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6)- 모리재(某里齋)의 관문, 화엽루(花葉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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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6)- 모리재(某里齋)의 관문, 화엽루(花葉樓)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26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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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2) 동계 선생의 묘소 및 용천정사(龍泉精舍)

동계종택에서 자동차로 10분 남짓 거리에 동계 선생의 묘소와 용천정사(龍泉精舍)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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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5)> 바깥에서 바라본 용천정사(龍泉精舍) 전경

 

용천정사는 본래 동계 선생께서 모친이 별세하자 움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했던 터에 마련된 것인데, 안내 표지판의 내용을 참조하면 순조 8년(1808)에 중수되어 해마다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이면 원근의 유림들이 모여 국화를 바치며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한편 동계 선생의 위패를 모셔 배향하는 전국의 주요 서원(書院)으로는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거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함양의 용문서원(龍門書院), 광주의 현절사(顯節祠) 등이 있다.

동계 선생의 신도비(神道碑) 2기가 용천정사 경내에 세워져 있다. 이 비문의 찬자(撰者)는 조경(趙絅)이고, 서자(書者)는 김병학(金炳學)이다.

원래 있던 신도비가 세월의 흐름에 부식되어 비문의 상태가 선명하지 않자 옆에 또다시 새로운 신도비를 만들어 세운 것이다.

동계 선생의 13대손 정종구(鄭鍾九)가 개수(改竪)했다고 명기돼있는 걸로 보면, 현재 15대손 정완수(鄭完秀)의 조부(祖父) 때 새로운 신도비를 조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26)> 동계(桐溪) 선생 신도비(2)
<그림 (27)> 동계(桐溪) 선생 옛 신도비(1)

 

 

 

 

 

 

 

 

 

 

용천정사 옆쪽으로 난 길을 따라 5분 남짓 쯤 산으로 올라가면 중턱에 동계 정온 선생의 묘소가 나타난다. 그 구조가 특이하게도 동계 선생의 묘소 위쪽으로 또 다른 묘가 조성되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바로 선생의 모친인 정부인(貞夫人) 강씨(姜氏)의 묘가 들어서 있는 것이다.

<그림 (28)> 동계 선생의 묘소와 그 위에 모신 모친 정부인 강씨(姜氏)의 묘

 

살아생전 평소 효자로 소문난 동계 선생의 삶의 단편이 죽은 뒤까지도 그런 정신이 이어져 묘지를 조성함에 있어서도 모자(母子)간의 정이 반영돼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느낌이 든다. 다만 비석이 들어선 위치가 봉분과 그 간격이 너무 가까워서 비문의 내용을 확인하기가 다소 어려웠던 게 아쉽다.

<그림 (29)> 동계 선생의 묘소를 찾아 배례하는 필자

 

(3) 모리재(某里齋)의 관문, 화엽루(花葉樓)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 덕유산 자락에 이름 없는 마을이란 뜻의 ‘모리(某里)’에서 칩거하다 5년 만에 세상을 하직했다. ‘나를 찾거들랑 알지 못하는 동네에 산다’고 대답하라고 말한 동계 선생의 뜻을 받들기 위해 후인들이 세운 사당이 바로 모리재(某里齋)이다.

모리재로 들어서는 초입 관문이 화엽루(花葉樓)이다. 선생의 시문 중 일명 ‘화엽시(花葉詩)’라고도 불리는 유명한 시가 있는데, “이제부터 산인(山人)은 일이 더욱 줄어들 테니[從此山人尤省事]/ 단지 꽃(花)과 잎(葉)을 보고서야 계절의 바뀜 알리라[知看花葉驗時移].”라고 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그림 (30)> 화엽루(花葉樓) 현판
<그림 (31)> 모리재(某里齋) 전경(*앞 이층 누각 – 화엽루)

 

(4) 수승대(搜勝臺)에 암각(岩刻) 글씨로 남은 동계의 시문

동계 정온 선생을 비롯한 초계정씨(草溪鄭氏)의 세거지(世居地)인 거창(居昌)은, 옛날부터 산고수장(山高水長)의 자연경관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고장 선현들의 고결한 선비정신과 풍류의 예술혼이 한데 어우러지면서 산수 유람 문화를 스스로 조성해온 전통을 자랑하기도 한다. 동계 종택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수승대(搜勝臺)가 있다.

영남 제일 명승지로 치는 이곳은 덕유산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과 어우러져 황산(黃山)마을 앞에서 구연(龜淵)을 이룬다.

이곳에 들어선 우람한 바위가 마치 거북 모양으로 생긴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수승대이다. 문화유산답사가인 유홍준 선생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마치 ‘거대한 계곡에 거북 모양의 정원석(庭園石)이 앉혀진 모양새’이다.

<그림 (32)> 수승대(搜勝臺) 거북바위 - 국가지정 명승 제53호(2008. 지정)

 

특히 거북 바위에는 이곳을 거쳐 간 수많은 문인 묵객들의 시와 이름이 암각(巖刻) 되어 남아있다. 이곳 거북 모양의 바위 이름도 신라 백제 시절에는 수송대(愁送臺)라 했고, 황산마을 학자 요수(樂水) 신권(愼權)은 암구대(岩龜臺)라 불렀는데,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이 수승대(搜勝臺)라 부른 이후 지금까지 수승대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그 수많은 제영(題詠)과 제명(題名)들 가운데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작품 존재 여부도 궁금했는데, 마침 그의 11대 종손인 정연학(鄭然學)의 이름이 크게 새겨진 곳에 동계 선생의 시가 암각(巖刻) 돼 남아 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세월의 흐름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글자의 판독이 어려운 글자가 여럿 있어 안타까웠다. 동계 선생이 대정현에 있을 때 지은 시라고 하지만 아쉽게도 이 시가 《동계집》에는 실려 있지 않다.

<그림 (33)> 동계(桐溪) 선생의 수승대(搜勝臺) 암각(巖刻) 제영(題詠)

 

○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암각시

 

慣踏曾充好(관답증충호) / 습관처럼 거닐다 일찍이 좋은 것도 잊었는데

遙思始覺佳(요사시각가) / 멀리 생각건대 비로소 아름다움 깨달았네.

水從龍宅壯(수종용택장) / 물은 용택(龍宅)으로부터 내려와 장엄한데

嵐接虎陰埋(남접호음매) / 이내는 호음산(虎陰山)에 접해 묻혀있네.

(*이후 판독불가)

桐溪鄭先生大靜作(동계정선생대정현작); 동계 정선생이 대정에서 지음

庚午五月後孫○○書 ; 경오(庚午, 1870) 5월 후손 아무개 쓰고

丙午六月胄孫刻 ; 병오(丙午, 1906)년 6월 맏손자가 새김

(大字) 鄭然學 : 정연학(鄭然學, 동계 11대손)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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