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성안(城內)과 화북의 경계..화북2동 ᄀᆞ으니ᄆᆞ르(고으니모르)저수지(4·3학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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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성안(城內)과 화북의 경계..화북2동 ᄀᆞ으니ᄆᆞ르(고으니모르)저수지(4·3학살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1.23 13: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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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에 대략 몇 구의 유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화북2동 ᄀᆞ으니ᄆᆞ르(고으니모르)저수지(4·3학살터)

소재지 ; 제주시 화북2동 4925-2, 4925-18번지 일대.
유형 ; 사건현장
시대 ; 대한민국

화북2동_저수지(제주의소리).
화북2동_저수지

 

ᄀᆞ으니ᄆᆞ르는 제주시 일도2동과 건입동의 경계선을 따라 화북동으로 진입하는 길의 제일 높은 고개 마루를 이르는 지명이다. 건입동 566번지 일대가 ᄀᆞ으니ᄆᆞ르동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의 제주교대 입구에서부터 동산이 시작되므로 흔히 교대 앞에서 사라봉 남서쪽까지를 ᄀᆞ으니ᄆᆞ르동산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성안(城內)과 화북의 경계였다.

ᄀᆞ으니ᄆᆞ르저수지(화북저수지)는 제주교육대학교 맞은편 농로를 따라 200m쯤 간 곳에서 남서쪽으로 경작지를 80m 가량 건넌 곳. 또는 국립제주박물관 동쪽 건널목 남쪽 골목으로 350m 정도 간 곳에서 동쪽으로 밭 하나 건넌 곳이다.

화북동 5035번지로 네이버나 다음 지도에서 보면 거의 정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으로 보이나 가운데 둑으로 나뉘어서 남쪽은 미나리밭으로 이용되고 있고 북쪽만 가로 25m, 세로 13m 정도의 직사각형에 가까운 모양의 저수지로 남아 있다.

언제 만들어진 시설인지는 미상이나 거의 직사각형으로 만든 것으로 보아 일제강점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북서쪽에서 도수로가 이어져 있고 배수로 주변에는 4902번지에서 5103번지까지 논으로 이용되었던 경작지들이 있으나 현재 농사를 짓는 곳은 없다.

이곳에서의 학살은 1949년 1월 8일 밤에 이루어졌다. 화북초교에 도피자 가족 등 주민들을 붙잡아 왔고 이들 중 일부는 학교운동장에서 총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주민들은 쓰리쿼터에 태워져 여자들은 속칭 누러이(제주교대 남서쪽) 인근에서 총살하고, 남자들은 속칭 고으니모르에서 총살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고으니모르저수지에서 학살당한 희생자들은 모두 화북리 주민들로 남자였다. 학살 당시 희생자들을 저수지에 집어넣은 후 집단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소문을 들은 유족 및 친인척들이 그 날 밤부터 수습에 나섰다.

지금은 연꽃이 조금 자라고 있어서 육안으로 보기에는 수심이 1m 내외로 판단되지만 당시는 저수지의 깊이를 알 수 없기에 긴 갈퀴를 이용해 시신을 물속에서 꺼냈다고 한다. 미디어제주는 저수지의 물 깊이만 2m, 질퍽한 진흙의 깊이만도 1m라고 밝혔다.

이곳에 당시 수습하지 못한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여 제주특별자치도의 업

무위탁으로 (사)제주4․3연구소와 제주대학교가 2007년 4월 18일부터 5월 25까지 유해발굴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지만 M1탄피 등 18점의 유류품이 발굴되었다.(4․3연구소 홈피)

발굴에 앞서 4월 17일에 개토제를 지냈는데 당시 개토제의 축문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 정해년 양력 사월 열 여드렛날, 저희들은 본격적인 4·3유해발굴에 앞서 조촐하지만 정성스레 제물을 진설하고 삼가 토지지신께 고하나이다.

돌이켜 보면 4·3이라는 참혹한 시절 만나 억울한 영혼들이 구천을 헤맨 지 쉰아홉해가 되옵니다. 그 세월동안 미욱한 저희들은 비명에 가신 이들을 제대로 감장하지도 못했나이다. 어디 그뿐이겠나이까. 누가, 어디에, 얼마나 묻혔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이 정성을 모으는 까닭은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넋이나마 편안히 모셔드리자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토지지신이여! 이 일을 추진하는 동안 부디 놀랄 일, 넋 날 일 없게 하여 주사옵고 궂은 액이 있거들랑 물 아래로 보내어 모든 일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기를 앙망하나이다. 상향〉

제주도의회와 제주도에 접수된 신고사항에 근거할 경우 저수지에서의 학살은 1회에 한정됐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발굴을 위한 사전 조사에서 목격자 및 직접적인 현장 수습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저수지에 대략 몇 구의 유해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 희생된 20여명 중 10명 정도가 이 저수지에서 희생되었는데 유족들이 시신을 수습해갔을 가능성이 크지만 유해가 남아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발굴을 시도한 것이다.

또한 주민학살 당시 저수지에 주민들을 몰아넣고 총살했는지, 주변에서 총살 후 저수지에 사체를 유기했는지, 또 몇 차례 학살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된 것이 없다.

다만 유배발굴조사팀은 잠정적으로 저수지 둔덕에 세워놓고 총살해서 저수지로 떨어지게 했거나, 저수지에 담아놓고 총살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당시 군인들이 사체를 옮길 가능성이 많지 않고 저수지가 핏물로 가득했다는 증언에 따른 것이라고 조사팀은 밝혔다.(제주의소리 070417, 070418, 연합뉴스 070418)

진윤자씨(68.여)는 "시어머니와 함께 벌초를 다닐 때 그때마다 물통(고우니모르 저수지)를 가리키면서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곳이라고 알려줬다"면서 "당시 고우니모르 저수지에서 시아버지를 갈퀴로 건져내고 가마니로 덮어뒀더니 벌레가 많이 생겼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증언했다.(미디어제주 070418)

이 저수지는 인근 경작지에서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었다. 현재는 매립되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에코휴심 빌리지가 들어섰고, 저수지 터는 빌라의 주차장이 되었다.(2020년 개정증보판 제주4․3유적Ⅰ)
《작성 180109, 보완 2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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