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독립운동가 변론으로 일제에 맞서..고산2리 이창휘 지사 살던 집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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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독립운동가 변론으로 일제에 맞서..고산2리 이창휘 지사 살던 집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10 07: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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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은 범죄가 아니다" 변론.. 이인(李仁, 초대 법무부장관) 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 변호사 등도 주장

고산2리 이창휘 지사 살던 집터

살던 집 위치 ; 한경면 고산리 1618-2번지(고산남8길7)
생가 : 고산리 1695번지(일곱ᄃᆞ르 마을)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집터)

이창휘_사망_보도(동아일보1934.09.12) 

 

고산2리_이창휘 살았던 집



이창휘(李昌輝: 한경면 고산리)의 변론 : 1924년 3월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10월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독립운동가를 위한 변론으로써 일제에 맞섰다.

선생은 변호사 시험 합격 후 사망(1934년) 직전까지 그가 법조계에 투신한 목적대로 전국 법정에서 애국지사들을 위한 무료변론으로 일관했다.

당시 "독립운동은 범죄가 아니다"라고 변론했던 인물로는 선생 외에 이인(李仁, 초대 법무부장관) 김병로(金炳魯, 초대 대법원장) 변호사 등이 있었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변호사로서 이창휘 선생이 언제나 앞장섰고 두 분 또한 함께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3인방이었다. 이들 셋은 항일독립투쟁사에 남을 큼직한 민족해방운동 사건에 빠짐없이 변론을 맡았다.

이창휘는 특히 항일운동가와 사상가, 민중운동에 헌신하던 인사들의 변론에 힘썼다. 1926년 6.10만세운동 주동자 10명에 대한 공판에서 이들 3인의 무료변론은 당대에 유명했으며 1928년 6월 변호사 10명이 참여한 경상남도 청년연맹 사건 재판에 자청하여 변론에 나섰다.

또한 1929년 광주학생사건 주동자 박형기 등 49인에 대한 보안법 위반 공판에서도 '범죄구성요건에 해당되지 않는다'며 전원무죄를 주장했다.

변론에 앞서 조선일보(1930. 2. 6.)는 "경성 법조계에서 명성이 높은 이창휘 이인 김병로 변호사가 자진 변론키 위해 광주에 출장간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고 있어 이변호사의 당시 명성을 짐작케 한다.

이 사건에서 선생은 "피고의 자유진술을 반대하고 일사천리로 심리를 진행하는 것은 불가하다"며 재판장에 수차례 항의, 재판의 불공정성을 통박했다.

1929년 영국의 식민지정책을 비난했다가 영국 경찰에 체포돼 일제(日帝)에 인도됐던 몽양 여운형 사건, 1929년 4월 공명단(共鳴團) 단원들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서울 망우동에서 우편물 수송차를 습격한 사건, 일본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 운동가 김문준(金文準)이 연루된 사건, 1930년 6월 조선청년총연맹함북청년연맹 사건, 도산 안창호 사건, 간도사건, 공명단(共鳴團) 사건, 조선공산당일본지부당원 사건, 경남청년연맹 사건 등의 공판에서 무료 변호하는 등 독립운동과 관련된 각종 대사건에서 무죄를 주장, 주권없는 국민의 권리 회복에 정열을 쏟았다.

이와 함께 선생은 조선 농민사 이사로 활동하면서 전국순회강연·초청강연에 나서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농민야학·공생조합운동·공동경작운동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에 이창휘는 김병로·허헌과 함께 ‘민권변호 삼총사’라고 불렸으며, 조선공산당 사건과 간도공산당 사건 등 사회주의 계열 운동의 변호를 많이 맡아 사상 변호사로도 이름을 날렸다.

1925년 10월 서울 기독청년회관에서 조선농민사가 결성될 때 김준연(金俊淵)·최두선(崔斗善)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었다. 제주출신유학생후원회 회장, 보성전문학교 교우회장, 조선변호사협회 회장 등을 지냈고 민중 계몽을 위해 전국 순회하면서 농민에게 필요한 법률상식 강연도 하였다.

고향에도 애정을 기울여 1929년에는 고산포를 정기여객선 기항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여 성사시켰으며, 1931년에는 고산우체국 설립 과정에도 힘을 써서 마을에서 우체국 앞에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었다. 공덕비는 수월봉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미확인)

연설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던 그는 1934년 가을 농촌계몽을 위한 순회강연 도중 9월 10일 함북 웅기읍의 한 여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38살의 나이였다.

건강하던 선생이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건이라 눈에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의 정보기관에서 암살했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장 목격자나 물증이 없어 영원히 의문 속에 묻혀 있다.

생가는 고산2리 1695번지 일곱ᄃᆞ르 마을이다. 이후 청소년기에 살았던 집은 고산2리 새동네(新洞) 1618-2번지(고산남8길7)이고 그 뒤편에는 형님이 살았다고 한다.(고산리 거주 고성훈씨와 190127 면담) 후손이 아닌 다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데 건물은 다 무너지고 이웃집에서 버린 쓰레기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옛 통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지사의 묘는 한경면 조수리 3838번지 全州李氏海安君派十三孫 嘉善大夫桂迪公後孫家族墓苑 안에 있다가 손자 이방헌씨가 2010년 10월 12일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옮겼다.

★이창휘 지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고산우체국 앞과 수월봉에 있었다는 기록들이 있으나 확인하지 못함.
《작성 19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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