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1)- ‘마을 아낙의 방애질소리[村女杵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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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1)- ‘마을 아낙의 방애질소리[村女杵歌]’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12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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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3. 동계가 겪은 제주 대정현에서의 10년 귀양살이

 

동계 선생이 제주에 도착해 대정현에 위리안치되어 귀양살이를 시작한 때가 광해군 6년(1614) 8월로서 선생의 나이 46세였다.

그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해배되어 제주를 떠나게 된 때가 인조 원년(1623) 4월로서 선생의 나이 55세였다.

제주에 머문 기간이란 정확히 만 8년 8개월이지만 햇수로 치면 10년째에 해당한다. 제주 오현(五賢)의 다섯 인물 중 가장 오랜 기간 제주에 머물렀던 셈이 된다.

《동계집(桐溪集)》에 실린 그의 기문(記文) 중 <대정현 동문 안에 위리된 내력을 적은 기문>을 보면, 처음 유배지에서 토박이 사람과 나눈 대화의 일면이 실려있다.

“… 내가 이 말을 듣고 혀를 끌끌 차며 탄식하기를, ‘이곳은 참으로 별다른 지역이구나. 나와 같이 죄를 지은 자가 거처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내가 전에 성상의 견책을 받고 경성 판관(鏡城判官)이 되어 북쪽 변방으로 갔었는데, 북쪽 변방의 풍토도 역시 괴상하였지만 그곳은 여기에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가 날 뿐만이 아니다. 죄에는 경중이 있기 때문에 거처하는 곳이 좋고 나쁜 것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곳에서는 한 성(城)을 관할하였고 여기에서는 위리(圍籬) 안에 갇혀 있으니, 같이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일이다. 아, 나의 죄는 의심할 여지 없이 죽어 마땅한데, 다행히 천왕(天王)의 성명(聖明)하심을 힘입어 살아서 해도(海島)로 보내졌다. 오늘 내가 그대들과 같이 웃으면서 말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은덕의 여파가 미친 것이니, 풍토가 좋고 나쁜 것이야 어느 겨를에 논하겠는가.’ 하니, 응대하던 사람이 탄식하며 물러갔다.”

한편 <동계선생연보(桐溪先生年譜)>에 보면, 대정현에서 보낸 귀양살이 중 제주 사람들에게 끼친 동계 선생의 업적 또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대정현의 백성들이 처음에 장유(長幼)의 차례와 상하(上下)의 구분이 없었는데, 선생이 구별하여 늙은이가 먼저 하고 젊은이가 뒤에 하게 하고, 이른바 향유사(鄕有司)라는 자를 대우하여 하리(下吏)와는 그 자리를 따로 하게 하였다.

또 연소한 자를 가려서 문자를 가르치고 인륜을 설명하니, 이로부터 장유(長幼)와 상하(上下)가 조금씩 조리가 있게 되었다. 또 그동안의 자목(字牧)들이 모두 무인(武人)인지라 날마다 백성을 몰아서 사냥에 따라다니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농사를 지어 살아갈 줄 몰랐다.

이에 선생이 읍재(邑宰; 곧 제주목사)에게 말하여, 사냥을 때에 맞게 하고 전묘(田畝)로 돌아가 농사짓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선생의 은혜를 우러러보았다. 이번에 (해배가 되어) 돌아가기에 이르러 울면서 따르기를 친척이 떠나는 것처럼 하였다.”

<그림 ()> ‘세콜방애’의 절구를 찧는 제주 아낙네들(*홍정표 사진)

 

한편 ‘마을 아낙의 방애질소리[村女杵歌]’란 시에선 또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土俗無舂鑿(토속무용착) / 이곳 풍속에 디딜방아 찧기는 없어도

村婦抱杵歌(촌부포저가) / 시골 아낙들 절구질 소리로 감싸드네.

高低如有調(고저여유조) / 높았다 낮았다, 절조가 있는 듯하고

斷續似相和(단속사상화) / 끊겼다 이어졌다, 서로 주고받기하네.

欲解須憑譯(욕해수빙역) / 무슨 말인지 좀체 알아듣긴 힘들어도

頻聞漸不呵(빈문점불가) / 자주 들으니 점점 어색하질 않구나.

凄涼曉月下(처량효월하) / 처량하니 달빛은 새벽녘을 비추는데

遠客鬢先皤(원객빈선파) / 먼데 손님 귀밑머리 먼저 희었구나.”

 

제주 사람들은 ‘절구 찧는 소리’를 두고서 달리 ‘방애질소리’라고도 한다. 보통 두세 사람이 번갈아 가며 절굿공이를 내려치면서 소리를 붙이는데 대개 ‘이여 이여 이여도사나’란 가사를 후렴구처럼 주고받으며 노래를 이어 나간다.

간혹 사람 수에 따라 제각기 ‘세콜방애’니 ‘네콜방애’니 하는 말로 대별하기도 한다. 새벽달이 비칠 때까지 밤새도록 들려오는 이웃집 아낙네들의 ‘방애질소리’에 잠못 이루는 나그네의 심회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한편 《동계집》에는, 동계 선생이 대정현에서 귀양살이를 사는 동안 배수첩(配囚妾)과 서자(庶子)를 두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 전웅이 지은 《유배인과 배수첩들의 뒤안길》이란 책에 보면, 동계 선생이 대정현에서 귀양살이를 사는 동안 배수첩과의 사이에서 서자(庶子) 두 명을 두었다고 했다.

이는 당시 제주 유배객 간옹(艮翁) 이익(李瀷)이 남긴 편지글을 배경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하면서 두 아들 중 나이 어린 서자는 일찍이 죽었고 남은 서자의 이름이 창근(昌謹)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동계 선생과 본부인 사이에서 낳은 창시(昌詩)를 비롯한 세 형제는 모두 아들자식을 둔 데 비해, 배수첩이 낳은 아들 창근은 딸만 넷을 낳았는데, 무과로 진출하여 이서(李漵)의 서녀와 결혼하고 병절교위(秉節校尉) ‧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등을 지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계 선생이 적소(謫所)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배수첩이 조석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 올리는 등 지극한 정성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기도 하다.

동계 선생의 성격상 고지식하게 위리안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바깥출입을 전혀 하지 않아 세월이 흐를수록 걷기조차 힘들어 했는데, 그가 살아남아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오로지 배수첩의 덕분으로 여겼기에 선생이 해배(解配) 되고, 사간원 지제교에 임명되자 배수첩과 서자 창근을 제주에서 불러들여 따로 집을 마련해주게 된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동계 정온 선생은 제주로 유배를 올 때부터 많은 양의 서적들을 적소(謫所)인 대정현 막은골에 위치한 집에 가져왔던 모양이다.

당시 대정현감이었던 김정원(金廷元)이 두 칸 정도의 별도 서재를 지어주어 편의를 제공했음을 기록은 전하고 있다.

평소 독서를 즐겨 했던 정온 선생은 사서(四書) 및 백가사상(百家思想)은 물론 《주역(周易)》을 탐독하며 날마다 괘(卦) 하나를 외웠는가 하면, 문장으로선 특히 맹자(孟子)와 한유(韓愈)의 글을 좋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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