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1)-후명(後命)을 받게 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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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1)-후명(後命)을 받게 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1.18 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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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4. 규암 송인수 선생이 피화(被禍)돼 후명(後命)을 받게 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의 내용

을사사화(乙巳士禍)는 한마디로 조선 중기 왕비의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벌인 두 정치 세력 간의 권력 쟁탈전의 소산이다.

곧 인종의 외척으로서 척신 윤임(尹任)을 거두로 하는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척으로서 윤원형(尹元衡)을 영수로 하는 소윤(小尹)과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림의 화옥(禍獄)으로서 소윤(小尹)이 대윤(大尹)을 몰아낸 사건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에게서 인종(仁宗)을,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에게서 명종(明宗)을 낳았다.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李彦迪) 등 사림의 명사를 많이 등용하여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되면서 그의 동생인 윤원형이 득세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소윤이 대윤 일파를 제거하고 자기의 세력을 구축한 후 정권을 잡아 권세를 부렸던 게 바로 양재역 벽서 사건이었다. 이때 윤임 일파인 사림 10여 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그중의 한 분이 규암 송인수 선생이다.

그렇다면 규암을 사지로 내몰리게 한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良才驛)에 서 발생한 벽서사건(壁書事件)이란 그 실체가 과연 무엇인가.

이에 대해 《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2년 정미(丁未, 1547) 9월 18일>조에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良才驛) 벽에 붙은 익명서를 가져와 관련자의 처벌을 논의하다’란 제하의 내용으로 실려 있다. 그 사건의 내막에 대한 실체가 중요하니 이날 기사의 전문을 옮겨 소개한다.

<참고자료>

○ 양재역 벽에 붙인 글 때문에 일어난 옥사 – 출처 ; 《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2년 정미(丁未, 1547) 9월 18일’조

부제학 정언각(鄭彦慤)이 선전관 이노(李櫓)와 함께 와서 봉서(封書) 하나를 가지고 입계(入啓)했다.

“신의 딸이 남편을 따라 전라도로 시집을 가는데 부모 자식 간의 정리에 멀리 전송하고자 하여 한강을 건너 양재역(良才驛)까지 갔었습니다. 그런데 벽에 붉은 글씨가 있기에 보았더니,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으로서 지극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가져와서 봉하여 아룁니다. 이는 곧 익명서이므로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에 관계된 중대한 내용이고 인심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여 아룁니다.”

아울러 이노도 아뢰기를, “정언각의 딸은 곧 신의 형(兄)의 며느리입니다. 함께 오다가 보았는데, 아주 참담한 내용이었기에 함께 아뢰는 것입니다.” 했다.

전교하기를, “이는 뜻을 얻지 못하여 윗사람을 원망하는 자의 소행이다. 지금 내가 보기에도 매우 참혹하다. 더구나 신하가 보기에 어찌 예사로웠겠는가.”라고 하면서 이어 정원에 전교하기를, “영부사와 삼공을 속히 명소(命召)하라.” 하였다.

조금 후에 삼공이 이르렀다. 도승지(都承旨) 조언수(趙彦秀)가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우찬성 민제인(閔齊仁), 판중추부사 허자(許磁), 예조 판서 윤원형(尹元衡)도 명소하소서.”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허자는 즉시 이르렀고, 민제인과 윤원형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정언각이 올린 붉은 색 글씨로 된 글의 내용은 이렇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政權)을 잡고 간신(奸臣) 이기(李芑)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중추월(仲秋月) 그믐날.[女主執政于上, 奸臣李芑等弄權於下, 國之將亡, 可立而待。 豈不寒心哉? 時維仲秋(每)晦]”

<그림 (15)> 붉은 글씨로 쓴 양재역 벽서의 내용

 

<그림 (16)> 양재역 벽서를 읽는 모습을 상상해 낸 그림

 

빈청에 내리면서 임금이 이르기를, “요즈음 재변이 매우 많다. 하늘의 견책(譴責)이 어쩌면 이렇게 심하단 말인가. 염려됨이 적지 않아 잠시도 안심할 수가 없다. 비록 분명하게 지적할 수는 없으나 각별히 해야 할 일이 있을 듯하여 경들을 불러서 묻는 것이다.” 하니,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이 주서(朱書)를 보건대, 단순히 미련한 자의 소행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는 익명서이니 믿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들이 들으니, 요즈음 사론(邪論)−죄인을 가리켜 무복(誣服)했다 하고, 훈신(勳臣)을 가리켜 무공자(無功者)라고 한 것이다.−이 떠돌고 있는데 어디서 나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대간과 시종들도 모두 들었으나 말이 나온 출처를 알지 못합니다.

신들이 이미 들은 것을 사실대로 아뢰고자 하였으나 다만 사론이 나온 출처를 모르기 때문에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이 글은 비록 믿을 수는 없으나 이것을 보면 사론이 떠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닙니다. 명소한 인원(人員)이 모두 오면 마땅히 들은 것을 의논하여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민제인과 윤원형이 이르렀다. 전교하기를, “아뢴 뜻은 알았다. 외간(外間)의 사론을 위에서야 어떻게 알겠는가. 어찌하여 세월이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사론은 아직도 그치지 않는가? 매우 망극한 일이다.

그 글은 구석진 곳,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데에 써 붙인 것이 아니고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역관(驛館)의 벽에다가 그렇게 써 붙였으니, 어찌 본 사람이 없었겠는가. 심상하게 여기고 말하지 아니하였으니 또한 그 뜻을 알 수가 없다.

주사(朱砂)는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물건이 아니므로 역관 가운데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이니, 잡아다가 물어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하인을 잡아오면 반드시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행인들이 출입할 때는 역관에 숙직하는 사람이 항상 있어서 비워 둘 때가 없으므로, 반드시 아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자세히 묻게 하면 적발해낼 수가 있을 것이므로 신들이 이미 찰방을 불러 놓았습니다.” 하였는데,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조언수가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이조 판서 김광준(金光準)도 명소하소서.” 하니, 그리하라고 전교하였다.

조금 뒤에 김광준이 이르렀다. 윤인경ㆍ이기ㆍ정순붕ㆍ허자ㆍ민제인ㆍ김광준ㆍ윤원형이 함께 의논하여 그것을 써서 단단히 봉(封)하여 서명(署名)하고 입계(入啓)하기를, “지금 이 서계는 이 벽서(壁書)를 보고서 비로소 서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들이 의논한 지가 여러 날 되었습니다.

당초에 역적의 무리에게 죄를 줄 적에 역모에 가담했던 사람을 파직도 시키고 부처(付處)도 시켜서 모두 가벼운 쪽으로 하여 법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론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공신(功臣)이 긴요하지 않다는 말까지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분명한 일에 사론이 그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화근이 되는 사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아뢰니, 즉시 죄를 정하여 교서에 자세히 기록해서 중외가 다 알게 하소서.” 하고, 또 종이 한 장에 써서 아뢰기를,

“생원 허충길(許忠吉)이 관중(館中)에서 말하기를 ‘이덕응(李德應)은 곤장을 참을 수가 없어서 무복(誣服)한 것이다. 그것이 어찌 사실이겠는가. 허위이다.’ 하였으니, 추문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전교하기를, “당초에 죄인들의 간사한 정상은 의심할 여지 없이 환하게 드러났으나, 죄를 정할 때에 그 괴수(魁首)만 처벌하고 추종자들을 다스리지 아니한 것은,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한마음으로 나라를 위해 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차마 엄중한 율(律)로써 죄주지 아니하고 모두 가벼운 쪽으로 다스리게 했던 것인데, 사론이 지금까지 그치지 않는 것은 엄하게 다스리지 않아서 그러한 것이다. 아뢴 뜻이 당연하니 아뢴 대로 하라. 다만 이완(李岏)은 지금 먼 곳에 귀양 가 있으며 숨만 붙어 있어 조석(朝夕)을 보장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이미 정한 죄를 다시 고칠 것은 없다. 허충길의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삼공이 봉진(封進)한 글은 다음과 같다. “완(岏)ㆍ송인수(宋麟壽)ㆍ이약빙(李若氷)은 일죄(一罪)에 처하고, 이언적(李彦迪)ㆍ정자(鄭磁)는 극변안치(極邊安置)하고, 노수신(盧守愼)ㆍ정황(丁熿)ㆍ유희춘(柳希春)ㆍ김난상(金鸞祥)은 절도안치(絶島安置)하고, 권응정(權應挺)ㆍ권응창(權應昌)ㆍ정유침(鄭惟沈)ㆍ이천계(李天啓)ㆍ권물(權勿)ㆍ이담(李湛)ㆍ임형수(林亨秀)ㆍ한주(韓澍)ㆍ안경우(安景祐)는 원방부처(遠方付處)하고, 권벌(權橃)ㆍ송희규(宋希奎)ㆍ백인걸(白仁傑)ㆍ이언침(李彦忱)ㆍ민기문(閔起文)ㆍ황박(黃博)ㆍ이진(李震)ㆍ이홍남(李洪男)ㆍ김진종(金振宗)ㆍ윤강원(尹剛元)ㆍ조박(趙璞)ㆍ안세형(安世亨)ㆍ윤충원(尹忠元)ㆍ안함(安馠)은 부처(付處)하소서.”】

 

윤인경 등이 회계하기를, “신들이 이른바 화근이라고 한 것은 오로지 완(岏)을 가리킨 것입니다. 어찌 범연히 생각하여 아뢰었겠습니까. 종사를 위한 대계(大計)이니, 진실로 사사로이 용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대의(大義)로 결단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골육(骨肉) 간에 서로 죽이는 것은 예로부터 중대한 일이었다. 더구나 먼 지역에 내쳐서 숨만 겨우 붙어 있으니, 여얼(餘孼)이 없다면 다시 무슨 일이 있겠는가.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삼공이 사사로이 서로 말하기를 ‘이것은 여기에서 그치고 말 일이 아니다. 다만 밤이 깊었으니 뒤에 다시 아뢰어야겠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기(李芑) 등이 을사년 사람들을 역적이라고 하고 그 일을 실증(實證)하기 위하여 중종(中宗)의 아들인 이완(李岏)까지 죽이자고 계청하였으니, 너무 심하다. 조언수가 아뢰기를, “이른바 ‘일죄(一罪)’라는 것은 사사(賜死)하는 것입니까, 율(律)에 의해서 처리하는 것입니까? 감히 묻습니다.” 하니, 사사라고 전교하였다.

결국 당시 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제거하도록 지시했다. 그 결과 한때 윤원형을 탄핵했던 송인수와 더불어 윤임과 혼인관계에 있던 이약빙을 사사하고, 이언적 ‧ 정자 ‧ 노수신 ‧ 정황 ‧ 유희춘 ‧ 백인걸 ‧ 임형수 등을 유배시켰다. 또한 중종의 아들 봉성군 이완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으며, 그 밖에도 애매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어야 했다.

그러나 명종 20년(1565) 문정왕후가 죽고, 그 뒤로 윤원형은 자결하는 등 소윤 일파가 몰락하자 이때 희생되었던 사람은 모두 신원(伸冤)되었다. 이 사건 자체도 소윤 일파의 무고로 처리되어 노수신 ‧ 유희춘 ‧ 백인걸 등 유배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다만 제주 목사로 좌천되어 1년이 넘게 선정을 베풀던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는 중간에 파직되어 고향인 나주의 본집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없어 사사(賜死) 되었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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