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단본(單本), 우리나라 성별 인구 제69위..외도1동 거창신씨입도조愼明麗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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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단본(單本), 우리나라 성별 인구 제69위..외도1동 거창신씨입도조愼明麗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2.01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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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신씨 시조 공헌공(恭憲公) 신수(愼修)는 송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 고려 문종 때 귀화, 학식이 깊고 의술에 능했다.

외도1동 거창신씨입도조愼明麗묘

 

위치 ; 제주시 외도1동 1046번지. 애조로와 광령북7길이 만나는 교차로에서 서쪽으로 난 좁은 길(제시리길)로 광제사 방향으로 200m 정도 가면 길 서쪽에 붙은 묘지가 있다.
유형 ; 묘
시대 ; 조선

외도1동_거창신씨입도조신명려묘

 

신(慎)씨는 귀화 씨족으로 거창이 단본(單本)이며 우리나라 성별 인구 중 제69위에 속하는, 상당히 유서 깊은 명문의 하나로 귀성(貴姓)이다.

거창신씨 시조 공헌공(恭憲公) 신수(愼修)는 송나라 개봉부(開封府) 사람으로 고려 문종 때 귀화했는데 학식이 깊고 의술에 능했다.

고려사 문종22년(1068) 8월에 ‘정사에 태자에게 명하여 宋의진사 신수, 진잠고, 저원빈 등을 불러 옥촉정에서 시부를 보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숙종6년 2월에는 '참지정사로 치사한 신수가 졸하니 사자를 보내어 조제하고 익호를 공헌공이라 하였다.

신수는 宋人인데 자못 학식이 뛰어나고 더욱이 의술에 정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075년 시어사(侍御史)가 되고 숙종조에 이르러 수사공(守司空) 우복야(右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국왕이 시호를 공헌(恭獻)으로 내렸으므로 이후 거창신씨는 모두 공헌공의 자손이라 이르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안지(愼安之)는 문종 때 병부상서, 지수주사(知水州事)를 지냈으며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고 특히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중국에 보내는 공문서 관련 일을 맡아 처리했다고 전한다.

이 때부터 가문은 고려의 귀족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고 그 후 7세 집평(執平)은 고종 때 대장군에 올랐으며 신호위대장군, 동북면병마사가 되어 대장군 윤관과 함께 몽고군의 침략에 항전하다 부하인 조휘, 탁청에게 처절한 죽음을 당했다.(조휘와 탁청은 곧 몽골에 항복하고 뒤에 쌍성총관부 책임자로 몽골의 충실한 개가 되었다)

얼마 후 조정이 친원파에 의해 장악되자 신(慎)문은 반원파로 지목되니 8세 성(成)이 거창으로 낙향하여 본관을 거창으로 삼게 되었다.


시조부터 독자로 이어오다가 우왕3년(1377) 연방시(蓮榜試)에 급제, 세종조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와 형조판서(刑曹判書), 판이주현사(判利州縣事), 우찬성(右贊成)을 지낸 13세 이충(慎以衷)에 이르러 기(幾), 언(言), 전(詮) 세 아들을 두어 아들 3형제는 중시조나 다름없는 공고한 가세를 형성해 3파를 형성하면서 가문은 발복하게 되었다.


제1파는 태종 때 문과에 올라 전라도관찰사가 된(通政大夫로 吏曹佐郞에 오른, 조선 세종 때 예조참판을 지낸) 신기(愼幾)를 파조로 하는 완백파(完伯派)(참판공파), 제2파는 신기(愼幾)의 아우 신언(愼言)을 파조로 하는 서령공파(署令公派), 제3파는 세종11년(1429) 문과에 올라 단종 때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신전(愼詮)을 파조로 하는 해백파(海伯派)=양간공파(襄簡公派) 등 세 파로 나뉘었다. 이후 거창 신씨 후손들은 크게 번창함과 동시에 출중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다.


거창신씨 제주 입도조는 제1파 참판공(參判公) 신기(愼幾)의 제2자인 신후갑(愼後甲)의 현손이며 시조의 18대손(=19세손, 디지털제주문화대전에는 20世孫으로 기록됨)인 신명려이다. 부친 居詳의 두 아들 중 작은아들이다.(자료에 따라 입도조를 비롯한 후손들의 代數가 다른데 비문에 나온 것은 비문을 기준으로 하였음)


신명려(愼明麗)는 어떤 신분과 동기에서 제주도에 들어왔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시기는 인조6년(1628)으로 후손들은 보고 있다. 그 전해인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나라 안이 전운으로 뒤덮이게 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일가를 보호하기 위해 안전지대를 택하여 당시 제주목 화북포로 입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관측이 유력하다.


신명려는 제주도에서 새 생활의 터전을 마련 후 세 아들을 얻었다. 맏이 신경보(愼景寶)는 화북에 눌러 살고, 둘째 신경화(愼景曄)는 김녕에, 막내 신경한(愼景漢)은 신촌에 각각 근거를 잡아 삶의 터전을 마련하였다.

제주에 낙향 입도 후 처음으로 등과한 사람은 무과에 급제한 신명려의 6세손인 신인해(愼仁海)이다. 입도조 신명려의 9세손인 신상흠(愼尙欽)은 순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정의현감과 예조좌랑,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문장에도 이름을 날렸다.


참고 ; 디지털제주문화대전(집필 김동전), 한국족보자료시스템, 거창신씨대종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카페 거창연가

입도조묘 서쪽에는 장손 相俊 부부의 묘가 있다. 제주에 약 2백여 가구, 1천여 명이 분포하고 있으며 제주시 화북동, 조천읍 신촌리, 서귀포시 법환동 등에 씨족이 모여 산다.

비문 앞면 處士居昌愼公明麗之墓孺人耽羅高氏附左
좌측-뒤-우측면 《公諱明麗系居昌愼氏始祖恭獻公諱修之十八代孫單傳十三世襄烈公諱以衷之六代孫參判公諱幾之五代孫大諫公諱後甲玄孫參奉公諱自治曾孫通訓公諱克枰孫考諱居詳妣羅州林氏二子出生公濟州入島祖也 配耽羅高氏生三男長房景寶仲房壽通政景曄季房景漢 公忌三月二十五日 配忌十二月十二日也 長房孫相俊… 仲房孫… 季房孫… 九代孫以下不記 公塋外都境廣寺坪午坐 配附左双窆 西紀一九九四年淸明節 十一代孫禎根謹書 戊辰譜依據 後孫一同 謹改竪立》
비문 중에 長房, 房孫 등 房자가 여러 번 나오는데 이는 宗族分支單位이며, 嫡子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작성 121225, 보완 1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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