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한국 독립의 달성 역설..하귀2리 박영순 지사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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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한국 독립의 달성 역설..하귀2리 박영순 지사 생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4.03.13 0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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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우리 고장 출신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하귀2리 박영순 지사 생가

위치 ; 하귀2리 1734번지(하귀미수동길54)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하귀2리_박영순_지사_생가


박영순(朴榮淳, 1916∼1947) 지사는 본관은 밀양, 朴漢俊의 장남으로 하귀리 1734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2년 동안 한문을 배우고 192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금구(金歐)소학교의 야간부를 졸업하였다.

그가 일본에서 화하류(靴下留)전기제작소에서 일하던 때 일본공산당 당원 김귀영(金貴榮 : 하귀)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 무산 아동에게 항일의식을 교육하는 것이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데에 강문일과 뜻을 같이하였다.

1933년 1월 병환으로 귀향하여 1933년 8월 야학을 설치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하던 중 1934년 12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하여 하귀리 1구에서 야학을 운영하던 김홍규(金弘奎), 김을봉(金乙鳳) 등과 張奎賢 집에서 회합한 후 두 야학을 통합하였다.

통합 후 60여 명의 학동들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인의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 독립의 달성을 역설하였다. 한편으로 학생들의 항일 의식을 효과적으로 고취시키기 위해 이천만가(二千萬歌), 혁명가, 단결가 등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1935년 5월 1일에는 야학생 80여명이 태극기와 어깨띠, 머리띠를 만들어 독립만세를 부르는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강문일, 박영순, 강창선, 강경생, 김홍규, 김을봉, 배두봉, 고붕익, 양군칠, 양군삼 선생 등 시위주동자들은 외도주재소와 제주경찰서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고, 그 중 강문일, 박영순 선생은 광주지방 경찰청 목포지청으로 이송되었다.

배두봉(裵斗鳳, 점원, 22), 강문일(25), 박영순(20), 김을봉(20), 김홍규(21) 등은 전협(全協)계 인물들이다.

1935년 8월 23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강문일·배두봉(裵斗奉)·김을봉·김홍규 등과 함께 구속·기소되었다.

1935년 10월 10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자 항소하여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기까지 미결수로 8개월여 동안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제주인물대사전) 2002년 우리 고장 출신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광복 후 사립단국(檀國)중학교 교사로 재임하다 1947년 정국이 혼란해지자 향리를 떠나 피신하였는데 세간에는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생가에는 유복자로 태어난 그의 막내아들 박성수(1947년생, 오현고 및 사관학교 출신, 소령 예편)씨가 거주하고 있는데, 일본으로 갔는지 국내 어디에서 살다 돌아가셨는지를 전혀 모른다고 하였다.

추정컨대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된 그가 3·1절 기념식에도 깊이 관여하였을 것이고, 이후 파업 관련 주동자들을 검거하는 상황에서 피신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족묘지에 선친의 추모비를 건립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작성 190203, 보완 1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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