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제주 최초 재상..아라1동 문경공고조기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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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제주 최초 재상..아라1동 문경공고조기 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03.06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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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잘못 문제 삼아 상소, 뜻을 굽히지 않는 충직한 청백리'

 

아라1동 문경공고조기 묘 (文敬公高兆基墓 )

 

문화재 지정 사항 ; 제주도 기념물 38호(1977년 7월 13일)
위치 ; 제주시 아라동 2464번지. 속칭 제궁동산

 

 

고조기(高兆基)는 고려 초기 문인이다. 정2품 관직인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와 판이부사(判吏部事)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제주 출신으로는 최초로 재상직에 오른 인물이다.

고을나의 48세손이며, 고자견(高自堅)의 3세손이고, 성주 우복야(右僕射) 고유(高維)의 아들로 고려 선종5년(1088)에 태어나 의종11년(1157)에 별세하였다.

어릴 적 이름은 당유(唐兪), 호는 계림(鷄林)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성품은 의롭지 못한 것을 보면 참지 못하였고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였으며 시에도 능숙하였다.


예종2년(1107) 19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남쪽 지방 고을을 다스릴 때는 청렴하여 칭송을 받기도 하였고, 많은 옛 서적을 섭렵하고 역사를 연구하여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인종7년(1129) 시어사(侍御史=정사를 논의하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백관을 감찰하고 탄핵하는 일을 하던 중앙 관청의 종5품 벼슬)가 되어 조정의 기강을 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 때는 탐라성주로 있다가 인종8년(1130) 하절사(賀節使 = 중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에 보내던 사신)로 금(金)나라에 다녀왔고, 탐욕스러웠던 권신 이자겸의 무리들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공부원외부(工部員外部)에 파천되기도 하였으나 그 후에도 조정의 잘못을 문제 삼아 상소를 거듭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않는 충직한 청백리였다.

이자겸(李資謙)이 승정(僧正) 자부(資富) 및 지수주사(知水州事) 봉우(奉佑)로 하여금 홍경원(弘慶院)을 수리하게 하였다. 그들은 주현(州縣)의 장정을 징발해 피해가 심하였다.

이자겸이 실각한 뒤 자부는 연좌되어 섬에 귀양갔으나, 봉우는 환관과 결탁해 벼슬자리를 누리고 있는 것을 상소해, 몇 차례 논박 끝에 임금의 뜻을 거슬려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으로 좌천되었다.

뒤에 다시 대관(臺官)이 되자, 이자겸의 일당이 제거되지 않은 것을 배척하고 파직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에 눌려 예부낭중에 임명됨으로써 대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의종1년(1147)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 1148년 정당문학판호부사(政堂文學判戶部事)가 되어 지공거(知貢擧)로서 유정견(柳廷堅) 등 25인의 급제자를 선발하였다. 이어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참지정사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가 되었다.


의종3년(1149)에 정당문학참지사(政堂文學參知事)가 되었다가 다시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 1150년 판병부사(判兵部事), 1151년 중군병마판사 겸 서북면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兼西北面兵馬判事)를 역임하였다.


고조기는 칠순의 노령으로 퇴임할 때까지 오직 충절과 청백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충절을 조정에서 인정하여 별세 후에는 수사공상주국(守司空上柱國)이라는 칭호를 주어 그 직위를 높여 주었으며, 당시 왕은 사흘 동안 조회를 멈추고 관원을 보내 문상케 하였고, 공을 기리어 시호를 문경공(文敬公)이라 하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던 공은 특히 오언절구가 뛰어나 묘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아름다운 한시를 남겼으며, 시집(詩集) 3권을 저술하였다.

그의 작품으로 「진도벽파정(珍島碧波亭)」 이라는 시가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고조기 묘는 제주도내 분묘 가운데 양식과 형태가 가장 양호한 상태로 남아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특히, 제주도내에서 무덤 속에 매장된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분묘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1977년부터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으며 매년 삼성 춘추 대제 전날인 4월 9일에 묘제를 지내고 있다.


묘는 북쪽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으며, 경내에는 묘비와 상석, 장군석, 동자석, 석등 등을 갖추고 있다.


묘의 전체적인 모양은 사각뿔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봉분 윗부분은 둥글게 마감되었다.

네 귀에는 각각 돌이 박혀 있는데, 이는 묘의 규모가 처음 조성 당시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음을 알아 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묘의 앞면 중앙 하단에는 반원 모양의 석판이 박혀 있고 석판에는 둥근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묘 주위에는 산담을 하지 않고 직육면체 모양의 돌기둥 17개를 1∼2m의 간격을 두어 세워 놓았다. 묘의 왼쪽에는 고조기시문비가 서 있으며, 오른쪽에는 ‘중서시랑고조기묘비’라는 글이 적힌 자그마한 비석이 있다.

《작성 041021, 보완 1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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