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비공개 영구보존 동굴..어음2리 빌레못동굴
상태바
[향토문화] 비공개 영구보존 동굴..어음2리 빌레못동굴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2.11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빌레못 동굴은 총길이가 9020m로 제주도내 용암동굴 중 가장 길다.

어음2리 빌레못동굴

천연기념물 제342호(1984년 8월 14일 지정)
위치 : 애월읍 어음리 1391번지(좌표 ; 북위 33°24′16″ 동경 126°21′0″). 동굴은 어음리 707번지 외 107필지의 지하에 있다.
시대 : 지질시대, 구석기시대, 대한민국
유형 : 자연동굴, 4·3 피난생활 터, 학살 터

어음2리_빌레못굴입구
어음2리_빌레못동굴내부

 

제주시 애월읍 어음리에 있는 용암동굴. 총 길이 11.75㎞(11,748m), 주굴의 길이 2.9㎞이며, 비공개 영구보존 동굴이다. 단 1곳뿐인 입구는 성인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좁다.

빌레못 동굴은 총길이가 9020m로 제주도내 용암동굴 중 가장 길다. 물론 국내 단일동굴 중에서도 1위로 최장 길이를 자랑한다. 2007년 국제동굴학회 화산동굴위원회가 발표한 세계 용암동굴 순위에서는 9위로 나타난 대형동굴이다.

동굴 입구는 중산간지대인 해발고도 252m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에 탄산염 성분의 동굴생성물은 나타나지 않는다.(경향신문 기자 강홍균 글)

단일동굴로는 세계에서 가장 긴 동굴로 주변에 돌(빌레)로 된 작은 연못이 있어서 빌레못동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동굴 입구에서 남동 방향으로 100여m 떨어진 곳에 연못이 있다.

내부구조가 미로형(망상 미로굴)이어서 소라굴이라고도 한다. 1970년부터 고 부종휴씨와 한라산우회원들이 본격적인 탐험을 시작하면서 동굴의 존재가 널리 알려지게 됐다. 본격적인 학술조사가 1977~81년 한국동굴학회와 일본동굴협회의 합동조사단에 의해 이루어져 용암동굴임을 확인했다.

이 동굴은 화산활동에 의해 7∼8만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굴 입구에서 남동쪽으로 약 4.6㎞ 떨어진 발이오름에서 분출된 용암류가 북서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형성된 것으로 분석된다. 신생대 제3기말에서 제4기초에 분출된 표선리현무암층에 속한다.

동굴 입구는 해발 230m 지점에 좁은 함몰구로 되어 있으며, 입구에서 지하로 약 20m 내려가면 동굴로 통한다. 동굴내부는 세계에서 보기 드문 미로형이고, 주굴의 길이보다 지굴의 길이가 더 긴 굴이다. 주굴이 웅장하고 직선형인 데 비해서 지굴은 매우 복잡하다.

이는 용암류가 덮기 이전 원래 지형이 기복이 많은 요철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층굴(상층굴), 가지굴, 심지어 삼선굴(세갈래 굴)까지 나타난다. 이에 따라 동로가 갈라졌다 다시 합쳐지는 구간에서는 용암주석이 발달해있다.

내부에는 용암석순(熔岩石筍)(높이 77㎝)·규산석주(珪酸柱, 珪酸石柱=규소와 산소·수소의 화합물로 이루어진 기둥)(28㎝)·대형용암구(熔巖丘=공 모양으로 굳은 용암)(높이 2.5m, 단경 5.2m, 장경 7m) 등을 비롯하여 분출종유(噴出鍾乳), 용암석순(熔岩石筍, 높이 68㎝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것), 용암교(熔岩橋), 용암수형(熔岩樹型, Lava treemold) 3개소, 용암종유(熔岩鍾乳), 밧줄구조, 천정포켓 등 여러 모양을 한 용암퇴적물이 산재해 있다. 또한 동굴 벽면에는 용암이 냉각되면서 밑으로 밀려내려 온 흔적

이 그대로 남아 있는 등 동굴이 만들어질 때의 흔적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밖에도 구석기시대의 혈거유적(穴居遺蹟)과 함께 석기·목탄류·순록·황곰뼈 등 각종 동물화석이 발견됨으로써 홍적세 때도 이곳에서 사람이 살았음을 입증하는 고고학상의 중요한 자료를 제시해 주고 있다.(Daum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73년 고 박행신 제주대 교수팀에 의해 동굴 내부에서 사슴과 갈색곰(황금곰)의 턱뼈, 관절뼈 등 화석을 비롯 용암으로 만들어진 구석기 시대 유물 박편석기와 골각기, 불을 땐 흔적인 목탄 등이 발견됐다. 이는 빌레못 동굴이 인류가 오래 전부터 생활했던 곳임을 알려준다.

특히 동물 화석들은 구석기 시대의 편년과 당시 한반도와 제주도 연륙설 뒷받침하기도 하며 당시 생활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자리매김했다. 대륙에서 서식하는 황금곰의 화석이 발굴된 것은 당시 한반도와 제주도가 연속돼 있었다는 증거로 내세워지고 있다.

본토에 살던 황금곰이 제주까지 온 것은 바다가 아니라 육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한반도와 제주도가 연결돼 있다 1만년전 충적세 빙하작용 당시 떨어졌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경향신문 기자 강홍균 글)

제1구간(입구~930m)은 동굴 생성물 발달이 두드러지지 않아 단순한 경관을 이루는 구조다. 바닥 가운데 길이 7.9m, 높이 5.1m, 너비 3.0m 규모로 둘레가 16.9m에 이르는 대형 용암구가 자리잡고 있다.

제2구간(삼선굴 구간 1850m, 미로굴 구간 3030m 등 4880m)은 동굴 생성물 발달이 다양해 빌레못 동굴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삼선굴 구간에는 용암종유, 용암석순, 용암산호를 비롯해 소규모 수식동굴까지 나타난다. 이 구간 중간 지점에서 갈색곰의 뼈와 구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됐다. 미로굴 구간은 대체로 규산화, 동굴산호, 용암종유, 용암석순 등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제3구간(3210m)은 삼선굴과 미로굴이 다시 하나의 동로로 합쳐져 막장까지 뻗어나간 구간이다. 석기 시대의 돌창이 발견되고, 용암수형도 발견됐다. 밧줄 구조도 곳곳에서 나타나며, 바닥 너비 역시 7~10m로 대형이다.

빌레못 동굴은 천정의 균열과 풍혈이 비교적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 따라서 다른 동굴에 비해 천정의 붕락에 따른 낙반이 60곳 가까이 나타날 정도로 낙반현상이 심한 편이다. 입구에서부터 낙반이 심해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런 현상은 동굴의 끝인 막장 근처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굴 천정이 두꺼운 지표층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기 또는 폭우 시 일대 구릉지대에 많은 비가 내릴 때면 동굴 입구가 주변보다 낮기 때문에 빗물이 흘러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지상의 표토들이 지대가 낮은 동굴 입구를 통해 동굴 안쪽으로 대거 흘러 들어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유동하는 유수의 용식작용에 의해 훼손이 심해지는 것이다.(경향신문 기자 강홍균 글) 필자가 1978년에 답사했을 때에도 바닥에 많은 진흙이 쌓여 있어 질퍽거렸었다.

빌레못 동굴에 서식하는 동굴 동물은 18종에 이른다고 보고되고 있다. 제주도 용암동굴의 대표적 호동굴성 동물인 제주굴아기거미 등 거미종류가 절반을 차지한다. 외래성으로 알락곱등이도 관찰됐다. 진동굴성인 곤봉털띠노래기도 발견됐다.

이는 제주도 용암동굴의 특산종으로 순백색이고 눈이 없으며, 동굴 깊숙한 곳의 바위 틈이나 박쥐 배설물인 구아노 층에서 관찰됐다. 빌레못 동굴 입구 함몰지역에는 관속식물이 무성하고, 그 하부에는 이끼류 등 선류가 상대적으로 무성하다. 양치류를 포함해 51종이 파악되고 있다.

빌레못 동굴의 지상구역은 임야 51.6%, 밭 44.2%로 이뤄져 다른 동굴에 비해 경작지가 많은 편이다. 특히 사유지 비율이 92.2%로 높아 동굴 지상을 공유화해 보존하는데 어려움이 예상된다. 토지 생산력은 낮고 소나무 식생도 그리 좋지 않은 편이다.

동굴 지상에는 교통량이 많은 간선도로는 통과하고 있지 않으나 마을 진입로인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2곳 교차하고 있다. 빌레못 동굴은 지질구조가 전반적으로 약한 것으로 조사된 만큼 교통량이 많아질 경우 문제가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내부에 통로가 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곳곳에 낙반이 잦아 일반인들의 출입은 금지되고 있다. 현재 빌레못동굴은 동굴 생성물 등의 보호를 위해 공개제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어 관리 및 학술 목적 등으로 출입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재청장의 허가를 받아 출입할 수 있다.

4.3 사건 당시 학살지로도 알려져 있는데, 봉성리 구름동이 무장대에 의해 습격을 당한 다음 날인 1949년 1월 16일 토벌대와 민보단이 합동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전에 의해 동굴이 발각되었다. 눈 쌓인 때여서 동굴에서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동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때문에 발각되었다고 한다.

토벌대는 빌레못굴을 수색해 굴 속에 숨어 있던 납읍리 주민 강규남의 가족 등 일흔 다섯의 노인부터 세 살 된 어린아이까지 어음리, 납읍리, 장전리 주민 29명을 끌어내 대부분 폭도로 몰아 굴 입구 근처에서 학살했다. 시신처리는 강규남이 산에 피해 있다가 임시로 흙을 덮어주고, 다음 해에 본격적으로 수습했다.

동굴에 숨은 사람들이 토벌대에 발각당해 끌려나오는 과정에서 난민 일행 가운데 강규남, 송시영의 서너살 남짓 된 아들을 경찰이 그 다리를 잡아들고는 바위에 거꾸로 메쳐 죽였다고 증언하였다. 이 아이의 어머니와 젖먹이 여동생은 동굴 안으로 숨어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해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경향신문 기자 강홍균 글) 이 시신은 1971년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빌레못 동굴 탐사반에 의해 발견되어 유족에게 인도되었다. 이 때 또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굶어 죽은 시신도 발견되었다.

학살 희생자로는 강규남의 가족(어머니, 아내, 아들, 딸, 누이), 송제영, 강성수, 양신하, 양승진, 양세옥, 납읍 출신 현용승 부부, 현병구의 처, 현병구의 자, 진관행, 양기원, 진승희, 김정현, 현원학 부부, 현규칠 부부, 안인무 등이 알려지고 있다.(4․3연구소)
《작성 180407》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