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 서울 반일(反日) 운동 확산..북촌리(노형동) 부병준지사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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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 서울 반일(反日) 운동 확산..북촌리(노형동) 부병준지사묘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23.07.27 0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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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회를 조직, 또 야학소(夜學所)를 개설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북촌리(노형동) 부병준지사묘

위치 ; 조천읍 북촌리 1877-2번지. 북촌리공동묘지 내.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유형 : 묘
출생지 : 조천읍 북촌리 603번지[북촌9길 13-4]
생몰년도 : 1906.12.12.∼1952.2.7.

 

부병준

 

 

부병준(夫丙準)은 일제강점기 제주 북촌리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본관은 제주. 호는 백도. 일명(가명) 부건(夫鍵)이라고도 한다.

한학자 부정규(夫正奎)의 3남이며 부인은 김녕리의 한월계(韓月桂)이다. 큰형 성준과 둘째형 봉준은 한학을 하였으며 동생 기준(夫己準)은 배제고보를 다녔으며 항일운동을 하였다.

11세 때 조기 결혼하였으나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 전문부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니혼대학 재학 중 민족주의에 눈을 떴고 1년 후 서울로 돌아왔다.

1923년 3월 화북(禾北)사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에서 중퇴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 경제학과에 입학, 민족주의에 눈을 떠 1년 후 서울로 돌아왔다.

1928년 3월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휘문고등보통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중앙학교의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1928년 3월 조선공산청년회(조선공청) 중앙청년동맹 집행위원이며 서무부원으로 학생부 책임자가 되었다.

1929년 4월 조선공산청년회 결성에 참여하고 학생부 담당 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휘문, 배재, 중앙학교에 야체이까를 조직하는 등 서울에서 반일(反日) 운동을 확산하였다.

한편 광주학생운동 후 학생들이 조직적인 항쟁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를 학생전위동맹(學生前衛同盟) 혹은 학생혁명당(學生革命黨)이라고 한다.

1930년에 탄로되어 관련자가 검거되었는데, 그 중 제주인으로는 김순희(金淳熙: 24세, 중앙보고, 남원리)가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년이 언도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하였다. 김인배(金仁培: 20세, 중동학교, 월정리)는 징역 2년이 언도되었다.

이원우(李元雨: 19세, 중앙고보, 보성리)ㆍ송건호(宋建浩: 20세, 양정고보 4년, 함덕리)ㆍ부병준(夫丙準: 24세, 중앙고보, 북촌리)ㆍ김길수(金吉洙: 19세, 사립경신, 월정리) 등은 검거되었으나 각각 면소(免訴)되었다.

1929년 11월 광주(光州)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운동의 호기(好機)로 보고 조선청년총동맹이 파견한 진상 조사위원이 되어 현지에서 동맹 휴학을 지도하다가 광주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30년 8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예심 면소(免訴) 판결로 풀려나자 서울에서 반일학생시위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하다가 귀향하였다.

소화(昭和) 4년(1929년) 12월 28일에 경성(서울)의 종로경찰서에서 조선인 순사 유승운(劉承雲)과 일본인 순사 目良安之가 서울학생동맹휴교격문배포사건으로 붙잡혀온 부병준(夫丙準)을 심문한 조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전략~)
문(유승운 순사) : 중앙청년회의 프락치(fraktsiya:정당이 대중단체 속에 설치한 당원조직)는 누구누구인가?
답(부병준) : 나(부병준)와 심은녕(沈殷寧)으로 되고 거기로 들어가서 지배적인 위치에서 실행하기로 결의하였다.
(~후략~)

제주해녀항쟁 이후 배후로 지목된 제주 야체이카의 붕괴와 전시체제 돌입에 따른 일제의 강압정책 아래 대중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제주도 적색농민조합 창립위원회가 결성되어 면장 부정행위 폭로, 관제 조합비 거부 운동, 독서회 운동을 벌려 나아갔다.

이 운동은 대중과의 접촉을 늘이기 위해 지역별 활동을 강조하였는데 신좌면의 활동이 매우 왕성하였으며 김일준, 부병준, 부생종 등이 주도하였다.

1933년 2월 상순 김일준(金日準)의 권유로 신좌(新左)면 혁명적 농민조합 준비위윈회를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김일준이 책임자가 되고 부병준은 고향인 북촌, 구좌면의 동복(東福), 김녕, 월정(月汀) 지구를 담당하였으며, 월정리의 신창진(愼昌珍)을 동지로 맞이했다.

함덕리 부생종(夫生鍾)과 함께 향동회(鄕同會)·민풍진흥회 결성을 주도하였고, 1933년 3월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야학을 개설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1933년 2월 농민조합, 향동회, 민풍진흥회 결성에 참여했으며, 3월 독서회를 조직했다.

1933년 7월 함덕리 산업조합 사무소에서 부생종ㆍ김원근 등과 함께 3인이 모여서 김일준의 사회로 해안에 등대를 설치하여 야간 항해의 편의를 도모함으로써 어민을 산하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일동이 쾌히 승낙하므로 그 시설을 김원근에 일임하여 이를 설치하였다.

1933년 7월 하순 부병준의 집 점포에서 '이미 면 협의회원 등에서 문제시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면장에게 직접 질문하여 비리를 폭로하여 농민의 이익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일동의 동의를 얻어 진상을 규명한 후 면장과 질의전을 벌이자고 제의하자 부생종이 동의하였지만 부병준은 이에 반대하였다. 또 임야세ㆍ축산조합비ㆍ농회비 등의 관제 조합비는 농민을 착취하는 것이므로 이를 납부하지 말도록 농민 대중에게 전파할 것을 협의 결정하여 해산하였다.

한편, 그는 부생종과 함께 향동회(鄕同會)ㆍ민풍(民風)진흥회 결성을 주도하고 1933년 3월 독서회를 조직, 또 야학소(夜學所)를 개설하여 항일 정신을 고취시켰다.

특히 민풍진홍회와 향동회(鄕同會) 같은 농민 집단에 들어가 그들의 의견을 들어 투쟁과정을 통해 동지 획득에 노력할 뿐만 아니라 지방의 독서회 지도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와 같이 한림면, 조천면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은 1934년 10월 제주경찰서에 의해서 62명이 입건되고 52명이 검거되었다. 고문에 의해 1명이 사망되고 35명은 기소 유예처분, 10명은 소재불명으로 기소 중지되고 부병준 등 16명만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이들보다 앞서 1934년 8월에 검거되었으며 1934년 10월 혁명적 적색농민조합운동이 탄로나 조직원이 검거될 때 부병준도 검거되었다.

1937년 4월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大阪)에서 장사를 하던 중 광복을 맞아 귀국하여 서울 충무로에 있는 제주문화협회 재일교포 연락 사무를 맡았다.

북촌마을의 향사인 신성회관이 노후하여 해방 직후 해체하고 보니 태극기가 나타났으니 이것으로 보아 일제 당시의 부병준 등의 항일운동과 애국애족의 발자취가 아닌가 본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재일본조선인연맹(약칭:朝聯) 대표로 참석했다. 즉 1946년 남한 좌익계의 5개 정당과 40여 개의 사회 단체 대표 약 500명이 참가하여 동년 2월 15일 조선민주주의 민족전선(약칭:民戰)을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결성 대회를 개최하였다.

재일(在日) 조련(朝聯)에서는 서울위원회 소속 10명 가운데 고순흠(順欽)과 부병준이 제주인으로 정식 참석하고 경제대책위 전국 41명 중 제주 대표 2명(고준석, 부병준)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
1952년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독립유공 대통령 표창을, 또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006년 8월 25일 애국지사 부병준, 부두전 선생의 기념비를 북촌리사무소 앞 뜰에 세웠다.
국가보훈처와 광복회 제주특별자치도지부는 2011년 2월 제주지역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故 부병준 선생을 선정했다.

참고문헌 : 제주도 역사/문화,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판결문(예심기록), 노동자의 책, 마이제주여행, 제민일보 110210, 미디어제주060825

부병준 지사의 묘에는 1984년 10월 북제주군수 명의로 된 〈愛國志士夫丙準之墓〉라고 새겨진 비석과 화강암으로 된 동자석이 세워져 있으며, 서쪽에 붙여 부인 청주한씨의 묘가 나란히 있다.
2022년 노형동 국립제주호국원으로 이장했다.
《작성 17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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