년에 제주에 안치(安置)되었다고 말해진다.

<그림 ()> 풍수가의 산터 보기 – 제주 유력자 집안 포섭 전략

 

역사적으로 선조 34년(1601), 제주에서 발생했던 이른바 ‘소덕유(蘇德裕) · 길운절(吉運節) 역모 사건(逆謀事件)’이라 불리는 이 일을, 송정규는 《해외문견록》에서 ‘길운절(吉運節)’ 한 사람만을 대표로 내세워 소개하고 있다.

그 주요한 내용이란 곧 길운절에 대한 인상착의, 익산(益山) 출신의 소덕유(蘇德裕)와 당을 꾸려 모의한 일, 제주의 별감(別監) 문충기(文忠基) 등 토호세력(土豪勢力)을 규합한 일, 길운절이 고변(告變)한 일, 제주목사 성윤문(成允文)의 역모 가담자 체포과정, 서울로 압송된 자들의 처형 실태, 안무어사 김상헌이 내도(來島)해서 덕음(德音)을 반포한 일 등의 순으로 소개함이다.

그런데 이 글의 후반에 소개한 내용 중에 관심을 끄는 대목이 있다. 바로 길운절(吉運節)을 두고서 소위 기축옥사(己丑獄死)로도 유명한 ‘정여립(鄭汝立) 사건’의 모주(謀主)인 길삼봉(吉三峰)과 동일한 인물로 소개하고 있음이다. 그러면서 조경남(趙慶男)의 《난중잡록(亂中雜錄)》과 현지 촌로(村老)들의 이야기를 참조했음을 아울러 밝히고 있다.

결국 송정규가 《해외문견록》을 통해서 바라본 제주에서의 ‘길운절 사건’이란, 바로 ‘정여립(鄭汝立)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주목하고 있음에 더욱 그 관심을 끌게 한다.

한편 이와 관련해 최근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이와는 다른 해석이 내려져 주목을 끌기도 한다. 곧 고성훈의 논문 <1601년 제주도 역모 사건의 추이와 성격>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밝히길, 이 사건의 근본적 요체란 길운절 · 소덕유로 대표되는 육지의 내도인(來島人)과 문충기(文忠基) · 홍경원(洪敬源) 등 제주 토호(土豪)의 연합세력이 공동으로 추진했던 거사 모의가 실패로 끝난 사건이란 점을 강조하고 있다.

곧 서로 다른 경력과 성향을 지닌 육지인과 제주인이 서로의 신뢰가 돈독하지 못했고, 이해관계가 달라서 결국 두 그룹의 화학적 결합을 이뤄내지 못했던 결과로 말미암아 결국 거사를 목전에 두고 길운절의 고변으로 와해되면서 봉기로 이어지지 못했다고 보는 시각이다.

더욱이 이 사건이 ‘정여립 사건’의 연장선상에 놓여있음을 새삼 강조하기 위해 길운절보다는 오히려 소덕유의 시각에서 주목하여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한 진상을 파악하려 듦이 돋보이기도 한다.

<그림 ()> 형틀에 묶인 채 문초(問招)를 받는 죄인(풍속화)

 

참고로 정여립(鄭汝立) 사건의 모주(謀主), 길삼봉(吉三峰)이란 인물은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한 죽음으로 내몰리게 한 결과를 낳았기에 더욱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제12권) <인사문(人事文)>편의 ‘길삼봉(吉三峰)’이란 항목에 소개된 내용이 이렇다.

“누가 기축(己丑, 1589)의 옥(獄)을 말하면서 ‘정여립(鄭汝立)의 일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정여립이 모사(謀事)한 게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당시 죄수(罪囚)들이 처음에 길삼봉(吉三峰)을 모주(謀主)라고 말했는데, 길삼봉이 최삼봉(崔三峰)으로 변함으로써 말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이르기를, ‘수우(守愚)의 집 뒤에 세 봉우리가 있어 삼봉(三峯)으로 공안(公案)을 조작했다.’라고 했으니, 이 사실은 백사(白沙)의 변론에 이미 상세히 드러나 있다.

그 뒤 13년인 때에 죽은 길회(吉誨)의 아들 절(節)이란 자가 제주(濟州)에 들어가서 백성들의 원망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다가 베임을 당했는데, 누가 말하기를, ‘절(節)의 머리에 삼각(三角)이 있었으니 이가 바로 기축년의 이른바 길삼봉이다.

그렇다면, 그 당시 죄수들이 말한 모두는 실지 그 인물이 있었고, 수우(守愚)의 억울함도 이로 인해 더욱 명백해졌다.’고 한다. 절(節)은 본래 선산(善山) 사람이고 야은(冶隱)의 후손이다. 그가 마침내 제주에 들어가서 반란을 도모했으니 그 발자취가 전라도(全羅道) 안에 출몰했음을 알 수 있다. 역사를 보는 자로서 상고해 볼 만한 일이라 하겠다.”

이 글을 통해서 보면 성호(星湖) 이익(李瀷) 역시 길운절(吉運節)이란 인물을 두고서 ‘정여립 사건’의 모주(謀主)로 알려진 길삼봉(吉三峰)과 동일인임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면서 아울러 최삼봉(崔三峰)이란 별명으로 내몰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의 죽음도 신원(伸寃)되었음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그런데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미수기언(眉叟記言)》 <세변(世變)>편 ‘최수우(崔守愚) 사적(事績)’의 글에서 밝히길,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은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미움을 사서 ‘삼봉(三峰)’으로 몰려 결국 옥사(獄死)당했다.”라고 주장하고 있기까지 하다.

그렇다면 길운절(吉運節)이란 인물이, 과연 ‘정여립 사건’의 모주(謀主)로 지칭되었던 길삼봉(吉三峰)과 진정 동일한 인물이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의금부(義禁府)에서 역모(逆謀) 사건 등 국가 반란을 도모할 정도의 중범죄에 해당하는 죄인들을 공초(供招)한 기록인 《선조(宣祖) 신축(辛丑) 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의 기록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이때의 공초 기록에 의하면, 길운절보다 먼저 제주에 들어온 소덕유가 제주 사람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길운절(吉運節)이란 인물을 두고 소개하면서 곧잘 정여립 역모 때의 전설적 인물 길삼봉(吉三峰)과 비유하곤 했던 기록이 눈에 띈다.

소위 길운절을 두고서 초능력자와 같은 의도적 신격화가 소덕유에 의해서 가공된 이야기로 만들어져 제주 사람들에게 주입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소덕유는 정여립 첩의 사촌지간에 해당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봐도, 그가 누구보다도 ‘정여립 사건’의 내막을 잘 알고 있는 처지에서 길삼봉(吉三峰)의 존재에 대해서 주지(周知)하고 있음이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런 처지에서 그가 한 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곧, 그것은 바로 길운절이란 인물이, 길삼봉에 비유되는 대상으로만 머물러 있었을 뿐이지, 그가 곧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 사건의 추국안(推鞫案)에는 ‘길운절이 곧 길삼봉이다’라고 단정할 만한 어떤 단서나 자백도 들어 있지 않다.

또한 사건 당시 소덕유는 68세의 노인이었던데 비해, 길운절은 32세의 비교적 건장한 청년이었다는 사실도 이런 생각에 한 번쯤 재고해 볼 법한 요인이라 하겠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보면, 수우(守愚) 최영경(崔永慶)이 정적(政敵)들에 의해서 ‘최삼봉(崔三峰)’이란 이름으로 내몰려 억울한 누명으로 옥사당했다면, 그 신원(伸寃)을 위해서라도 ‘길운절(吉運節)이 길삼봉(吉三峰)과 동일인이다’라고 주장함이 일부러 드러나게 한 일면도 없지 않다.

‘역사를 보는 자로서 상고해 볼만 하다’라고 주장한 성호 이익의 말이, 아이러니하게도 절실하게 곱씹어 보도록 하는 대목이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다음에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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