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김구 주석과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 ..옹포리 문덕홍 지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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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김구 주석과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 ..옹포리 문덕홍 지사 생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09 13: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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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사대의 징표..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석별시에 찍은 사진과 매우 비슷하다.

옹포리 문덕홍 지사 생가 

위치 : 옹포리 546-1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

옹포리_문덕홍지사생가터(박원연_2016년)
옹포리_문덕홍지사생가

 

문덕홍(文德洪, 1902~1949년) 지사는 옹포리에서 문보룡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25년 일본을 왕래하는 선원 생활을 하던 중 평소부터 대일감정이 나빴으며, 한 때 일본인 동직자와 사소한 언쟁 끝에 격한 적대적 언행을 가한 사실이 문제가 되어 일경에게 피체되어 취조를 받던 중 흥분하여 의자를 들어 왜경을 구타하고 사무실 내의 집기·비품 등을 닥치는 대로 파손시킨 사건을 일으킴에 따라 형사구형으로 1년간 복역하였다.

1936년 경 일제에 의해 선원으로 강제 징용돼 中東·홍콩·上海·淸島·旅順 등지로 끌려다니다가 1940년 탈출에 성공했다. 충칭(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서 얼마 후에 警衛隊員으로 복무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길을 나섰다.

그 해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 중국의 광시성 유림·계림 전투에 참가하면서 왜병 1개 사단과 전투중 1개 여단 병력을 살상한 공적을 세웠으므로 그 후 경위대 부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41년 2월 왜적 후방인 中支·河山省·開封市에 침입하여 약 3개월간 비밀지하공작을 행하였으며 왜병 통역관(創氏 野村, 한국명 이영수)을 포섭 하산성 盤與日警備隊를 第3支隊에 인계하였다.(남평문씨 제주도종친회에서 발간한 「文巖濟州」)

1942년부터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비대원으로 임명되었고 중국과 만주지방을 넘나들면서 수많은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다. 1942년 10월 21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선거에서 전라도구의원(全羅道區議員)으로 당선되었다. 김구 선생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재무부 총무과 직원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6월 서무국 직원을 겸직하였다. 1945년 임시정부 주석 경호실장으로 일하였다.

특히 비밀공작원 훈련을 받고 다른 요원들과 함께 국내에 침투해 일제의 군사 시설과 동향을 조사·탐지해 보고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45년 봄에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국내 침투 계획을 세우고 미군 OSS(미국 육군 전략처)에 의뢰하여 비밀 공작원을 양성할 때, 공작원 훈련을 받고 다른 요원들과 함께 국내에 침투하여 일제의 군사 시설과 동향을 조사·탐지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국내 침투시는 당시 京港線 許昌에 주둔한 第3支隊 阜陽비행장에 착륙하려다가 위치불명으로 중경으로 기수를 돌려 일단 귀대하였다가 약 16일 후 다시 특파원 일행(박영준 회장·전월성씨)과 출발하여 목적지인 阜陽부대에 무사히 도착하였으며 문지사만 淸島 및 大連에서 약 1개월간 선원으로 가장하여 생활하다가 신의주를 경유 국내로 침투하였다.

침투중 宣川-定州간 열차에서 왜경에게 2차에 걸친 불심검문에 무사히 통과한 후, 3차 검문이 있을 것에 대비하여 소지하고 있던 신분증(명주布에 싸인된 김구 주석의 文表)을 변소칸을 이용하여 팬티 속에 비장하였던 것을 꺼내어 버렸다.

실제로 3차 검문에서는 옷을 모두 벗게 하여 세밀히 뒤졌으나 문표가 없었으므로 혐의없이 무사할 수 있었다.(문암제주 434쪽)

국내에 첩보요원으로 잠입하게 될 때 출발에 앞서 김구 주석과 태극기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그 사진에 백범은 이별에 임한다는 뜻을 담아 친필로「文德洪臨別」이라 하여“文德洪 同志는 阜陽工作을 담당, 출발시 기념 民國27年 5月 9日 重慶에서”라고 써서 주었다.

이는 마치 백범선생이 윤봉길, 이봉창 의사와 석별시에 찍은 사진과 매우 비슷하다. 결사대의 징표인 것이다.

다음은 이에 대한 김찬흡 선생의 글이다.〈1999년 광복회장 윤경빈(尹慶彬, 광복군 총사령부 부관 역임)이 내도, 점심 때에 나는 문의사에 대한 얘기를 했더니 그는“아! 그 촬영하던 자리에 있었소. 나는 그의 후임 경호실장이오”라는 것이었다.〉문 의사의 아들은 프랑스 파리에서 이름있는 문학가로 국위를 선양하고 있다.(제민일보 2004년 6월 2일)

1945년 5월에도 비밀공작원으로 국내 서울에 침투하였다가 1945년 8월 초에 부산에서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복역하다가 해방 후 출감하였다. 중국에서 입은 전상(戰傷) 후유증과 일제의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49년 5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기해서 묘역에 제주도 재향군인회에서 문덕홍 지사 독립항쟁기념비를 건립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신문 4328년 8월 15일)

그의 광복군에서의 투쟁 기록을 적은 독립항쟁기(獨立抗爭記)가 한림읍 동명리 신명동에 세워져 있다. 지사의 생가는 완전히 철거되고 외지인이 들어와서 새로운 집을 지어 살고 있다. 문덕홍 지사 묘는 한림읍 동명리 97-3번지에 있다.
《작성 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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