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청소년들 항일독립의식 심어줘..판포리 김정맹(金精孟) 지사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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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청소년들 항일독립의식 심어줘..판포리 김정맹(金精孟) 지사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0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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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판포리 김정맹(金精孟) 지사 묘

위치 ; 판포리 1820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판포리_김정맹지사묘


김정맹(1917∼1969) 지사는 본관은 김해. 아버지 김원규(金元圭) 어머니 김중흥의 1남 9녀 중 3대 독자로 한경면 두모리 2394번지에서 태어났다. 일명 김정익(金精益) 이라고도 불렸다.

두모리 서당에서 3년 간 한글과 한자를 수학한 후 한림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1928년 두모리 대동청년단 부단장, 1931년 단장, 1930년 여름 신창리 출신의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좌응신(左應信)의 권유로 신창독서회에 가입하였다.

1931년 5월 5일 한림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홍창주(洪昌柱)와 함께 일본인 교장에게 ①노예교육을 폐지할 것 ②교과서를 무상배포할 것 ③김某 선생을 축출할 것을 요구하며 400여명의 학생의 1일 동맹 휴학을 주도하여 퇴학당하였다.

1932년 3월 하순경 좌응신(左應信), 김두진(金斗珍), 고자화(高子華), 양두옥(梁斗玉) 등과 함께 구우면(舊右面) 신창리(新昌里) 북해안 축항(築港) 부근에서 5인조 비밀 결사(結社)를 조직하여 책임자 좌응신, 농민부 양두옥, 소년부 김정맹(金精孟), 연락부 김두진, 학생부 고자화(子華)가 각기 담당하였다.

뒤에 책임자는 양두옥, 소년부 김정맹, 농민부 진순행(秦順行) 등으로 개편하였다. 5월 1일 노동절 기념 시위를 계획하여 서당 학생 100여 명과 함께 구우면 용수리까지 시위 행진하여 가던 중 일본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두모리의 대동소년단에 가입하여 좌응신의 지도로 항일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33년 1월부터 한림리의 김경봉(金京奉)과 밀접하게 연락하면서 혁명적 제주도 농민조합 창립준비위원회 활동을 하고, 1933년 8월 상순경 신창리에 있는 서당이 공립보통학교로 전환·승격하는 것과 식민지 교육에 반대하는 연설을 하여 주민의 여론을 환기시키면서 김윤옥(金允玉)과 함께 소녀야학소를 개설하여 학생들에게 연 25회에 걸쳐 독립정신 고취를 위한 연설을 하였다.

1934년 청소년들에게 항일독립의식을 심어주다가 제주농민조합창립준비위원회 관련자로 동지 13인과 함께 1937년 03월 23일 순사(巡査) 하필수(河弼洙)에 의해 체포되었다.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1948년 제주교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사 자격 검정시험에 합격하였다. 1950년부터 1968년까지 성산중학교·신창중학교·무릉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임하였다.

1990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향토문화전자대전, 제주인물대사전, 국사편찬위원회, 제주도청 홈피, 두모리 홈피)

묘비에는〈愛國志士金精孟之墓 公은 金海金氏 首露王의 後裔而 三賢公派濟州入島祖諱明章公의 8代孫 公의 祖는 參奉諱는 基俊 祖妣濟州高氏 考는 明冠諱元圭 妣金海金氏中興의 3代獨子 配谷山康氏正玉 子榮珉 女永順婿高元贊 外孫京秀京姬京良 配濟州高氏順化 子榮哲 子婦金南淑 子榮一 女榮玉婿高禹植 外孫지나지혜지은 // 金精孟 志士는 1917년 2월 28일 한경면 두모리에서 父金元圭 母金中興의 1男9女 중 3대 독자로 태어나 어릴 때 두모리 서당에서 한글과 한문을 수학한 후 구우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0년 5월 상순 제6학년 재학중 식민지교육에 반대하는 동맹휴고에 가담하다 퇴학당하였고, 1930년 12월 14세 때 두모리 대동소년단 부단장이 되고 1931년 1월 단장으로 추대되어 일경에 피체시까지 동소년단을 통솔하였으며1932년 3월 하순 左應信 梁斗玉 金斗珍 高子華 등과 같이 항일독립운동을 목적으로 5인조 결사를 조직하여 소년부를 담당하여 동년 5월 1일 노동절에 梁斗玉 金斗珍 高子華와 함께 서당 학생 100여명을 인솔하여 용수리까지 시위행진을 하여 가던 중 경찰에 의해 해산되었고, 동년 11월 상순부터 1933년 2월말까지 수십회의 소년야학회를 열어 100여명의 소녀들에게 항일독립의식을 고취하였고 1934년 청소년들에게 항일복립의식을 심어 주다가 1934년 10월 日警에 피체되어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목포지청에서 징역1년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고 1969년 11월 11일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서기1996년 4월 일 北濟州郡守 謹竪〉라고 새겨져 있다.
《작성 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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