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영남학파 전통 계승한 지식인.. 삼도2동 간옹이익적거터(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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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영남학파 전통 계승한 지식인.. 삼도2동 간옹이익적거터(멸실)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1.10.24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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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객이 제주여인과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이름에 제주를 뜻하는 '제(濟)'나 '영(瀛)', '탐(耽)'자를 쓴다

삼도2동 간옹이익적거터(멸실)

 

위치 ; 삼도동 관덕정 서쪽 중앙한의원 바로 앞 주차 코너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시대 ; 조선
유형 ; 위인선현유적(유배생활 터)

 

삼도2동_이익적거터

 


이익(李翼)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선조12년(1579)에 태어나 인조2년(1624)에 사망하였다. 사망 후 전한(典翰)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여함(汝涵)․형여(泂如), 호는 간옹(艮翁)․옥포(玉浦). 아버지는 판관 유일(惟一)이며, 어머니는 참봉 민덕룡(閔德龍)의 딸이다.

광해군4년(1612)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익 집안에는 그가 사마시(소과)에 이어 식년(식년시·대과) 을과에 연달아 장원급제해 받은 교지(사령장)가 전해지고 있다.

실제 방목(과거 합격자 명부)에는 그가 조정에서 3년마다 시행하는 문과 정기시험이자 합격 정원이 33명에 불과한 식년시에 을과 1위로 장원급제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곧 검열에 등용되고, 1615년 전적에 승직되었다. 그 뒤 사서․정언․헌납․지평․장령․예조정랑․병조정랑을 거쳐 직강을 역임하였다. 이익은 이황의 수제자인 정구와 절친했던 사이로 영남학파의 전통을 계승하는 지식인이었다.

광해군7년(1615) 5월 정언의 직책에 있던 이익은 광해군의 실정을 논하면서 상소를 올렸다.


“신은 영남의 외톨이로 외람되이 분수에 넘치는 직분을 받고 보니, 하늘과 땅처럼 높고 두터운 성은이 망극하여, 한 번 미충(微衷)을 바쳐 만에 하나라도 보필하고자 하였으나, 교분은 얕은데 심각한 말을 하는 것을 옛사람이 경계하였으므로 머뭇거리고 말을 못하여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직숙에 대한 명을 받고 감히 사퇴할 뜻을 말씀드리면서, 어찌 한 마디 아니하여 성상께서 맡겨주신 책임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대관(臺官)은 간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오로지 언론이 그 책임이며, 다른 일로 대관에게 맡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사람들이 자신을 아껴서, 한결같이 입을 다물고 앞다투어 장마(仗馬)를 경계합니다.

이에 단지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영합하여 비위나 맞추는 거리가 되고 있으니, 스스로 그 도리를 잃음이 심합니다. 성상께서 우대할 수 없어서 직숙이나 하는 곳으로 내모는 것도 결국은 신들이 스스로 취한 것입니다.

선수(繕修)의 명이 내린 날을 당하여 양사가 합계하는 거조가 있었으니, 무슨 일인가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질책이 한번 떨어지자 그만 멈추어 버리고 말아,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물욕에 끌려다니는 뜻을 기르게 하여 간언(諫言)을 물리치는 마음만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양사에 관원이 많으나 어찌 사람이 있다 하겠습니까. 지금 말라 타들어가는 땅이 천리요, 굶어죽은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여,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게 될 참화가 불행히도 가까워 오는데, 흠경각(欽敬閣)의 역사가 끝나기도 전에 양궁(兩宮)의 거둥이 잇따라 있었습니다.

이에 하늘이 위에서 노하는데도 걱정하지 않고 백성이 밑에서 고통받는데 돌볼 줄 모르며, 와르르 무너질 환난이 조석에 닥쳤는데도 느긋하고 데면데면하여 책임만 때우고 있으니, 옛날의 이른바 임금에게 어려운 일로 채근한다는 것이 과연 이런 것입니까.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지금 8년이 되었으나, 한번도 경연을 열어 도를 강론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니, 궁첩과 환관들이 얼마나 성상의 마음을 흔들어댈 것이며, 신하들과의 거리가 어찌 천리만 되겠습니까.

천지의 기운이 서로 만나 화합하여 비가 내리고, 위와 아래가 서로 접하여 성의가 미덥게 되는 법이니, 해마다 닥치는 혹독한 가뭄이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구중궁궐에 깊이 있으면서 눈 앞에 닥친 재앙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찌 이와 같기만 할 뿐이겠습니까. 궁중이 엄하지 못하여 안팎이 결탁해서 태아(太阿)의 칼자루가 이미 거꾸로 잡히었고, 사사로이 바치는 것이 줄을 잇는데 다투어 서로 본받아 민생(民生)의 곤궁함이 날로 더해지고 있습니다.

그 밖의 구제하기 어려운 병폐들이 하나같이 그러해서 이미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도 수수방관하고 구제하여 바로잡을 생각이 없는 것은, 실로 한 번 엄위(嚴威)에 저촉하고는 목숨이 아까워서 직분을 버리지 않을 수 없음에 연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상을 저버린 죄가 어찌 적다 하겠습니까. 대간이 스스로를 상실함이 이와 같으니, 성상께서 대간으로 보지 않으시고 돌아가며 직숙이나 시키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천명이 이미 결정되어 인간의 작위를 용납하지 않아서, 화란의 밑둥이 이미 제거되었으니 특별히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필 금방(禁防) 같은 말단에 매달려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한단 말입니까. 임금이 세상을 임어(臨御)하는 도리는, 마음을 한결같이 바루어 뭇 의혹을 진정해서 나라 기강의 바탕을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실로 그 도리를 잃는다면, 아무리 대간들을 모조리 수직하는 병졸로 삼은들 거기에 무슨 경중의 차이가 있겠습니까.

신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자연 언론의 책임이 있으니, 멋대로 스스로를 가볍게 할 경우 조정을 욕되게 하는 데는 어쩌겠으며 물의를 빚는 데는 어쩌겠습니까. 결단코 명에 따라 달려나가서 성명에 누를 끼칠 수 없습니다. 빨리 신의 죄를 다스리어 교만하고 공손치 않은 버릇을 바로잡으소서.”

여기서 장마(仗馬)란 임금의 의장(儀仗)으로 세워두는 말이다. 당나라 때 이임보(李林甫)가 19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권력을 휘둘러 간관들이 감히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보궐(補闕) 두진(杜璡)이 자기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은 의장용으로 세워 둔 말을 보지 못했는가? 하루 종일 소리가 없으면 실컷 잘 얻어먹지만, 한 번만 소리내어 울면 내쫓아 버린다. 그런 뒤에 안 울려고 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래서 간쟁하는 길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했다.

《신당서(新唐書)》 간신전(奸臣傳) 이임보(李林甫). 봉록만 타먹으면서 화가 두려워 간언을 못하는 벼슬아치를 빗대어 하는 말이다.

문제가 된 말은 태아의 칼자루란 표현이었다. '태아(太阿)'는 중국 고대 의장(儀仗)에 쓰던 칼(보검)의 이름이다. 구야자(歐冶子)와 간장(幹將, 干將)이 함께 만든 것으로 용연(龍淵), 공포(工布)와 더불어 명검으로 불린다. 이는 권력을 뜻하는 것으로 후한시대 역사서 '한서'에는 칼(太阿)을 거꾸로 잡고 그 칼자루를 초나라에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太阿倒持 또는 倒持太阿라고 하여 임금이 신하에게 권력을 맡기고 도리어 신하에게 해를 입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이런 내용의 상소를 접한 군왕의 입장에서는 이익에게 반역죄를 물을 수도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임진왜란 와중에 세자로 책봉돼 왕좌에 오른 광해군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증살(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임)하고, 영창대군 어머니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비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사간원 정언(정6품)이었던 이익은 군왕의 부도덕함과 외척 전횡을 조목조목 상소해 언관의 직분을 다했지만 사형 위기에 처해진다.


광해군일기에는 상소문을 접하고 분노한 광해군이 '태아의 칼자루가 이미 거꾸로 잡히었다는 말이 누구의 무엇을 가리켜 한 말인지 이익에게 물어서 아뢰라'며 수차례 심문을 요구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이익은 ‘안팎이 결탁해서 태아의 칼자루가 이미 거꾸로 되었다.’는 등의 말은, 역시 여항에서 보통 하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지금 척완(戚畹) 중에 임금께서 의지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므로, 그것이 꼭 어느 누구라고 지적해서 신의 마음을 속이고 전하를 기망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예로부터 언관의 논의가 더러 과중함이 있더라도 밝으신 군주가 그것을 죄삼지 않고 도리어 너그러이 수용한 것은, 진정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로가 막혀서 나라가 제대로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조선왕조실록 광해7년(1615) 5월 20일 기사)

광해군의 엄명으로 의금부와 사헌부에서 문초를 받던 이익은 영의정 기자헌이 거듭 상소문을 올려 목숨만은 건지게 된다. 정6품에 불과한 이익을 위해 영의정이 구명운동을 벌이고 임금이 이를 받아들인 사실은 그가 그만큼 청렴강직하고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실제 그는 생원·진사시(소과)와 문과(대과)에 급제하고 3년 만에 사간원 정언이 된 것으로 전해질 만큼 당대 최고의 수재로 평가받았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이익은 1617년 제주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이듬해 유배된다. 유배형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위리안치는 가족 동반 자체를 금지시키고, 집 주위에는 가시울타리를 둘러 감옥살이나 다를 바 없는 감금과 격리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반역죄 등 무거운 죄를 짓고 국왕의 노여움을 산 왕족이나 관료들에게 가해지던 중형을 이익도 피할 수 없었다.


이익이 제주에 유배될 당시 제주목사는 후일 인조반정에 참여해 광해군을 폐위시킨 데 이어 반정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반란을 일으키고 한양까지 점령한 무관 이괄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이익이 제주에 유배되자 제주목관아 서쪽에 이익의 거처를 얻어주고 동몽교관(아이들을 가르치는 벼슬·종9품)으로 삼아 특별대우했다.

관아에 부속된 학교에서 벼슬아치와 지역 유지들의 자녀 중에서도 뛰어난 영재들을 가르친 것이다. 일반인과 접촉을 금하는 유배인에게 벼슬을 내린 것은 그가 반정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이익의 작은아버지가 북병사(병마절도사·종2품)인 데다 사촌이 후에 우의정까지 오른 이완 대장이었으며, 이익의 학식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제주에는 훗날 제주사람들에 의해 '오현'으로 추앙된 동계 정온과 송상인이 유배돼 있었다. 이익이 제주 유배 당시 기록한 '간옹집'에는 이들과 시문을 교환하며 유배생활의 외로움을 달랜 사실이 기록돼 있다.


그는 적소에서 성리학을 연구하고 밤새도록 꿇어앉아서 독서에 열중하였으며 취미로 거문고도 배웠다. 그러면서도 지방 유생들을 훈학하였다. 김진용, 고홍진, 문영후와 같은 걸출한 제주도 사람들을 문하에 배출함으로써 제주도의 문교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고홍진과 김진용은 마침 이익이 유배오면서 데리고 온 장남 이인실과 비슷한 나이여서 서로 자극을 주며 학업에 정진할 수 있었다. 고홍진은 현종7년(1666) 문과 병과에 급제했으며 당시 전국 28명의 급제자 중 제주에서는 고홍진과 함께 문영후와 문징후가 포함됐다.

고홍진은 이후 조선 유학의 교육을 맡아보던 성균관에서 학생을 지도하는 전적(정6품) 벼슬을 받기도 했다. 김진용은 역시 사마시에 급제한 뒤 숙녕전(왕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신위를 모시는 전각) 참봉(종9품)에 제수됐지만 귀향했다.


첫 부인이 자식 없이 사망하고, 아들 인실과 딸을 낳은 둘째 부인도 상소문 사건이 나던 해 세상을 떠나 혼자였다. 유배 온 이듬해 김만일의 딸 경주김씨를 배필로 삼은 그는 차남을 낳고 인제(仁濟)라 이름을 지었다.

일부 관리나 유배객이 제주여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이름에 제주를 뜻하는 '제(濟)'나 '영(瀛)', '탐(耽)'자를 쓴 것처럼 인제의 이름에도 제주를 기억하는 '제'를 넣었던 것이다. 인제는 훗날 훈련원(무예 연습 따위를 맡아보던 관아) 판관(종4품)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경주 이씨 국당공파(菊堂公派) 제주입도조가 된다.


8년 후 유배가 풀려 귀향한 이익은 제주목의 처자는 그대로 두고 홀로 떠났지만 제주에서 장가들어 얻은 자식의 존재를 친지들에게 당당히 밝힌다.

영의정 최석정이 지은 이익 묘비명 중 "세 번째 장가들어 훈련원 판관 인제를 낳았는데 이는 유배 때 출생했다"는 글과 이익 손자가 작성한 가장(조상의 행적에 관한 기록)에 "헌마공신 만일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 인제를 낳았는데 제주적거 때 출생했다"는 내용이 그러한 사실을 입증한다.

유배가 풀리면 현지에서 만난 여인과 자식까지 버린 상당수 유배인과 달리 그는 아들을 호적에 올렸으며, 이후 김진구와 김춘택 등 제주에 유배 온 지식인들은 그의 후손과 제자들을 찾아가 사제지간을 맺어 이익이 형성한 학맥을 이어갔다.


제주도에 형성된 이익의 가계는 지금의 제주시 오라동을 중심으로 제주도 문교 발전에 남다른 공헌을 하였는데 증손인 이중발과 현손인 이수근은 정시에 급제하였으며 구한 말의 이기온과 그의 아들 이응호는 당대 제주 유림을 대표하는 강골들이었다.

특히 이기온은 척사 위정의 거두였던 최익현이 제주도에 유배를 오자 그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으며, 이응호는 또 다른 척사위정의 거물 기정진과 인연을 맺고 집의계를 결성하는 등 가계로부터 계승된 지식인의 비판주의적 태도를 올곧게 보여준다. 지금 제주시 연동에 있는 (구)북제주군청 앞 문연사(文淵社)는 원래 이기온에게 교육을 받아 은혜를 입은 광산 김씨와 제주 고씨의 문중에서 그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제사지내던 곳이다.


이익은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다시 사헌부 장령 등에 임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가 궁궐을 점령할 때 대장으로 나선 이가 이익을 동몽교관으로 발탁한 제주목사 출신 이괄이다. 그 뒤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도성을 버리고 대신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가는데 이익은 행재소(임금이 궁을 떠나 잠시 머무는 곳)에 늦게 나타났다는 이유로 삭탈관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624년 4월 충주 고향집에 머물던 이익은 말발굽에 치어 마흔 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한다. 4년 6개월 동안의 유배에서 풀려 돌아간 지 11개월 만의 일이다.


당시 경주김씨와 제주에서 낳은 아들 인제는 제주에 살고 있었다. 인제가 네 살밖에 되지 않아 경주김씨와 인제는 이익이 정착한 후일 상경을 기약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익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인제는 형 인실과 교류하고, 무과에 급제해 서울에 올라가 훈련원 판관(종5품)까지 지내게 된다.

이익 집안은 임진왜란 이후 명가로 자리잡아 이익과 장남 인실의 묘갈명(묘비명)은 각각 영의정 최석정과 우의정 윤증이 지어준다. 숙종 임금의 손위 처남 김진구도 이후 제주에 유배 왔을 때 이익 손자 이윤과 벗으로 사귀어 가깝게 지낸다.

이윤의 아들 중발과 중성 형제는 김진구 밑에서 유학을 공부했으며, 중발은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과 교분을 맺기도 한다.(엠파스한국학지식, 한라일보 120109, 120116, 120206)
《작성 120922, 보완 121220, 15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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