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서우봉 북녘 기슭 바닷가 쇠발콥 부근 언덕..함덕리 초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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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서우봉 북녘 기슭 바닷가 쇠발콥 부근 언덕..함덕리 초제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7.20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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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불렀더니 시신이 그에 응하여 올라왔다는 데서 초제탄이란 지명 유래

함덕리 초제탄

위치 ; 함덕리 2664번지의 바닷가. 서우봉의 가장 북쪽 끝 부분.

시대 ; 조선 후기(1879)
유형 ; 위인선현유적

함덕리_초제탄위치

 

이락당 이계징(1840∼1914)은 본시 맨둔지(매촌, 도련2동)사람으로 효자요 명필, 성리학자로 유명했다. 그는 한말에 함덕리로 옮겨 이 마을에서 훈학하며 마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일화도 남겼으며 말년에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부(古阜)이씨벽동공파 홈페이지에 따르면 이계징은 고부이씨 시조 문헌공 이경조의 36대손이며 제주 입도 시조 이세택으로부터는 13대손이 된다.

이세택의 조부 이충남은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을 지낸 다음 제주판관으로 도임한 것이 제주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되며, 이충남이 임기를 마치고 육지로 떠났지만 이세택은 남아 고부이씨 세택공파의 시조가 되었다.

이계징은 헌종 때 사람으로 당시 조선 4대 성리학자의 한 사람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배웠다. 필법은 당시 유행했던 이군암법을 배웠고 또한 후학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으나 말년에는 그 자신이 독특한 부운유수체를 창안 명필로 이름을 떨쳤다.

이율곡의 이기론을 익히고 신봉한 이계징은 제주뿐 아니라 전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로 추앙된 바 있어서 신임 목사나 판관이 도임할 때마다 찾아뵙고 문안을 드리고 강론도 받았다. 항상 청빈한 생활로 학문에 몰두한 그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덕행을 실천했다. 또 벼슬을 멀리하고 유생교육에 힘썼다.

그의 스승 기정진이 그의 손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년생)을 제주에 보내어 이계징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게 한 것만 보아도 이락당의 학문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함덕의 해변가에서 학당을 열었는데 군자의 도를 닦는 도장인 학당은 청렴을 근본으로 한 목민지덕을 키우는 것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하여 육중하고 해묵은 기와집을 헐어 간려한 초가 지붕으로 개축한 다음 문하생을 가르쳤고 또한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을 때도 혼자만 먹을 수 없다 하여 소매에 싸다 부모에게 드리는 지극한 효성이 있었다.

이계징(李啓徵)은 안달삼(安達三), 김희정(金羲正), 고영흔(高永昕)과 더불어 신촌리 매계 이한우의 제자이다.(양진건 글) 如 小栢安逹三 二樂李啓徵 海隱金羲正 石湖高永昕 諸賢 亦皆出於門下 소백 안달삼 이락 이계징 해은 김희정 석호 고영흔 같은 여러 어진이들이 또한 문하에서 나왔다.(매계이선생유허비)

효자 이계징(李啓徵) : 도련리. 부모봉양, 사후 묘소호곡. 1906년(광무 10) 정려.(홍기표, 「조선시대 제주 정려비(旌閭碑)에서 읽는 사회예절교육」)

『우리나라 으뜸마을 함덕리』에 따르면 이락당(二樂堂)이란 호는 스승 노사(蘆沙)가 내린 것인데 이는 맹자(孟子) 진심(盡心)편 20장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 중의 2가지 락(樂) 즉 君子有三樂(군자유삼락, 군자에게 3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父母俱存兄弟無故一樂也(부모구존형제무고일락야, 양친이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째 즐거움이요) 仰不愧於天府不怍於人二樂也(앙불괴어천부불작어인이락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고 굽어보아도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둘째 즐거움이요) 得天下英才而敎育之三樂也(득천하영재이교육지삼락야, 천하의 영재와 더불어 교육하는 것이 셋째 즐거움이다)에서 뽑은 것이다. 스승은 그를 2락을 갖춘 선비로 인정했던 모양이다.

이계징의 詩


喜雨(단비)


白雲疊疊覆峰千(흰 구름 첩첩 천 봉우리 덮고)
大地喜雨下沛然(대지에 반가운 비 줄기차다.)
晴後勤耕南山田(비 갠 후에 남산 밭 부지런히 가는데)
老農聽蛙占豊年(늙은 농부 개구리 소리 듣고 풍년을 점치네.)

麥秋(보리 수확)


五月南郊至麥秋(5월 남쪽 들에 보리 추수하니)
黃金秀色日邊流(황금빛 아름다운 경치 하늘가에 흐른다.)
穀鳥聲聲催時後(뻐꾸기 소리 농사철 재촉하니)

農家事事作山頭(농가 일 들녘마다 바쁘네.)

이계징의 일화

①날래 담는 법을 책에서 찾음

이락당이 나이들었을 때 그의 며느리가 하루는 마당에 곡식 날래를 널어 놓고 바다에 물질을 가면서 비가 오면 날래를 담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닭당은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이 어둑해지면서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여 부지런히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루리 책을 뒤져도 소나기 올 때 날래 담는 법은 책에 나오지 않았다. 그 동안 곡식은 다 젖고 심지어는 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물질에서 돌아온 며느리가 보니 시아버지는 그 때까지도 책만 뒤지고 있었다. 문장으로는 이태백이 부럽지 않을 정도였지만 생활은 너무나도 서툴렀다.

②쇠 짐 기운 데 돌 받치듯

하루는 밭에서 소에 짐을 싣는데 아무리 해 봐도 짐이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었다.그는 궁리 끝에 큼직한 돌멩이를 가져다 기울어진 쪽 소의 발에 받쳤다. 그래도 짐이 발라지지 않아서 한참을 실랑이하고 있을 때 동네 아낙네가 이 모습을 보고 소의 발 밑에 고여 있는 돌멩이를 꺼내어 짐이 기울어진 반대편에 찔러 넣었다. 그러자 기울었던 짐이 반듯해졌다.

그걸 보면 이락당은 ‘하아, 여자지만 궁리가 빠르네.’하고 감탄하였다. 이 일화에 따라 지금도 함덕리 사람들은 임기응변의 미봉책을 쓰는 사람을 보면 ‘이락당 쇠 짐 ᄐᆞ라진 디 돌 받치듯 한다’는 말을 한다.

③사름 아니라는 욕

이락당의 며느리가 억울한 일이 있어 시아버지에게 청원을 했다. 이락당은 일어나서 그 집에 다녀오더니 며느리에게 말했다.
“내 그 사름에게 되게 욕을 하고 왔노라.”
며느리가 궁금하여 여쭈었다.
“무시거옌 욕을 ᄒᆞᆸ디가?”
“사름이 아니옌 욕을 했주.”

④초제탄(招弟灘)

이계징은 효자였을 뿐 아니라 형제간에도 우애도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의 아우 이후징이 고종16년(1879) 10월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해난사고를 당했다. 그들 가족들은 동내 사람들을 동원하여 며칠이나 바닷가를 수색작업으로 돌았으나 시체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동생의 사고 후 단식을 하며 가슴 아파하던 이계징은 서우봉 북녘 기슭 바닷가 쇠발콥 부근 언덕으로 가서 바다를 향해 ‘후징아, 후징아∼!’하고 소리 높여 불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때 멀리서 수면에 하얀 것이 떠올랐다.

그것이 물결에 밀려 가까이 떠왔는데 내려가서 보니까 해난사고로 죽은 동생 후징의 시체였다. 어두워 오는 산기슭으로 동생의 시체를 업고 집으로 돌아온 이락당은 그 후 삼일 동안을 동생의 시체와 함께 마치 생시처럼 자고 이야기하고 했다. 그리고 난 뒤 동생의 시체를 묻었다. 동생을 불렀더니 시신이 그에 응하여 올라왔다는 데서 초제탄이란 지명이 유래한 것이다.
《작성 17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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