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4).. ‘관덕정’ 편액(扁額), 누구의 글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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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14).. ‘관덕정’ 편액(扁額), 누구의 글씨일까(?)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1.20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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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3) 《남사록(南槎錄)》에 실린 제주 관련 기사 중 특이사항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남사록(南槎錄)》이란 책을 읽다 보면, 평소 알고 있던 사항과는 다른 내용이 등장할 때가 있다. 특히 이런 부분을 주목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나는데, 더욱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게 된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소개하면 이렇다.

 

1) ‘관덕정’이란 편액(扁額)은 과연 누구의 글씨일까?

청음 선생이 관덕정을 소개하면서 특별히 신석조(辛碩祖)가 쓴 <관덕정기(觀德亭記)>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글 가운데, “(고득종은) 종영(宗英, 곧 안평대군)의 귀중한 글씨를 받아 그 정자에 편액을 하여 고을을 영예롭게 하고 이목을 높였다.[宗英之寶翰以扁其亭以榮州里以聳耳目]”란 대목이 있다.

이 ‘종영의 귀중한 글씨’란 부분에 청음 선생이 단 원주(原註)를 보면, “비해당(匪懈堂) 안평대군의 액자는 불에 타 없어지고, 지금 걸려 있는 것은 아계(鵞溪) 이산해의 필적이다.[匪懈堂額字實於火今之所捐乃鵞溪筆跡也]”라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는 “‘관덕정’이란 편액 글씨는 본래 안평대군이 쓴 걸 달았었는데 화재로 소실(燒失)되었고, 현재 걸린 편액은 이산해의 글씨로 남아있다.”라는 주장을 제기한 셈이다.

<그림 > 관덕정(觀德亭) 편액 –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글씨(?)

 

이에 대해 역주본 《남사록(南槎錄)》의 저자 홍기표(洪琦杓) 박사는, “청음이 제주를 방문한 해인 1601년을 전후해 관덕정이 불탄 적이 없다는 지적과 더불어 사찬(私撰)인 청음의 기록만으로 현재의 관덕정 편액이 이산해의 글씨라고 주장하는 데는 문제가 있을 것이다.”라는 논지를 폈다. 그러면서 앞으로 이에 대한 지속적 연구가 필요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2) 영실계곡의 ‘오백장군(五百將軍)’이란 명칭은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처음 명명(命名)한 것일까?

《남사록》에 실린 내용을 보면, 청음 김상헌 선생이 한라산 정상에 올라 국토민안(國土民安)의 염원을 담아 산신제를 올리기 위해 산을 오르던 중 존자암이 있는 영실계곡을 지나게 되었다.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남명소승(南溟小乘)》의 기록을 거론하면서, 특별히 백호의 장편시 <오백장군동(五百將軍洞)>과 칠언절구인 <보허사(步虛詞)>를 인용해 소개하고 있다.

“오백장군동(五百將軍洞)은 층층의 봉우리들이 하얗고 깨끗하여 옥병풍을 친 듯 빙 둘러있다. … 참으로 이 섬 중에서 제일로 치는 동천(洞天)이라 하겠다.

그곳의 기암들은 마치 사람 모양으로 물가에서 산 위까지 수없이 서 있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오백장군동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바로이어서 청음 선생이 원주(原註)를 달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러 서적을 조사해 봐도 오백장군동의 이름이란 없다. 아마도 골짜기의 이름은 자순(子順, 곧 임제)이 처음으로 만들어 붙인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按諸書無五百將軍之添疑洞名始於子順也]”

<그림 ()> 수행굴에서 바라본 영실계곡(※ 사진제공 – 양성룡)

 

청음 선생이 지적한 대로 문헌상의 기록으로만 봐선 한라산 영실(靈室) 계곡의 오백장군(五百將軍)이란 명칭이 백호(白湖) 임제(林悌)에 의해서 처음 명명(命名)되었다는 주장이 타당할지 모르지만, 영실에 존자암(尊者庵)이란 사찰이 들어서면서부터 ‘오백나한(五百羅漢)’이란 명칭으로 불려왔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지의 사실 여부를 떠나, 다만 “오백장군(五百將軍)이란 제하의 시문을 지은 사람으로는 백호 임제가 처음이다.”라고 함이 더욱 설득력 있는 표현으로 다가온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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