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논문) 왜 中文이 가운데 중 글월 문인가?..승수僧水-중물(僧水)-중문(中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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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논문) 왜 中文이 가운데 중 글월 문인가?..승수僧水-중물(僧水)-중문(中文)
  • 이 문호 (전북대 초빙교수)
  • 승인 2023.12.03 22:0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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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호 (전북대 초빙교수)

 

제주도가 탄생한 역사적 비밀을 풀고자 제주도를 집중연구하고 있는 이문호 전북대 초빙교수가 최근  '왜 中文이 가운데 중 글월 문인가?..승수僧水-중물(僧水)-중문(中文)'라는 제목의 제주관련 논문을 본지에 기고해 왔다. 이문호 교수는 이 논문에서 '서귀포 중문리(中文里) 원래 이름은 승물(僧水 스님들이 많이 살아서 마시는 물)이 중물(僧水)로, 다시 중문(中文)으로 바뀌었다 '고 ​​전하고 있다.  본지는 이문호 교수가 발표한 이 논문을 전문 게재하기로 했다. 제주도 연구에 도움이 되기 바란다.(편집자주)

 

왜 中文이 가운데 중 글월 문인가?.승수僧水-중물(僧水)-중문(中文)

 

인도 발타라 존자 일행의 뗏목배는 기원전1-4세기경에 탐라의 동쪽 끝에 뾰죽히 나온 성산포 섭지코지에 도착했다.

제주에서는 섭지코지 지명을 ‘지혜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 오봉 전6선 국회의원 원내총무가 시흥리 출신이다.

섭지 어원은 지혜의 신 마하가섭(摩訶迦葉) 존자의 섭(葉), 지혜의 지(智), 코지는 곳(Place)이란 의미의 합성어로 보이며 발타라 존자 일행이 처음으로 당도한 곳이란 뜻이다.

같은 시기에 서귀포 보목리는 볼래낭개로 불교가 들어 왔다는 불래포구(佛來浦口), 지명은 보목포구(甫木浦口)이고 한라산 영실에도 불래악(佛來岳 1280m)이 있다.

보목리 앞바다 ‘지혜의섬 섭섬(葉島)’의 ‘섭’자와 성산포 섭지코지에 '섭'자가 같은 글자다.

보목리 동쪽 오름이 절오름(제지기오름寺岳洞窟85m), 원래 보목리 오름은 벌목伐木)리, 스님들 목욕터인 ‘정술내(川’僧筒‘)’가 오늘도 흐르고 있고, 마을사람들은 마을 동서를 가로 지르는 ‘보살길’ 옛길을 지금도 잘 다니고 있다.

지혜의 섬 ‘섭섬(1442.612m)’ 안에 문필봉(文筆奉150m) 3개 산 봉우리가 있어 그 기를 받아선지, 보목리에는 서울대 하 운진, 연대 이 필욱 교수등 300여명 인재를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인근 서귀포 중문리(中文里)원래이름은 승물(僧水 스님들이 많이살아서 마시는 물)이 중물(僧水)로, 다시중문(中文)으로 바뀌었다. 

또 한 사계리 산방굴사(山房窟寺) 마당 용머리 바다에 가파도와 마라도가 있는데, 가파도는 부처의 ‘가피(加被)’ 입고, 마라도의 마라(魔羅)는 ’번뇌(煩惱)‘를 ‘깨라(悟)‘ 불법어를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다.

사계(沙溪, 모래개울리,성산 동쪽과 남쪽사이로 부는 바람인 샛바람은 제주동쪽 끝 성산일출봉에서 하루를 시작하여 제주 서쪽끝 산방산에 바다로 지는 해를 뒤로 살풀이(Fohn: 습윤한 바람이 산방산을 넘으면 고온 건조해 지는 현상)춤을 추고서 떠난다.

사계바당 해안 모래가 살풀이 바람에 의해 모래톱이 밭고량같은 ‘모래개울’이 생긴다하여 ‘검은질’) 이웃마을인 화순리도 속칭 ’번뇌‘다.

산방굴사는 고려시대 혜일(慧日) 스님이 산방법승(山房法僧)으로 이곳에서 입적했고 초의선사(草衣禪師)가 1842년 6개월 머물렀는데 추사(秋史) 김정희 반야심경을 사경(士經)받았고 ‘茗禪’ 글씨도 받았다. 

‘명선’ 글씨에서 ‘명’자를 보면 풀초가 한라산 백록담과 산방산처럼 돼있고,선자의 오른쪽 입구변은 ‘단산의 쌍봉우리’를 상징한다.

그림1. 추사김정희 의 명선

 

왜 中文이 가운데중 글월문인가?

승수僧水-중물(僧水)-중문中文,발타라 존자 일행 중 고을라 아라한(阿羅漢) 300명 중 일부가 중문리에 정착했다는 증거인 셈이다.

이 말은 선흘2리 선래왓 사찰에 오성스님이 귀띔을 해 줬다.

 

다음은 서울에 고진수씨가보내온 중문리관련 자료이다.

1. 중문마을약사

 

2. 배모양의 중문지형

 

3. 왜 中文이 가운데 중 글월 문인가?.승수僧水-중물(僧水)-중문(中文)

중문동은 1981년 7월 1일 서귀포시에 합병되어 한 개 동이 될 때까지 중문면의 면 소재지였으며 행정, 산업의 중심지였다. 초·중·고등학교와 지서, 우체국, 은행지점 등이 있으며 작은 도시를 이루어 인근 마을들의 핵심 역할을 해왔다.

이 마을의 설촌은 1586년 (선조19년. 병술년)에 장사낭겸 나주훈도였던 정봉이 속칭 <웃터>라고도 하는 <군물동산>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온다. 그가 여기 설촌한 후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당시 이 마을에서는 물이 귀했고 5리 쯤 떨어진 <두어물>이라는 곳의 물을 길어다 먹었는데 하루는 투숙하고 난 중이 정씨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정씨가 물의 어려움을 말하였으므로 중은 그와 더불어 남쪽 300m 지점에 이르러 '여기를 파면 물이 나오리라'고 했다.

그래서 얻은 물이었으므로 중물(僧水)이라고 명명했고 마을 이름동 중물리(僧水里)라고 부르던 것이 차츰 중문리가 되었다는 설이다. 중문동의 마을 이름에 대해서는 또 하나의 설이 있다.

지세를 정찰하던 한 선비가 이 마을 북쪽 5km지점의 <녹화지>에 이르러 마을을 내려다보니 이 마을의 형상이 붓과 벼루 가운데 놓여있는 책과 같다 하여 중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는 설이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보면 녹화봉은 붓이요 속칭 <베린내오름>인 성천악은 벼루 형치라는 것이다. 과거 천제연에는 원이 있어 이곳에서는 임금에게 바칠 공마를 길렀다고 전한다.

천제연 서북쪽 3km 지점에는 <창남동산>이라는 지경이 있는데 여기는 무사들이 활을 쏘던 장소라 전한다. 중문리라는 명칭은 1914년부터 사용돼 왔다.

1927년 3월 1일 좌면 공립 보통학교로 시작한 이 마을 교육 기관인 중문초등학교는 당초 천제연 상류에 있다가 1941년 2월 현위치로 옮겼으며 1949년 12월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이 학교는 대포, 회수, 색달 마을의 학생을 포용하고 있다.

 

 

이문호 전북대 초빙교수

 

1990년 일본 동경대 정보통신 공박, 1984년 전남대 전기과 공박,1985년 미국 미네소타대 전기과 포스트닥, 1981년 통신기술사, 한림원 정회원, 2008년 이달의 과학자상,제주,전북문화상 및 2015년 국가연구 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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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장 2023-12-04 20:19:01
@ 제주도 구석구석에 서려있는 뿌리를 찾아 연구활동에 매진하시는 저자께 우선 감사드린다. 내직장 내가 지킨다는 향토예비군 정신으로 고향을 너무나 잘지키신다. 서귀포의 마을과 섬과 산에 대한 어원을 찾는 애향심이 존경스럽다. 중문은 자주 갔었다. 기온이 따뜻하여 겨울에 벌 키우기에도 안성마춤인 장소로 기억된다. 중문의 어느 햄버거 가게에서 가끔 간식을 먹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때는 중문은 그냥 지명이려니 했다. 중문에 대한 어원의 변화가 스님들이 드시는 물 "승수"가 스님을 중이라고 하니 "중물"이 되고, 중물이 음운의 변화로 " 중문"이되었는 논리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진작 유래를 알았다면 제주 근무시 각 지역의 의미를 곱씹으며 한층 멋진 여정이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일어난다. 감사~

선인장 2023-12-04 20:18:13
@ 제주도 구석구석에 서려있는 뿌리를 찾아 연구활동에 매진하시는 저자께 우선 감사드린다. 내직장 내가 지킨다는 향토예비군 정신으로 고향을 너무나 잘지키신다. 서귀포의 마을과 섬과 산에 대한 어원을 찾는 애향심이 존경스럽다. 중문은 자주 갔었다. 기온이 따뜻하여 겨울에 벌 키우기에도 안성마춤인 장소로 기억된다. 중문의 어느 햄버거 가게에서 가끔 간식을 먹던 기억도 떠오른다. 그때는 중문은 그냥 지명이려니 했다. 중문에 대한 어원의 변화가 스님들이 드시는 물 "승수"가 스님을 중이라고 하니 "중물"이 되고, 중물이 음운의 변화로 " 중문"이되었는 논리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진작 유래를 알았다면 제주 근무시 각 지역의 의미를 곱씹으며 한층 멋진 여정이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일어난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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