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5)-귤림서원(橘林書院)과 오현단(五賢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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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5)-귤림서원(橘林書院)과 오현단(五賢壇)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1.28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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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3) 귤림서원(橘林書院)

 

제주 오현의 인물이 배향된 귤림서원은 문묘종사였던 충암묘(冲庵廟)와 인재양성을 위해 설치된 장수당(藏修堂)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충암묘는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를 왔다가 후명(後命)을 받고 죽은 충암 김정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선조 11년(1578)에 제주판관(濟州判官) 조인후(趙仁厚)에 의해 그의 적거지에 조성되었다.

장수당(藏修堂)은 효종 10년(1659)에 제주 출신 학자 김진용(金晉鎔)의 건의로 이괴(李襘) 목사에 의해 선비를 기르는 학사(學舍)의 장소로 현재의 오현단 경내에 건립되었다.

그런데 현종 8년(1667)에 제주판관 최진남이 충암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으로 옮기면서 이때부터 사(祠)와 재(齋)를 겸비한 서원(書院)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귤림서원이 들어선 장소가 예전에 감귤을 진상하기 위해 만들어진 과원(果園)이 있었던 곳이었고, ‘육적회귤(陸績懷橘)’의 고사로 효(孝)의 정신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중국 초(楚)나라 때 시인 굴원(屈原)이 <귤송(橘頌)>을 지은 정신과 사상이 오현 인물들의 공통적 관심사이기에 자연스레 ‘귤림(橘林)’을 서원의 명칭으로 삼아 숙종 8년(1682)에 정식 사액사원(賜額書院)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림 (26)> 귤림서원(橘林書院) 현판

 

 

《숙종실록(肅宗實錄)》 <숙종 8년 임술(壬戌, 1682) 6월 23일>조의 기록을 보면, ‘제주의 서원 건립에 관한 논의’의 기사가 실려 있다.

“제주(濟州)의 유생이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과 참판(參判) 정온(鄭蘊)은 일찍이 섬 안에 유배되어 있었고, 문충공(文忠公) 송인수(宋麟壽)는 본주(本州)의 목사(牧使)가 되었으며,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은 순무 어사(巡撫御史)로서 섬 안에 들어왔었다는 이유로써 네 신하의 서원(書院)을 창건하고, 상소하여 사액(賜額)을 청하니, 해조(該曹)에서 중첩하여 설치한 이유로써 예(例)에 의거하여 방계(防啓)하였었다.

김석주가 아뢰기를, ‘네 신하는 모두 문학(文學)과 명절(名節)이 있었는데, 바다 밖에 사는 사람이 존경하고 사모할 줄 알았으므로 이는 가상한 일이니, 육지 근방에 부산하게 중첩으로 설치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사액(賜額)하기를 허가하였다.”

한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학교고(學校考)>에 보면, “귤림서원은 현종 9년(1668)에 건립하고, 숙종 8년(1682)에 사액하였다.”라고 하면서 오현(五賢) 인물들이 선정되어 배향된 시기를 밝혀놓고 있다.

곧, “본조의 형조판서(刑曹判書) 시호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 ‧ 대사헌(大司憲) 증 이조판서 시호 문충공(文忠公) 송인수(宋麟壽; 1678년 추향) ‧ 좌의정 증 영의정 시호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 1669년 추향) ‧ 이조참판 증 영의정 시호 문간공(文簡公) 정온(鄭蘊; 1669년 추향) ‧ 좌의정 증 영의정 시호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 1695년 추향)을 향사하였다.”라고 했다.

<그림 (27)> 귤림서원(橘林書院) 전경

 

 

고종 8년(1871)에 단행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귤림서원이 훼철(毁撤)되면서 오현에 대한 제사도 일시 중지되었다.

제주에 유배를 왔다가 해배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고종 12년(1875) 3월 25일에 귤림서원 옛터를 찾아가서 오현을 추모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 축문에 이르기를, “숭정(崇禎) 모년 모월 모일에 후학 최익현(崔益鉉)은 삼가 충암(冲菴 김정(金淨)) 김 선생ㆍ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 송 선생ㆍ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김 선생ㆍ동계(桐溪 정온(鄭蘊)) 정 선생ㆍ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송 선생의 영령에 고합니다.

… 기묘 제현(己卯諸賢)의 남은 실마리는 실상 규암(圭菴)인데, 벼 포기에 피[莠]와 같은 소인들이 이를 갈았습니다. 양재역 벽서(良才驛壁書)를 조작하여 왕가(王家)를 엿본다고 하였으며, 흠잡을 것이 없으니 좋은 꽃은 베어 내는 것으로 비유하였습니다.

… 저 귤림의 서원을 바라보니 제 마음이 즐겁지 못합니다. 서원 자리에 말을 방목(放牧)하고 밭으로 개간하여 제사를 받들지 않으니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바다에 뜬 차디찬 달과 한라산의 맑은 바람만이 그 아름다움을 변치 않고 시종일관 오래오래 전할 것입니다. … 영령은 강림하여 흠향하시기 바랍니다.”라 했다.

 

<그림 (28)>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화
(소장처 ; 국립제주박물관)

 

위 축문의 내용 중 특히 규암(圭庵)의 행적을 거론하면서 “기묘 제현의 남은 실마리가 규암이기에 벼 포기에 가라지[莠]와 같은 소인들이 이를 갈며 양재역 벽서사건을 조작하여 왕가를 기웃거리고, 흠잡을 게 없으니 ‘좋은 꽃은 베어내는 것’이라고 비유하였다.“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이 내용은 《면암선생문집(勉庵先生文集)》 <제문(祭文)>편에 ‘귤림서원(橘林書院) 유지(遺址)에서 다섯 선생에게 올리는 제문’이란 제하의 글로 실려 있다.

해은(海隱) 김희정(金羲正)은 면암 선생이 제주에서 유배를 사는 동안 그 문하에서 학업을 닦은 제자이다. 그를 비롯한 제주 유림(儒林)들의 건의에 따라 고종 29년(1892)에 오현에 대한 제사를 올림이 다섯 개의 조두석(俎豆石)과 함께 마련되면서 오현단(五賢壇)이란 이름이 새로 생겨나 불리게 되었다.

김희정(金羲正)의 《해은문집(海隱文集)》에 보면, <귤림서원 터에 단을 마련하여 다섯 선생을 제향함[橘林書院遺址 設壇 享五先生]>이란 글이 실려 있다.

“신묘(辛卯, 1891)년 10월, 내가 한양의 객관에 있을 때,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서 단을 마련하여 제향하는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집 아이 항유(恒有)와 함께 달려가 참배를 하고, 그곳이 통장(通狀)과 규식(規式)을 베끼고 돌아와 귤림서원의 여러 유생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때 이기용(李其瑢)이 그 의론을 힘써 주장하여 마침내 단을 마련하고 제향하게 되었다.

橘院遺址綠草肥(귤원유지녹초비) / 귤림서원 옛터에 푸른 풀이 무성해

後生何處可依歸(후생하처가의귀) / 후생들 어디로 의지해 돌아가리까.

年年一度壇前拜(연년일도단전배) / 해마다 한 번 단 앞에서 배례함은

愛禮存羊殆庶幾(애례존양태서기) / 예를 아껴 희생양 바치는 형태지요.”

경기도 양주(楊州)의 석실서원(石室書院)은 그 시초가 오현의 한 사람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선생과 그의 형 우의정 선원(仙源) 김상용(金尙鎔)의 위패를 모셔 향사하던 곳이었다. 그 후로 추향(追享)된 인사가 8인이나 늘어나게 되었다. 총 11인의 위패를 모셔 제향을 지내다가 고종 5년(1868)에 단행된 대원군의 서원 혁파 대상에 올라 완전히 철폐되어 훼철되고 말았다.

그래서 후인들이 석실서원 터에 별도의 제단을 만들어 향사를 올린다는 소식을 접한 제주 유림을 대표하는 김희정(金羲正) 선생 부자가 현장을 찾아가 그곳 실태를 모방해서 오현단(五賢壇)을 조성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특히 석실서원의 조두석 운영 실태를 본떠 오현단에 위패 대신 5기의 조두석을 마련했음은 물론이다.

 

<그림 (29)>오현단 조두석 1960년대 모습(《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입구에 보면 제주 현무암에 큰 글씨로 ‘五賢壇’이라 새겨진 표지석이 있다. 뒷면에 ‘1998년 세모(歲暮)에 우하(雨荷) 서(書)’라고 씌어있는데, ‘우하(雨荷)’를 호로 쓴 이는 조각가 문기선(文基善) 교수이다.

<그림 (30)> 오현단(五賢壇) 표지석(글씨– 문기선)

 

현재 오현단 이곳에는 세 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귤림서원(橘林書院)’, ‘오현단(五賢壇)’, ‘향현사(鄕賢祠)’에 대한 안내문이 그것인데, 모두 한글, 영문, 중문, 일문 등 4개국의 언어로 소개하고 있다. 이 가운데 귤림서원과 오현단 안내문의 내용을 옮겨 소개해 본다.

 

○ 귤림서원(橘林書院)과 오현단(五賢壇)의 안내문

가. 귤림서원(橘林書院) 안내문

“귤림서원은 1578년(선조 11)에 제주판관 조인후가 기묘사화로 1520년(중종 15) 6월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의 적거지에 사묘를 세운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660년(현종 1) 제주목사 이괴(李襘)가 장수당을 건립하였고, 1667년(현종 8)에는 제주판관 최진남(崔鎭南)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짓고, 이를 사(祠)로 하고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하여 귤림서원(橘林書院)이라 헌액하였다.

1682년(숙종 8) 신경윤(愼景尹)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예조정랑 안건지(安建之)를 제주도에 파견하여 귤림서원으로 사액을 하고 김정, 송인수, 김상헌, 정온의 4현을 봉향하다가 1696년(숙종 22)에 이익태(李益泰) 절제사 때 송시열이 추향됨으로써 5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그 뒤 1850년(철종 1) 제주목사 장인식이 귤림서원 묘정비를 세웠다. 초기의 재생(齋生)은 20명이었으나, 뒤에 15인을 늘려 35인이 되었다.”

<그림 (31)> 귤림서원(橘林書院) 안내문(한글 부분)

 

안내문의 내용 가운데 ‘기묘사화로 1520년(중종 15) 6월 제주도에 유배되어 사사(賜死)된 김정(金淨)…’의 표현이 있는데, 제주에 입도한 달이 6월이라 명기함은 잘못된 정보라고 본다.

《충암연보(冲庵年譜)》에 보면, 충암이 제주에 도착한 날이 ‘1520년(중종 15) 8월 21일’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1520(중종 15) 윤8월’로 고쳐져야 할 듯하다. 그리고 송시열이 귤림서원에 추향된 해를 1696년(숙종 22)이라 함도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서원등록(書院謄錄)》 <숙종 21년(1695) 6월 19일>조에 보면, 우암 송시열을 귤림서원에 합향(合享) 하도록 요청하는 제주의 유학(幼學) 김성우(金聖雨)의 상소 사실이 게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임금으로부터 윤허를 받은 기록이 있다.

그리고 숙종 21년(1695) 10월 초6일에 제주목사 이익태(李益泰)가 장계를 올려 “선정신(先正臣) 송시열의 위판을 예문(禮文)에 따라 귤림서원에 봉안하고 제사를 시행했습니다.”라고 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리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학교고(學校考)>편에도 “(귤림서원에) 숙종 21년 을해(乙亥, 1695)에 송시열을 추향(追享)하였다.”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송시열이 귤림서원에 추향된 해는 ‘1695년(숙종 21)’로 수정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나. 오현단(五賢壇) 안내문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1호 *소재지 ; 제주시 오현길 61(이도일동)

 

“오현단(五賢壇)은 조선시대 제주에 이바지한 오현(五賢)을 배향한 귤림서원의 옛터에 조성한 제단이다.

오현(五賢)은 1520년(중종 15)에 제주에 유배왔던 충암(冲庵) 김정(金淨), 1534년(중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601년(선조 34)에 제주 안무사로 왔던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614년(광해군 6)에 제주에 유배왔던 동계(桐溪) 정온(鄭蘊), 1689년(숙종 15)에 제주에 유배왔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다섯 사람을 이른다.

1871년(고종 8)에 귤림서원이 헐린 뒤에 1892년(고종 29)에 김의정(金義正)을 중심으로 한 제주 유림이 귤림서원의 자리에 제단을 조성했다. 지금은 위패를 상징하는 조두석(俎豆石) 5기가 설치되어 있다.

이 제단은 1578년(선조 11)에 제주목 판관 조인후(趙仁厚)가 가락굿물 동쪽으로 충암묘(冲庵廟)를 지은 것이 시초인데, 1667년(현종 8)에 충암묘를 현 오현단(五賢壇)으로 옮겨와 사당으로 삼았다.

1659년(효종 10)에 목사 이괴(李襘)가 이곳의 장수당(藏修堂)을 재(齋)로 바꾸어 귤림서원이라 했다. 1682년(숙종 8)에 사액(賜額)을 받고 김정 ‧ 송인수 ‧ 김상헌 ‧ 정온 등 네 사람을 모셨다가, 1695년에 송시열도 함께 모시면서 다섯 현인[五賢]을 배향하게 됐다.”

<그림 (32)> 오현단(五賢壇) 안내문(한글 부분)

(여기서 김의정(金義正)’김희정(金羲正)’의 오기(誤記)이다.)

 

 

참고로 위의 안내문의 내용을 약간 달리해 필자의 짧은 소견으로 새로 작성해 봤다.

“오현단(五賢壇)은, 조선시대 제주의 오현(五賢)−곧, 충암(冲庵) 김정(金淨; *1520년 제주목 유배인) ‧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534년 제주 목사)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601년 제주 안무어사) ‧ 동계(桐溪) 정온(鄭蘊; *1614년 대정현 유배인)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89년 제주목 유배인) 등 다섯 분−을 배향했던 귤림서원의 옛터에 조성한 제단이다.

고종 8년(187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귤림서원이 훼철(毁撤)하게 되면서 향사가 멈추게 되었다. 그러자 고종 29년(1892)에 김희정(金羲正)을 중심으로 한 제주 유림이, 다섯 신위의 위패 대신에 5기의 조두석을 만들어 귤림서원의 옛터에 별도의 제단을 새로 조성해 향사를 이어갔다.

오현단은 선조 11년(1578)에 제주판관 조인후(趙仁厚)가 가라쿳물 동쪽에 충암묘(冲庵廟)를 지은 것이 그 효시(嚆矢)인데, 이를 현재의 터로 옮겨와 사(祠)로 삼았던 게 현종 8년(1667년)의 일이다. 뒤이어 효종 10년(1659)에 목사 이괴(李襘)가 이곳에 장수당(藏修堂)을 세워 재(齋)의 형태를 갖추었다.

충암묘의 이전과 장수당의 건립은 서원(書院)의 구비 요건을 충족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기에 귤림서원(橘林書院)으로 바뀔 수 있었다. 숙종 8년(1682)에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지정될 당시엔 제주의 사현(四賢) − 충암 김정 ‧ 규암 송인수 ‧ 청음 김상헌 ‧ 동계 정온 등 네 분−만을 모신 형태였다. 그러다가 숙종 21년(1695)에 우암 송시열 선생이 최종으로 추향(追享)되면서 제주 오현이 귤림서원에 모셔지게 된 것이다.”

귤림서원이 헐리게 된 사연과 함께 서원 기능의 2대 요건인 ‘사(祠)’와 ‘재(齋)’의 내력을 설명하면서 귤림서원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더욱 구체화했다.

안내문의 예시에서 제주 유림을 대표하는 인사로 소개한 김의정(金義正)은 김희정(金羲正)의 오기(誤記)이기에 바로 잡았다.

더욱이 이괴(李襘) 목사가 장수당을 세운 건 맞지만 귤림서원으로 명명한 건 그 후대의 일로서, 안내문 대로라면 사실과 달라 혼동을 줄 우려가 있다.

대개 조선시대 벌어진 일들에 대한 설명의 나열이기에 왕력(王曆)을 먼저 쓰고 서력(西曆)을 부기하는 추세를 참조해 재구성해본 것이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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