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명도암마을의 개척자..봉개동 고이지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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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명도암마을의 개척자..봉개동 고이지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12.17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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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지는 고장연(高長連)으로 불린다. 장련현감을 지냈기 때문이다.

봉개동 고이지묘

위치 : 제주시 봉개동 794번지.(열안지오름 남동쪽 기슭)
시대 : 조선중기
유형 : 묘

봉개동_고이지묘 옛 비석과_문인석

 

 

봉개동_고이지묘

 

통훈대부(通訓大夫) 고이지(高以智)의 묘는 제주시 봉개동 명도암에 있다. 이곳은 열안지오름의 남동쪽이다. 열안지오름은 명도암 북서쪽에 위치한 작고 낮은 오름이다.

열안지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列雁旨)', 혹은 '제비가 알을 품은 형국(燕卵旨)'이라고도 하지만,《제주삼현도(濟州三絃縣圖》에 '여난지(呂難止)',《제주삼읍전도(濟州三邑圖全》에 '열난지(列蘭地),《제주군읍지(濟州郡邑地)》에는 '여난지(如卵旨)'라고 표기돼 있어 오름 이름의 분명한 의미는 알 수 없다. 혹은 列雁地岳(열안지악), 列雁岳(열안악), 列雁山(열안산)이라고도 한다.

기러기가 날아가는 형국이나 제비가 알을 품은 형국이라는 말은 후세 사람들이 임의대로 유추해서 붙인 말이라고 생각된다. 한자 표기가 음가 차용 표기이기 때문에 한자 해석보다는 고유 지명의 표기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해발 328.7m 열안지 오름은 명도암에서 보면 그지없이 안락하고 부드러운 능선의 낮은 언덕이다. 그러나 보다 낮은 곳인 봉개동에서 보면 마치 기러기가 양 날개를 펴고 유유히 날고 있는 모양의 산세가 선명하다.

고이지(高以智)는 탐라(耽羅) 성주(星主) 고말로(高末老)의 19세손이자 한성부판윤 고득종(高得宗)의 4대(5세=현손)손이며 아버지 오위도총관 고한걸(高漢傑)과 남평문씨 사이에 5남 1녀 중 4남이다. 명도암마을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으며 명도암(明道菴) 북쪽에 '고장연터'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숙부인(淑夫人) 제주양씨(梁氏) 사이에 경곤(景鵾), 경홍(景鴻), 경곡(景鵠), 경학(景鶴), 경봉(景鳳) 등 모두 5형제와 1녀를 두었다. 학자 김진용(金晉鎔, 1605~1663)은 경곤의 딸과 결혼하였으므로 그의 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고이지의 옛비석(舊碑)에 의하면 본관은 제주이며 명종11년(1556)에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내고,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장련현감(長連縣監)과 태안현감(泰安縣監) 겸 절제사를 역임했다. 고이지는 고장연(高長連)으로 불린다. 장련현감을 지냈기 때문이다.

고이지의 묘역에는 통훈대부병마수군절제사 겸 장련·태안현감 고이지와 숙부인 제주양씨 부좌(通訓大夫 兵馬水軍節制使 泰安·長連縣監 高以智 淑夫人 濟州梁氏 祔左)라고 새겨진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제주에서 비교적 드물게 볼 수 있는 원묘(圓墓)로 된 쌍분이 있다.

공의 봉분은 직경이 5m, 높이가 1.2m이다. 처음 무덤을 조성할 때의 높이로 치면 l.5m 이상은 되었을 것이다. 그의 곁에는 숙부인(淑夫人) 양씨(梁氏)의 묘가 비슷한 크기로 나란히 조성되어 있다.

고이지의 생몰(生沒) 연대(年代)는 미상이고, 선조17년(1584) 태안현감(泰安縣監)을 역임한 것으로 보아 16세기 말이나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묘지로 추정된다.

구비(舊碑)는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는데 가첨석에 꽃을 새겼다. 그 비석의 글자는 풍상에 마모되어 전혀 보이지 않고, 문양은 정확하게 어떤 꽃의 문양인지 알 수가 없지만 아마도 조선 초기에 유행했던 방부하엽(方扶荷葉) 형태로 생각된다.

방부하엽(方扶荷葉)형이란 연꽃과 연잎을 어울려 만든 아름다운 화문(花紋)이다. 대개 방부하엽형은 육지에서 벼슬아치의 묘비에 새겨 넣었다. 16세기 묘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화강석 구비(舊碑) 옆으로 16세기에 만들어진 육지 화강석으로 만든 문인석 2기가 좌우 서로 보며 마주 서 있다. 화강석 문인석은 아마도 육지에서 가져온 것이 확실하다.

어떻게 제주에 운반했는지는 모르지만 육지의 전형적인 양반 무덤의 석인상이다. 문인석은 금관조복상이다. 제주가 유독 복두공복 상이 많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육지식 금관조복상은 제주에 그리 흔치 않다. 주로 육지에서 벼슬을 했던 선비들 무덤에 보인다.

고이지 무덤은 원래 석물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으나 동자석은 오래 전에 도난당한 듯하다. 현대에 만든 동자석이 세워져 있다. 또 광무(光武) 연간에 만든 조면암 비석은 제주인 선비 이응호(李膺鎬, 1871~1950)가 썼다.

이응호는 면암 최익현의 제자 이기온의 아들로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을 했던 지사이다. 그가 쓴 비문이 도내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묘역에는 현대에 새로 세운 동자석 2기, 무인석 2기, 망주석 2기, 장명등 1기, 귀부이수(龜趺螭首)의 비석 1기, 상석 1기가 서 있다.

산담은 후세가 세웠으나 규모를 보면 가로 33.8m, 세로 36m나 되는 대형 산담이다. 산담의 평균 너비는 2.7m~2.9m 정도가 된다. 산담 높이는 전면 바깥이 1m, 후면 바깥이 40cm. 경사가 앞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앞쪽을 균형상 높게 쌓았다. 이는 제주도 산담의 특징이기도 하다.

대개의 제주도 무덤들이 구릉이나 능선에 있기 때문에 항시 앞쪽이 낮은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래서 경사가 쏠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앞쪽의 산담을 높게 쌓는 것이다. 신문은 트지 않았고, 산담은 겹담에 잡석 채움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고이지 묘역의 특징을 보면 ①후세에 축조하여 신문(올레)이 없다. ②문인석과 비석은 화강석이다. ③무덤의 위치가 일반적인 무덤(남우여좌)과는 반대(남좌여우)로 돼 있다 ④산담에 어귓돌이 없다.

고이지가 봉개리 명도암 마을의 개척자라 그런지 그가 관련된 당에 얽힌 내력이 전해온다. 20여 년 전까지 명도암 입구에 '도욕남밭당'이라는 당이 있었고, 이 당에는 팽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당 주변에 갓끈을 만드는 도욕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당 이름을 도욕남밭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도욕남밭당 내력담 <고장연과 악생이>라는 설화에 의하면 〈고장연은 황해도 장연고을 현감으로 3년 벼슬을 산 후 하인들을 거느리고 섬(제주)으로 건너오는데 딸에게 줄 선물로 파랑 저고리와 연반물 치마 등을 준비하여 포구로 향했는데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접근하는 여인이 있어 수행원들이 야단을 치자 여인은 사라져 버리고 보따리만 남아 있었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패물이 가득 차 있었다. 보따리를 가지고 포구에 도착하여 출발을 기다리는데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다 되도록 풍랑 때문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 점을 쳐 보니 보따리 주인인 여인의 조화이므로 보따리를 바다에 띄워 버리라고 했다. 그래서 보따리를 바다에 버리고 나니 날씨가 풀리고 순풍이 불어 배를 띄울 수 있게 되었다.

제주에 도착해 보니 물에 띄워 버린 보따리가 배보다 먼저 제주 해변에 밀려왔는데 공(公)의 딸의 몸종이 해산물을 채취하러 갔다가 발견했다. 풀어 보니 자기는 가질 수 없는 패물들이라 아씨에게 갖다 드렸는데 아씨는 그 패물들을 소유하게 되면서 이상증세를 보이다가 가족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악화되어 정신없이 떠돌아다니다가 하루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인들을 시켜 며칠을 찾아보니 아버지가 사다 준 치마저고리를 입고 예촌까지 가서 모내기하는 논에서 노래 부르고 춤추며 놀고 있는 것을 집으로 데려왔는데 이대로 마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점을 쳐 보니 굿을 해야 된다고 해서 굿을 시작했다.

작은굿으로 끝날 줄 알았던 굿이 커지게 되고 환자가 춤을 추어야 된다고 했다. 양반집 딸이 춤을 추며 굿판을 벌일 수 없는 일이라 몸종에게 춤을 추게 하였으나 딸의 병은 호전되지 않고 점점 악화되어서 식음을 전폐하고 웅크리고 앉은 채로 죽고 말았으며 도욕남밭 당신(堂神)으로 모시게 되었다.

그 후 딸을 잃은 상심으로 어머니 양씨와 몸종 악생이까지 죽게 되자 이들까지 당신(堂神)으로 모셔서 도욕남밭당에는 당신 3위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자료에는 〈포구에서 바람 자기를 기다리는데, 하루는 한 하인이 포구에 이상한 보따리 하나가 있다고 하자, 고장연이 그 보따리를 가져오게 하니 그때서야 순풍이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있었다. 그런데 배가 물마루(수평선)에 이르자 집(제주)에서는 장연현감 각시가 미치광이가 되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야단이었다.

이를 안 고장연은 배를 재촉하여 한시 바삐 집에 와보니 각시는 미쳐서 벌써 집을 나가버린 후였다. 고장연은 하인을 시켜 각시를 찾도록 하니 각시는 정의현 하논(大畓)에서 논일을 하노라고 벨착벨착 돌아다니고 있었다. 고장연은 각시를 묶어서 데리고 왔지만 오래 그럴 수도 없어서 심방을 불러 사유를 물은 즉 굿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심방 말대로 고장연은 각시를 살리기 위해 당에 가서 굿을 하였고, 거짓말처럼 각시의 증세가 나아졌다. 그때 양반이 춤을 출 수 없다고 해서 하인인 악생이와 백질이에게 춤을 추게 했고, 이들을 자신의 밭가에 집을 지어줘 살게 했다. 나중에 두 사람이 죽으니 당 양편에 모셨다〉고 한다.(문무병, 1988).

굿을 할 때 이야기되는 신화적 성격을 띤 죽은 조상의 이야기가 있다. 이를 조상본풀이라고 한다. 동이풀이굿은 〈양씨아미본풀이〉에 나오는 굶어서 동이처럼 사려 앉아 죽은 양씨 아미[處女]의 혼령을 위무하는 조상굿이다. 이 굿은 제주시 조천읍 눈미[와산리(臥山里)] 지역 고씨 집안에서 조상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행하는 무속 의례이다.(한국민속신앙사전 문무병 글)

이 내력담에 의하면, 고장연은 황해도 장연 현감을 마치고 제주에 내려온 것으로 되고, 딸 또는 부인은 제주에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신들린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물론 설화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근거는 없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무속신앙과 유교의 공생적인 관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고장연의 활동 시대가 16세기 후반이라는 점에서, 18세기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시기의 대대적인 무속 탄압과는 매우 대조적이다.(제주신보 100813, 171128)

이러한 자료가 있지만 이것은 김진용의 이야기라는 주장이 있다. 김진용 선생 가문에 이와 내용이 똑 같은 이야기가 전해올 뿐만 아니라 도욕남밭에 당신을 마련하고 모시는 신앙민이 광산김씨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1935년생 봉개동 거주 고한구 증언)

고이지의 묘역의 북쪽에 붙여 그의 손녀이며 김진용의 처인 孺人고씨의 묘가 있다.
《작성 18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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