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3)-노씨부인(盧氏夫人)과 스승 정인홍(鄭仁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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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3)-노씨부인(盧氏夫人)과 스승 정인홍(鄭仁弘)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17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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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4. 동계(桐溪) 선생과 함께 함께 해배(解配)된 노씨부인(盧氏夫人)

광해군(光海君)이 집권하던 때를 달리 ‘혼조(昏朝)’라 부른다.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키고 동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해, 소위 ‘폐모살제(廢母殺弟)’의 패륜을 저지르고, 사대(事大)의 본국인 명나라에 대해 배신을 한 광해군을 권좌에서 몰아내고, 서인(西人) 세력의 지지를 얻은 새로운 임금인 인조(仁祖)가 등극했다.

이때가 바로 광해군 15년째이자 인조 원년인 1623년 음력 3월 13일로서, 지금으로부터 꼭 400전의 일이다. 이를 두고 일컬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이라고 한다.

때맞춰 대정현에서 10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살던 동계 정온 선생은 해배(解配)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서 유배를 살다가 풀려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노씨부인(盧氏夫人)이다. 바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부인이자,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모친으로서, 영창대군의 외조모이기도 하다.

노씨부인은 동계 선생이 제주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때보다 4년 뒤인 광해군 10년(1618) 10월에 제주에 유배를 왔다.

당시 제주목사인 양호(梁濩)의 학대가 심했음에도, 적소(謫所)의 집주인 전량(全良) 씨 부부와 이 지역 사람들의 도움으로 ‘모주(母酒)’라는 술을 빚어 팔면서 어려운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인조(仁祖) 원년(1623) 광해군이 축출되고 대북파 일당이 몰락하자 다시 복위한 대왕대비의 특명으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호송을 맡은 봉사 일행이 해남에서 배를 띄우려 할 때 돛대에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는데, 그 새가 배와 더불어 항해를 하고선 조천포에 배가 닿을 무렵 뭍으로 노씨부인의 적소로 날아가서 반가운 소식을 미리 전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까치가 울면 희소식이 날아든다’는 고사가 생겨났다고도 한다.

<그림 (13)> 연안김씨(延安金氏) 집안에서 조성한 대비공원(大妃公園)

 

한편 지난 2004년 12월에, 연안김씨(延安金氏) 집안에서는 ‘광산부부인노씨기적비(光山府夫人盧氏紀蹟碑)’(*撰者 : 洪淳晩)를 세우는가 하면 더불어 계축옥사로 말미암아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김제남 일가 사람들, 총 11인의 기전비(紀傳碑)를 세워 별도의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대비공원(大妃公園)’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곳은, 번영로를 따라 제주시에서 성읍 쪽으로 가다 보면 성불오름 맞은편에 조성되어 있다.

<그림 (14)> 광산부부인노씨기적비(光山府夫人盧氏紀蹟碑)

 

 

5. 스승 정인홍(鄭仁弘)과의 사별

동계 정온 선생이 제주 유배에서 돌아와 중앙 조정에 복귀한 뒤 관직을 처음 제수받은 것은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과 겸춘추관편수관(兼春秋館編修官)이었다.

이에 곧바로 사직 상소를 올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신병이나 연로한 모친 배양 등의 개인사도 있었지만 정작 가장 큰 이유는 조정의 일부 관료들 가운데 자신을 두고 역적 정인홍의 문생임을 제기하고 있는 처지에서 피혐(避嫌)의 의사표시로 이렇게 진달(進達)하게 되었다.

“신이 정인홍(鄭仁弘)에게 비록 책을 들고 가서 수업(受業)한 일은 없지만 스승과 문생의 신분이 정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계축(癸丑, 1613)년 이후로 그와의 논의가 서로 어긋나 마치 다른 사람의 솜씨에서 나온 듯하였으므로 신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고서 스승과 문생 사이라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만, 이는 모두 80세가 넘어 정신이 흐려진 뒤의 일입니다. ….”

<그림 (15)> 정인홍의 초상화(부분도)

 

그러면서 정인홍의 연세가 80을 넘긴 마당에 《예기(禮記)》에 언급된 기록인, “일곱 살의 어린아이와 팔구십의 늙은이는 비록 죄 있더라도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八十九十曰耄 七年曰悼 悼與耄 雖有罪 不可刑焉].”는 대목을 들어 비록 그의 죄가 용서할 수 없다 하더라도 극형에 처하지 말기를 간청하기도 했다.

결국 정인홍이 참수를 당하자, 그때 아무도 그의 시신을 돌보지 않았지만, 동계 선생은 주위의 위협과 냉소를 물리치고 초연히 옛 제자로서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한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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