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4)-신항서원(莘巷書院)과 숭현서원(崇賢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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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4)-신항서원(莘巷書院)과 숭현서원(崇賢書院)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1.25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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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게속)

 

(2) 규암 송인수 선생을 배향한 서원

1) 신항서원(莘巷書院) (*위치; 충북 청주시 상당구 이정골로 115-8)

 

규암 송인수 선생의 묘소를 둘러보고 난 뒤, 규암 선생을 배향하고 있다고 알려진 신항서원(莘巷書院)을 찾았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정동에 자리한 신항서원은, 본래 유정서원(有定書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그러다가 헌종 원년(1660)에 청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면서 신항서원으로 서원의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창건 당시에 이 지역 선배 유학자들인 경연(慶延) ‧ 박훈(朴薰) ‧ 송인수(宋麟壽) 등 3인을 배향해왔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인조 20년(1642)에 재건한 후에 김정(金淨) ‧ 한충(韓忠) ‧ 송상현(宋象賢) ‧ 이득윤(李得胤)을 추가로 모셔 배향하다가 또다시 효종 7년(1656)에 이이(李珥) ‧ 이색(李穡)을 추가 배향함으로써 모두 9인의 선현을 봄(3월)과 가을(9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그 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8년(1871)에 헐렸다가 1957년에 복원하였고, 1987년 새롭게 단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림 (22)> 신항서원(莘巷書院) 전경

 

2) 숭현서원(崇賢書院) (*위치; 대전광역시 유성구 엑스포로 251번길 24-1)

그런데 규암 송인수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또 다른 서원이 대전에 있는데 그게 바로 숭현서원(崇賢書院)이다. 16세기 후반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서원은 본래 처음 배향된 인물이 충암(冲庵) 김정(金淨) ‧ 수부(守夫) 정광필(鄭光弼) ‧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등 세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광해군 원년(1609)에 송남수(宋柟壽)가 다시 이건(移建)해 세우면서 삼현서원(三賢書院)으로 개칭했고, 뒤에 중앙 조정에 청액하게 되자 사액서원으로서 ‘숭현서원(崇賢書院)’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뒤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 ‧ 야은(野隱) 송시영(宋時榮)을 추가로 배향하였고, 다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다시 추가하면서 모두 8인의 위패를 모시게 되자 ‘팔현묘(八賢廟)’로 불리기도 했다.

숭현서원 또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을 피해 가진 못했다. 고종 8년(1871)에 헐렸다가, 1994년 이후 8년에 걸친 발굴 조사와 대대적인 복원 사업을 벌여 2001년 10월 31일에 위폐봉안식과 더불어 준공식을 거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 (23)> 숭현서원(崇賢書院) 전경(1)

 

한편 인조(仁祖) 3년(1625),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은 <숭현서원기(崇賢書院記)>를 지어 처음 배향된 세 인물에 대한 인물평을 실었다.

“삼가 세 분 선생을 어느 형상에다 비유해 보자. 먼저 문익공(文翼公) 수부(守夫) 정광필(鄭光弼) 선생은, 마치 태산(泰山) 교악(喬嶽)이 충만한 원기(元氣)를 노출하지 않고 깊이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다음 충암공(冲庵公) 김정(金淨) 선생은, 마치 만 길이나 되는 아미산(峩眉山)에 눈이 쌓여 가파르게 우뚝 솟아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규암공(圭庵公) 송인수(宋麟壽) 선생은, 마치 세상의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봉황이 뭇 새들 속에 우뚝 서 있는 것과 같다. 세 분 모두 다 불세출(不世出)의 걸출한 인물들임이 틀림없다[竊以三先生侔而像之 則文翼公如泰山喬嶽 元氣攸葆 冲庵公如 峨嵋萬仞 雪色崢嶸 圭庵公如儀鳳瑞世 建標百禽 其皆不世出之人非耶].”

그런데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쓴 이 글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들 세 분의 군자들은 모두 은진송씨(恩津宋氏) 가문에 나온 분들이다.”라고 한 그의 지적이다.

“삼가 살펴보면, 고(故) 정랑(正郞) 송순년(宋順年) 공이 사위가 있었는데 그 사위가 바로 문익공(文翼公) 정광필(鄭光弼) 선생이다. 그리고 정랑의 아들 진사(進士) 송여익(宋汝翼)의 사위가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충암(冲庵) 김정(金淨) 선생이다.

그리고 정랑의 아들 부사(府使) 송여해(宋汝諧)가 손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이었다. 그들 모두가 한 가문에 모여있는 데다 회덕(懷德)은, 또 바로 은진송씨(恩津宋氏)가 살았던 고장으로 구양수(歐陽脩)와 문천상(文天祥)이 자라났던 여릉(盧陵)에 비기더라도 오히려 더 유명한 곳이다.”

<그림 (24)> 숭현서원(崇賢書院) 전경(2)

 

그러고 보면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종증손(從曾孫)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여기에 빠져있다.

그 까닭은, 상촌(象村)이 <숭현서원기>를 쓸 당시인 인조 3년(1625)은, 우암의 나이 19세로 한산이씨(韓山李氏)에 장가든 해로 바로 신혼 시절이었고, 본격적으로 출사(出仕)하기 이전이라 그 명성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내용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의 경우, 그의 외조부가 정유길(鄭惟吉)인데, 정광필(鄭光弼)은 정유길의 조부가 된다.

정광필은 김정보다 20살 정도 많았는데, 정광필이 이미 대신이었을 때 김정은 갓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원으로 대간의 직을 맡고 있었다. 몇몇 정치적 사안의 처리에 있어서는 대신과 사간의 처지에서 서로 의견이 갈려 심지어 사색(辭色)이 편치 않음을 나타내곤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리에 있어서는 한마음이었던 게,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김정에게 극형이 내려졌을 때, 영의정 정광필이 중종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울며 간하여 사형을 면하고 제주도 위리안치로 감형되게 한 사실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정과 송인수의 관계는, 송인수가 김정의 처 백부(伯父)의 손자에 해당한다. <기묘보유록(己卯補遺錄) ‧ 김정전(金淨傳)>을 송인수가 지었는데, 《대동야승(大東野乘)》에 실려 전한다.

제주 오현의 다섯 인사들 가운데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만 빼고, 나머지 네 분의 인물들이 이처럼 직계 혹은 처가 쪽으로 친인척의 계보를 공유한다는 사실은 우연치고는 너무나 놀라운 정황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알기 쉽게 도표로 정리해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그림 (25)> 제주 오현의 인물 중 사현의 친인척관계도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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