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해녀의 항일 투쟁 주도한 해녀독립운동가..하도리 부덕량지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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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해녀의 항일 투쟁 주도한 해녀독립운동가..하도리 부덕량지사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7.26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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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춘화, 김옥련 지사와 함께 제주항일해녀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3인 가운데 한분

하도리 부덕량지사묘

위치 ; 구좌읍 하도리 산425번지. 하도리 해안도로 굴동교차로에서 서쪽 300m 지점의 길 남쪽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본적 및 주소 : 구좌읍 하도리 1700번지
생몰년도 : 1911년 11월 5일 ∼ 1939년 10월 4일

 

하도리_부덕량지사묘

 

부덕량(夫德良) 지사는 일제강점기 해녀의 항일 투쟁을 주도한 해녀독립운동가이다.

부 지사는 13세부터 잠수를 하였다. 하도강습소에서 하도리 출신 김순종(金順鐘)·오문규(吳文奎)·부승림 등으로부터 한글·산수·농민 독본 등을 배우면서 항일의식이 싹텄다.

1930년대 일제가 해녀에 대한 착취와 인권 유린을 일삼자, 이에 항거하여 부춘화(夫春花)·김옥련(金玉蓮) 등과 함께 항일 투쟁에 앞장섰다.

1932년 1월 7일 세화리 5일장 장날을 이용해 하도리 해녀 수백 명을 이끌고 일제를 규탄하는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종달리·오조리·하도리·세화리·우도리 지역의 해녀가 동원된 1932년 1월 12일 제주도 해녀조합의 부당한 침탈행위를 규탄하는 해녀항일운동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1월 16일부터 해녀 항일 운동의 주동자와 배후 세력을 검거할 때 동월 24일경 제주도 민족운동가의 검거를 저지하려다가 체포되었고, 목포경찰서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였다.

1932년 6월 17일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미결수로 석방되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스물일곱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부덕량 지사는 제주해녀항일운동을 주도했던 부춘화, 김옥련 지사와 함께 제주항일해녀독립운동사에 빼놓을 수 없는 3인 가운데 한분이다.

이들은 혁우동맹 산하 하도강습소 1기 졸업생들로 야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게 되었고 당시 청년 민족운동가들과 합세하여 제주해녀항일운동이 한국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자리매김을 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1993년 8월 15일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신한국문화신문 150829)
2006년 4월 북제주군수 명의로 〈愛國志士夫德良之墓〉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졌으며, 대리석으로 조각한 동자석이 설치되었다.
《작성 17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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