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시조 박혁거세 58세손, 제주도 입도 ..고내리 박승조망묘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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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시조 박혁거세 58세손, 제주도 입도 ..고내리 박승조망묘단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1.30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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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 때 온 막내아들 박자호는 제주 여인과 결혼, 제주에 남아 밀양박씨 연안공파 제주 입도조가 되었다

고내리 박승조망묘단비

 

위치 ; 애월읍 고내리 724번지. 애월읍 하가리 「고내촌」이라는 가게 옆 고내오름 입구에서 진주강씨묘역 표석 2개가 있는 곳에서 왼쪽 길로 7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 흙길이 나타난다. 곧 작은레이더가 보인다. 30m 전방에 큰돌이 가로놓인 길로 들어서서 100m 정도 숲길로 쭉 올라가면 정면에 남쪽을 향하여 보이는 가족묘지에 있다.
유형 ; 비석
시대 ; 조선

고내리_박승조후손묘역
고내리_박승조망묘단

 


전체 박씨의 도시조는 신라의 박혁거세이며, 밀양박씨의 시조는 밀성대군 박언침(朴彦忱)이고, 제주도에 입도한 사람은 시조 박혁거세의 58세손인 박승조(朴承祖 : 1564~1640)이다. 박승조의 자(字)는 효선(孝先)이고, 호(號)는 지지당(止止堂)이다.

박승조가 연안부사를 지냈다고 해서 밀양박씨 연안공파가 됐으며 밀양박씨(密陽朴氏) 규정공파(糾正公派) 31소파 중 하나인 연안공파(延安公派)의 파조(派祖)다.


종친회에 따르면 공(公)은 선대(先代) 가문의 공훈(功勳)으로 광능참봉(光陵參奉)을 시작으로 만경리아문도감(萬經理衙門都監), 낭청(郞廳), 한성참군(漢城參軍), 상의주부(尙衣主簿), 제주목교수(濟州牧敎授)를 지내고 삼등현령(三登縣令), 안산군수(安山郡守)를 역임하고 양양부사(襄陽府使)를 지냈는데 이 때의 치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광해군9년(1617년)에 연안도호부사 겸 해주진병마첨절제사(延安都護府使 兼 海州鎭兵馬僉節制使)로 나갔다가 1618년(光海10年 戊午) 봄에 친환(親患)으로 벼슬을 사직하고 도성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있자 광해군 때 영의정이던 박승종은 아들과 함께 자결하고 동생 박승조는 1623년 제주 곽지에 유배되었다가 인조13년(1637) 유배가 풀리고 출륙하였다. 하지만 유배올 때 데리고 온 막내아들 박자호는 제주 여인과 결혼하여 그대로 제주에 남아 밀양박씨 연안공파 제주 입도조가 되었다. 이는 제주 인물사를 다룬 대부분이 책자의 이야기다.


한편, 밀양박씨 규정공파문중과 후손들은 박승조의 유배설에 대하여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쓴 연안부사박공묘지명(延安府使朴公墓誌銘)을 근거로 박승조가 제주에 유배를 간 사실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신 박승조가 宣祖 대에 제주목 교수관으로 갔다가 제주에서 나주김씨를 만나 박자호를 낳았으며, 이로 인해 박자호가 제주의 입도조가 되었다고 보고 있다. 종친회 입장에서는 박승조는 유배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곽지에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제주목 성안(옛 제주대학교병원 터 인근)에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밀양박씨연안공파제주도종친회에 따르면 배위(配位)는 초취부인(初娶夫人)은 함열남궁씨(咸悅南宮氏)로 직장(直長) 식(湜)의 따님인데 소생이 없이 조졸(早卒)하여 후취부인(後娶夫人) 능성구씨(綾城具氏)를 맞이하니 사헌부 감찰(監察) 극인(克仁)의 따님이다. 또 다른 배위(配位)가 있으니 나주인(羅州人) 첨정(僉正) 위남(衛南)의 녀(女)라고 한다.

나주김씨가 박승조와 결혼하여 자호를 낳았다는 말이다.


공(公)의 묘소는 처음에 천안땅 한적골 은적산(隱跡山) 언덕에 장사 모셨다가 英祖26年(1726) 봄에 충청도(忠淸道)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 모항리(茅項里) 간좌(艮坐) 언덕으로 이장(移葬)하였으나, 2006년(丙戌) 10월 29일에 다시 대곡리 한적골 뒷동산 묘좌(卯坐) 언덕으로 옮겨 두 분 배위(配位)를 합폄(合窆)하여 모셨으니 공(公)의 묘역(墓域) 일대가 신행정복합도시로 변모하여 수용됨에서였다.


아들 박자호의 묘는 오늘날의 오현고 정문 인근에 위치하다 지난 1907년 고내봉에 이묘됐다. 애월읍 고내봉에는 현재 밀양박씨 연안공파 제주 입도조 묘역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묘역에 박승조를 기리는 통정대부연안부사박공승조망묘단비가 세워져 있다.

이 망묘단비는 한학자 이응호가 1945년 봄에 썼다고 기록돼 있다. 망묘단비 옆에는 숙부인나주김씨지단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나주김씨의 묘는 실묘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에 유배와 제주 여인 홍윤애와 비극적인 사랑을 했던 조정철의 딸은 박승조의 후손인 박수영과 혼인했으며 홍윤애의 묘는 밀양박씨 후손들이 돌보고 있다.(밀양박씨연안공파제주도종친회, 디지털제주문화대전, 제민일보 100719)


망묘단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壇在濟州文廟之後麓善斗原如其望墓名者 見于禮曾子問則後仍成俗而按唐宋詩 可憐江浦望 及遠人無墓水頭祭 是與 朴公諱承祖 字孝先 本新羅國姓 而系密城大君諱彦忱 是司憲糾正鉉之後 曾祖駱村文貞公大提學忠元 祖灌園文莊公大司馬啓賢 考同敦寧凝原君安世 妣昌原黃氏
明宗甲子生 公歷官五郡 而至延安府使 有淸白之風再庚辰卒 葬燕岐郡茅項里 ○萬曆間 公敎授于玆 繼配羅州金氏 僉正衛南女 生子自好遂爲濟人一派 金氏墓州西高內山內 自好生戒先戒珍戒一 由是族大 乃如顯名者 茂種 僉正弼普蒙孝褒 弼哲參議 弼喜巡將 師悌萬戶 師黙秀正並司直 秀龍文科掌令 師信賓興 尙信 秀均 敬禧 恒連 致信 並武及第也
日朴明效昌赫君委訪于望墓 禮對曰 追念我宋子引韓子題楚昭王廟詩 而立萬東廟於朝鮮 以明尊周之大義 豈徒然哉 歷推璜古事 固多詩禮相仍 然此則非吾所知也 且如今碑役 惟昌赫自任經費 而追孝先世 不亦善乎 但祭如在則衆孫可不敬與 吁 所命壇記 苟非其人 而至如禮俗相交 以望于治世君子云素王二四九六乙酉仲春 儒薦廟正李膺鎬述 後學宋錫耈書
幹事 昌禧 佐基 致龍 昌浩 永玉 昌宇 海仁 雲漢 斗玉 性彦


단은 제주향교 뒷기슭 선두원에 있다. 망묘라 이름지은 것은 예기 증자문 편에 보이는데 뒤에 좋은 풍속이 되어서이다. 唐과 宋의 시에 보면 ‘강포에서 바라보려니 가련하구나. 멀리 떠난 사람 묘가 없어 수원에서 제를 지내네’가 그런 내용이다.


박공의 휘는 승조이고 字는 孝先이다. 本은 신라왕의 성씨이며, 밀성대군 휘 언침의 系로 사헌규정 鉉의 후예이다. 증조는 낙촌 문경공 양관대제학 忠元이고, 조부는 관원 문장공 대사마 啓賢이다. 부친은 지돈녕 응원군 安世이고 모친은 창원黃씨이다.


明宗 甲子(1564)에 태어난 공은 다섯 군의 관직을 지내고 연안부사에 이르러 청백한 풍도로 재인하였는데 1640년에 졸하여 연기군 모항리(=고정리 모항골)에 장사지냈다.


공은 만력 시대(조선 宣祖 때)에 이곳에서 교수를 지냈는데 둘째 부인 나주김씨는 첨정 위남의 딸로 아들 자호를 낳아 드디어 제주의 한 파가 되었다. 김씨의 묘는 제주 서쪽 고내봉 안에 있다. 자호는 계선, 계진, 계일을 낳았다.

이 때부터 씨족이 커져 이에 이름을 드날린 사람은 무종이요, 첨정 필보는 효자로 표창되고, 필철은 참의, 필희는 순장, 사제는 만호, 사묵, 수정은 모두 사직이고, 수룡은 문과급제로 장령이며, 사신은 빈흥이고, 상신, 수균, 경희, 항련, 치신은 모두 무과급제하였다.


하루는 박명효와 창혁 군이 망묘기를 부탁하러 방문하므로 예를 대답하여 말하기를 “추념하는 것은 우리 나라 송시열이 한유가 지은 ‘題楚昭王廟’의 시를 인용하여 조선에 만동묘를 세워 존주의 대의를 밝혔듯이 어찌 부질없는 일이겠는가”고 하였다.


중국과 우리 나라의 고사를 밟아 탐구하면 참으로 많고 시경과 예기에도 자주 나오는데 이런 고사를 내가 말할 것은 못 되는 것이다. 더구나 단비를 세우는 일에 오직 창혁이 스스로 경비를 자임하여 先世를 추모하는 효는 역시 착하다 아니하랴.


다만 제를 지내면서 만약 있어야 할 것이라면(이것이 없음으로 해서) 여러 자손은 불경스러워 하리라. 아! 그래서 단기를 지으라고 부탁하므로 진실로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되지만 예속에서 같이 서로 사귀었기에 태평한 시대의 군자를 우러러보면서 언급하였노라.


孔子2496 乙酉 2월 봄 유천묘정 이응호 짓고 후학 송석구 씀.(해석 ; 김익수)
《작성 12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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