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경신고를 빛낸 인물’ 선정..귀덕1리 조봉호 의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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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경신고를 빛낸 인물’ 선정..귀덕1리 조봉호 의사 생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08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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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금성교회를 개설하는 등 도내 초기 기독교인 활동..제주도내 군자금 모금 총책임자 자처 옥고

귀덕1리 조봉호 의사 생가

위치 : 한림읍 귀덕리 1358-1번지(귀덕14길60-4)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

귀덕1리_조봉호생가 이문간
귀덕1리_조봉호생가


조봉호 의사(趙鳳鎬義士)는 한림읍 귀덕리 출신으로 1884년 5월 12일 아버지 조만형과 어머니 김진실 사이에서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2년 언더우드가 설립한 서울의 경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904년 부친이 사망하자 귀향하여 1908년 교인 이덕련과 함께 자생적인 설교활동으로 금성교회를 개설하는 등 도내 초기 기독교인으로 활동하였다.

1912년 이기풍 목사의 권유로 평양의 숭실학교에서 기독교에 대한 학문을 넓히고 1년 후 귀향하여 기독교 선교활동에 기여하였다. 1912년 금성리 교회를 개척하여 선교 활동에 진력한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1919년에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 육성 군자금으로 5천 원을 모금하여 줄 것을 국내에 요청하였다.

1919년 5월 독립희생회 연락원 김창규(金昌奎)가 임시정부 선전문, 해외통신문과 제반 사항, 해외통신(독립청원서 관련), 통신사항(독립군 자금 모금 관련) 등을 가지고 와서 제주교회 김창국(金昶國) 목사·조봉호 의사·최정식·김창언과 접촉하면서, 독립희생회를 조직하여 줄 것과 전국적으로 5천원의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으니 회원은 1인당 회비 2원씩을 납부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즉석에서 승낙하였다. 당시 쌀 한가마니의 가격은 4원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선포문과 해외통신문을 최정식은 제주법원의 등사기를 이용하여 3종의 문서를 50매씩 인쇄하여 제주 전역에 배포하였다.

모금운동은 제주성내교회 김창국 목사, 모슬포교회 윤식명 목사, 정의교회 임정찬 목사사 자신의 교회 소재지를 중심으로 제주를 3개 지역으로 나누어 맡아 당시 12개소 정도였던 교회 조직망을 통해 군자금을 모으는 일을 한 결과 회원 4,450인으로부터 성금 1만원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 지사는 고향에 있는 80필지의 밭과 집을 모두 처분해 헌납했다.

그러나, 1919년 7월에 이 사실이 일경에 발각되어 조봉호·최정식·김창국·문창래 등 관련자 60여인이 피체되었다.

의사께서는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하고 동지들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스스로 제주도내의 군자금 모금 총책임자라고 자처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故 장응선, 故 신현범, 故 고창현 옹 등이 한결같이 이 사실을 증언하였다. 목회자들의 무죄를 적극 주장했던 조봉호 전도사 덕분에 세 목사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19년 9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판결로 최정식 징역 3년, 조봉호 징역 2년, 문창래 징역 6월 형이 선고되었으나 공소를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1919년 11월 12일에 대구복심법원 형사 제2부 판결로 최정식은 징역 1년 6월, 조봉호는 징역 1년으로 각각 감형되었으며 문창래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조봉호 의사는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1920년 4월 28일 37세로 옥중순국하셨다.

당시 유족으로는 부인 조성벽(36세), 아들 노득(14세), 피득(10세) 등이 있었으나, 유족들은 동가식서가숙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유해를 인수하지 못하였고 형무소에서 임의로 처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사라봉의 기념탑은 1977년 1월에 건립하였다.

기념비의 설계와 조각은 조각가 화암 문정화(文貞化)의 작품으로 가로·세로 10m의 십자가 기대(基臺)는 의사의 기독교적 애국정신을 뜻한 것이며, 20m 높이의 기념비 상부에 새긴 5개의 한국 고유의 완자 무늬는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뜻하는 것이다.

〈殉國志士趙鳳鎬紀念碑〉 글씨는 청탄 김광추(金光秋)의 작품이며, 그 아래 조봉호의 상이 부조로 부착되어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겨레의 얼이 숨 쉴 수 없는 민족의 슬픔 속에서 독립의 횃불을 높이 쳐들고 순국한 지사들의 넋 앞에 우리 후손들은 고개 숙이리.

일본의 식민 통치 아래서 굴욕적 생활을 견뎌야 했던 지사들은 후손에게 그 참상을 물려 줄 수 없어 맨손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상해 임시 정부의 활동 자금을 모야 보내었으리,

그의 애국 충성은 기독교의 박애 정신을 바탕으로 더욱 굳건하였으니 동지들을 구하고 홀로 순국한 그 정신을 우리는 삶과 애국의 길잡이로 이어 받으리.

계 2:10의 말씀을 실천에 옮긴 조봉호 지사의 뜻을 오래도록 간직하리. 지사의 숭고한 애국 애족과 희생 정신 앞에 추념하노니 복된 앞날을 함께 축복하리이다. 1977.1.11.〉이라는 추념의 글이 새겨져 있다.

2012년 11월9일에는 그의 고향인 제주시 한림읍 귀덕리 2544-4번지 가족묘지에 추모비가 건립됐다.

2015년 10월에는 모교인 서울 경신고 개교 130주년 기념식에서 조 지사를 ‘경신고를 빛낸 인물’로 선정하고 증손자인 조재석씨(53)에게 고인을 대신해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
《작성 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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