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2)-‘남사록(南槎錄)’이란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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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2)-‘남사록(南槎錄)’이란 무슨 뜻인가?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1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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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3.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남사록(南槎錄)》은 어떤 내용이 담긴 책인가?

제주에서 발생한 ‘소덕유(蘇德裕) ‧ 길운절(吉雲節) 사건’이 수습된 뒤 조정에서는 제주도를 반역향(叛逆鄕)으로 지목하고서 읍호(邑號)를 강등시키고자 했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소덕유나 길운절은 차치하고서라도 제주 출신 관료 문충기(文忠基) · 홍경원(洪敬源) 등이 능지처사(凌遲處死)에 처해지면서 제주 백성들은 깊은 상처를 받았고, 민심이 흉흉해진 건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조정에서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을 안무어사(按撫御史)로 제주에 파견시켰다. 이때 청음 선생의 나이가 32세였다.

청음 선생이 해남에서 배를 타고 제주로 들어오는 바닷길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본래 화북포구로 입항하려던 배가 바람과 파도에 밀려 애월항으로 간신히 접안(接岸)해서 제주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한 청음은 우선 임금의 말씀을 전하는 교서를 반포하였고, “(이번 사건의) 주도자의 협박에 못 이겨 반란에 가담했던 자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묻지 않겠다.”라고 선포하여 두려움에 떠는 백성들을 안심시켰다.

아울러 부역과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 민생을 안정시킬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러고 나서 청음은 한라산에 올라가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도내 각처를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돌아보며 그 형편을 관찰하였다.

이 밖에도 제주향교를 방문해서 제주의 유림들은 물론 유생들을 만나 학업을 권면하는가 하면,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린 사람들을 방면해주기를 보고서를 통해 밝혔다. 또한 여러 가지 현안 가운데 폐단 사항을 개혁할 것을 건의하였다.

제주에 머물던 6개월여 기간 동안 이런 현장에서 보고 느낀 바의 사항을 일기체 형식을 빌려 기록해놓은 게 바로 《남사록(南槎錄)》이란 책이다.

급기야 조정에서는 이런 청음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여러 가지 제도를 개혁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되었다. 이에 제주 백성들은 그 감사한 마음을 귤림서원의 위패(位牌)에 모셔 오현의 인사들과 함께 제사를 지내면서 그가 베푼 은혜를 기려 나가게 되었다.

 

(1) ‘남사록(南槎錄)’이란 무슨 뜻인가?

‘남사록(南槎錄)’이란 말을 곧이곧대로 풀면, ‘남녘 섬에 테우[槎]를 타고 와서 둘러본 기록’이란 뜻이 된다. 한자어 ‘槎(사)’란 글자는, ‘나뭇등걸’이라는 뜻으로도 간혹 쓰이지만, 대체로 땟목 종류의 통나무배인 테우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서역(西域)을 처음으로 개척한 장건(張騫)과 관련한 뗏목[槎] 이야기가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전하는 일화는 유명하다.

곧, 한무제(漢武帝)가 장건(張騫)을 대하(大夏)에 보내 황하(黃河)의 근원을 찾게 하였는데, 장건이 뗏목[槎]을 타고 은하수를 거슬러 올라가 견우와 직녀를 만났다는 전설로 이어져 전한다.

이로부터 ‘槎(사)’란 글자의 쓰임새는 사신(使臣)의 직임(職任)을 상징하는 말로 주로 쓰이게 되었다. 이의 대표적 사례가 특히 조선통신사로서 일본을 다녀온 기록을 전한 18세기 후반 조엄(趙曮)의 《해사일기(海槎日記)》이다.

 

 

 

 

 

 

 

 

 

 

 

그러고 보면 청음 선생이 지은 《남사록(南槎錄)》이란 책의 제명에는 ‘남녘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온 기록’이란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사신으로 임명된 자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선, 이 책의 서문(序文)을 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도 지적한 바 있다.

“옛날에 대학에서 처음 가르치는 것이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세 편, 곧 ‘녹명(鹿鳴) ‧ 사모(四牡) ‧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를 익힘에 두었는데, 이는 바로 사신(使臣)의 직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와 같은 것에 비유했다.

그러면서 청음 선생께서는 이 <소아(小雅)>의 시 세 편에서 터득하고 익힌 가르침을 거의 완수했고, 마침내 만년에 성취한 바는 천지(天地)와 고금(古今)에 두루 빛나는 일이었다.”라고 하며 선생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2) 《남사록(南槎錄)》에서 처음 밝혀진 최부(崔溥)의 <탐라시(耽羅詩) 삼십오절(三十五絶)>

제주를 소재로 쓰인 향토사(鄕土史) 관련 자료들 가운데, 특히 조선 전기에 쓰인 작품으로서 최부(崔溥, 1454~1504)의 <탐라시 35절>은 단연 압권이다.

이 작품은 제주의 역사와 더불어 15세기 사회상을 조망해볼 수 있는 장편 서사시 모음으로서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순전히 시문으로만 이뤄진 이 작품의 특성이란 한마디로 말해 칠언절구(七言絶句, 총 28자)로 된 시가 무려 35편(28×35=980, 총 980자)이 연이어 전개된다고 봄이 차라리 그 이해가 쉽다.

최부는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표해록(漂海錄)》이란 작품의 저자로도 유명하다. 제주에서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근무하던 중 성종 19년(1488)에 부친상을 당하여 급히 배를 타고 돌아오다가, 풍랑을 만나 13일간의 표류 끝에 중국의 절강성(浙江省) 해안에 표착(漂着)해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최부 일행 43명은 온갖 고초를 겪은 다음 조선인임이 밝혀져 항주(杭州)로 이송되었고, 대운하를 거쳐 북경(北京)에 이르렀다가 요동을 경유하여 조선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가 쓴 일종의 보고서 형식의 글이 바로 이 《표해록》인 셈이다.

예상컨대 최부는 이 당시 제주에서 쓴 <탐라시 35절>의 원본을 행장에 지니고 돌아가다가 표류로 인해 이 작품을 분실했던 것임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기에 그의 유고집인 《금남집(錦南集)》는 이 <탐라시 35절>이란 시가 실릴 법도 한데 빠져있음이 이런 사실을 반증한다.

그렇지만 불행 중 다행한 일은, 최부가 이 작품을 제주에서 완성하고 난 뒤 그 한 부를 제주목 서리에게 베껴 쓰도록 해 제주목에 보관토록 남겨두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110여 년이 지난 뒤인 1601년에 제주목을 방문한 청음 김상헌 선생에 의해서 그 작품이 발견되었고, 이를 《남사록(南槎錄)》에 소개함으로써 이 시의 존재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 셈이다.

어려운 시기에 제주를 찾아 탐라의 역사에 대한 문헌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에서, 장편 서사시적 형태로 귀중한 작품을 써낸 금남(錦南) 최부(崔溥)란 작가도 훌륭하다.

더불어 하마터면 그 존재가 묻혀버릴 뻔했던 소중한 이 작품을 발굴해내어 《남사록》이란 책에 실어 세상에 알린 청음 김상헌 선생의 노고 또한 값진 일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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