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5)-‘문간공 동계 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旌閭)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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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25)-‘문간공 동계 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정려(旌閭) 현판
  •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3.12.22 0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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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의 제주 대정현 유배 10년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8. 정온(鄭蘊)의 현손(玄孫) 정희량(鄭希亮)과 이인좌(李麟佐)가 공모해 벌인 역모(逆謀) 사건

거창(居昌) 강동(薑洞)마을을 세거지(世居地)로 하는 초계정씨(草溪鄭氏) 집안인 동계의 후손들에게 위기가 닥친 건 다름 아닌 영조(英祖) 4년(1728)에 발생한 무신난(戊申亂) 때이다.

이를 대개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 하지만, 경상도 지역에서는 ‘정희량(鄭希亮)의 난’으로도 불린다.

소론 강경파가 남인을 끌어들여 정권 탈환을 모의한 것으로 규정되는 이 무신난은, 그 배경이 숙종 말기부터 진행된 세자의 대리청정 ‧ 세제 책봉 논란과 더불어 경종의 독살설 및 영조의 왕위계승 부당성 시비, 이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의 대립과 갈등이 누적돼 왕위계승을 둘러싼 붕당간 정쟁이라는 성격을 띤다.

예로부터 역모가 성공하면 반정(反正) 공신으로 천고의 충신이 되어 훈작과 부귀가 본인은 물론 자손 대대로 이어지게 되지만, 역모가 실패하게 되면 만고의 역적이 되어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게 됨은 물론, 모든 기록에서 ‘효경(梟獍)’이란 낙인이 찍힌 채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게 되는 처지에 놓임이 왕조시대의 반정과 역모의 결과인 것이다.

역모의 주동자인 정희량은 바로 동계 선생의 현손(玄孫; 4세손)이다. 영조가 임금에 오른 4년 뒤인 무신(戊申, 1728)년에 정희량은 이인좌(李麟佐), 박필현(朴弼顯)과 공모하여 역모를 꾀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하였고, 정희량은 거창에서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동계 선생의 찬란한 업적을 통해서 충신의 후손이라 자처하던 거창의 초계정씨(草溪鄭氏) 집안은 한순간에 역적 집안으로 전락해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그런데 반란의 주모자를 배출하고서도 멸문(滅門)의 위기를 벗어나 집안이 다시 복구할 수 있었던 배경엔 무엇보다도 선조인 동계 정온 선생의 영향이 작용했다.

당시 사대부층에선 충신의 집안에서 동계의 제사가 끊겨서는 안 된다는 강력한 여론이 형성되면서 영조 당대에 동계 선생에 대한 불천위(不遷位) 제사의 허가가 내려지게 된 것이다.

 

-梟獍(효경) : 불효하거나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의 비유. 여기서 ‘梟 (효)’는 어미를 잡아먹는 새, ‘獍(경)’은 아비를 잡아먹는 짐승이란 뜻이다.

 

9. 동계 정온 선생의 유적지

(1) 동계종택(桐溪宗宅)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6권)에 보면 동계고택의 구조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강동마을입구에 들어서면 풍요로운 넓은 논과 밭 저 멀리 낮은 동산을 등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소담한 마을이 그림같은 풍경을 이루고 있는데 그 한복판 양지바른 곳에 동계고택이 홀로 우뚝하다. 높은 솟을 대문과 긴 행랑채 위로 드러나 있는 사랑채, 안채, 별채의 고래등 같은 지붕머리는 내력 있는 이 종갓집의 품위와 위용을 한눈에 보여준다. (…)

동계고택은 인조 때 문신인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이 사시던 곳으로 후손들이 순조 20년(1820)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는 전형적인 종갓집 건물이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높직이 올라앉은 기역자집 사랑채가 이 집의 얼굴이 되고 사랑채 옆으로 난 중문으로 들어서면 안방 ‧ 대청마루 ‧ 건넌방과 부엌이 있는 안채가 단정한 일자형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안마당 좌우로는 아래채와 곳간채의 뒷간이 다소곳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안채 뒤로는 낮은 기와 돌담에 둘러싸인 정온 선생 사당이 있다.”

<그림 (21)> 동계종택 전경

 

한편 그곳 솟을대문 위로 보면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란 정려(旌閭) 현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현재 이곳에 사는 15대 종손 정완수 씨의 말에 의하면, 인조 임금이 특별히 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판 왼쪽에 쓰인 간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겨나 고개가 절로 갸우뚱하게 된다. 그 간지로 쓰인 글이 ‘숭정기원후오(崇禎紀元後五) 기묘사월 일(己卯四月 日)’로 읽히는데, 이를 환산해 연대를 추출해보면 그 연대가 인조 대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쓰기 시작한 후 첫 번째 기묘(己卯)년이 1639년으로서 인조 17년에 해당하는데, 여기에 다섯 번째 맞는 기묘(己卯)년이라고 하면 1879년으로서 고종 16년을 지칭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여기에 얽힌 무슨 사연이나 곡절이 따로 있는 것일까?

다만 동계의 후손 중엔,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이도 있고 역모를 꾀했다가 실패한 인물도 있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가 사대부층의 여론에 힘입어 회복하던 가문의 부침 내력을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림 (22)> 동계종택 대문 현판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

 

<참고자료> ※ 《제민일보》 ‘아침을 열며’ 칼럼용 원고(2023. 01. 02)

동계 정온 선생과 숭정 연호

현행복 •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보면, 그 첫 장이 ‘압록강을 건넜던 기록’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작자는 첫머리에 그 해의 연도를 ‘숭정기원후삼경자(崇禎紀元後三庚子)’라고 밝히면서, 이는 ‘숭정 기원후 세 번째 경자년’의 뜻이라고 풀이했다.

곧 숭정 기원의 해(1628) 뒤로 세 번째 경자년은 정조 4년(1780)에 해당한다. 아울러 당시 명나라가 멸망한 지 130여 년이 지났어도 조선에선 여전히 숭정 연호를 쓴다고 하면서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곧 중원의 문물제도는 비록 오랑캐로 변했다 할지라도 조선은 압록강을 경계로 나라를 삼고 홀로 옛날 문화를 지키면서 빛을 내고 있기에 명나라의 문화가 오히려 조선에서 부지되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그런데 앞서 나온 ‘숭정기원후삼경자’란 연도 표기는 우연의 일치로 제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관덕정 건물 안쪽에서 보면 큰 글씨체의 ‘耽羅形勝(탐라형승)’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그 좌측면을 자세히 살펴보면 초서체의 작은 글씨로 “숭정기원후삼경자의 해 겨울에, 65세 노인 제주목사 김영수(金永綬)가 술에 취해 글씨를 쓰다.”라고 표기돼 있다.

한편 조선 후기 들어 이런 ‘숭정기원후’식 표기가 개인의 문집이나 무덤 앞 빗돌에 두루 쓰이게 되면서 연도 계산에 착오가 드러나는 사례가 간혹 발생하기도 한다.

예컨대 정조 때의 문장가이자 경학자인 홍길주는 자신의 저술 <수여란필>에서, 조부인 효안공 홍낙성의 묘석에 새긴 글 가운데 ‘숭정사무진(崇禎四戊辰, 1808)’이라고 표기했어야 함에도 잘못해서 ‘숭정삼무진’이라고 새겨놓았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뒷날 이 비문을 읽는 사람이 반드시 이를 의심할 것이기에 바로잡는다고 했다.

그런데 ‘숭정’ 연호에 얽힌 사연들 가운데 제주 오현의 한 사람인 동계(桐溪) 정온(鄭蘊)선생과 관련된 일들이 특히 주목을 끈다.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한 인조 15년(1637),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의 항전을 주장하던 동계는 할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덕유산으로 낙향한 뒤 일명 화엽시(花葉詩)로도 불리는 ‘숭정십년력의 책에다 씀’이란 시를 남겼다.

 

“숭정이란 연호가 여기에서 그쳤으니/

내년엔 어찌 다른 책력 차마 펼쳐볼 수 있을 건가/

이제부터 산인(山人)은 일이 더욱 줄어들 테니/

단지 꽃(花)과 잎(葉)을 보고서야 계절의 바뀜 알리라”

 

<그림 (23)> 동계사당을 소개하는 15대 종손 정완수(鄭完秀, 80) 옹

 

한편 거창 강동마을의 동계 종택을 찾아가면, 그 집 솟을대문 위로 동계의 충절을 기려 인조 임금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 정려 현판이 걸려 있다.

붉은색 바탕 위에 해서체의 흰색 글씨로 ‘文簡公桐溪鄭蘊之門(문간공동계정온지문)’이라 씌어 있다.

그런데 좌측의 작은 글씨로 된 간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崇禎紀元後五己卯四月 日(숭정기원후오기묘사월 일)’로 읽힌다.

전례에 따라 이를 풀면 곧 ‘고종 16년(1879) 4월 모일’에 해당하는데, 아무래도 인조 때 기록물로 보기엔 의문이 생겨 절로 궁금증을 자아낸다.

다만 동계의 후손 중엔 집안을 일으켜 세운 이도 있고 역모를 꾀했다가 실패한 인물도 있어, 하루아침에 멸문지화의 위기에 처했다가 사대부층의 여론에 힘입어 회복하던 가문의 부침 내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종택의 사당 앞엔 정조 임금이 내린 어제시 현판이 있고, 사랑채엔 순조 20년(1820)에 중창됐다는 상량문도 있어 이를 참조할 만하다.

 

현행복(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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