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2)-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와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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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오현(五賢), 제주에 남긴 자취[影]와 울림[響](32)-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와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 승인 2024.01.21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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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엮음 ‧ 마명(馬鳴) 현행복(玄行福)/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선생의 제주 목사 재임 3개월

제주 역사에서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 등 오현이 남긴 업적과 흔적은 많지만 이를 집대성해 발표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최근 제주시 소통협력센터는 현천(賢泉) 소학당(小學堂) 인문학 강의를 통해 이들 오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내용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학자이자 음악가이기도 한 마명(馬鳴) 현행복 선생이 이를 집대성한 내용을 종합적으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본지는 현행복 선생으로부터 이번에 발표한 내용을 긴급입수, 이를 연재하기로 했다. 오현에 대한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기 바란다.

한편 오현은 1520년(중종 15년) 충암 김정 (유배), 1534년(중종 29년) 규암 송인수 (제주목사), 1601년(선조 34년) 청음 김상헌 (제주 안무사), 1614년(광해군 6년) 동계 정온 (유배), 1689년(숙종 15년) 우암 송시열 (유배) 등이다.(편집자주)

 

(이어서 계속)

오현단 조두석 1960년대 모습(《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5.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와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문신으로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1499~1547)와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1514~1547)는 그 인생 궤적이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연령대로 봐선 규암이 금호보다 다섯 살 연배이지만 생을 마감한 해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던 해인 명종 2년(1547)으로 서로 똑같다.

제주 목사를 역임한 점,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사사(賜死)되어 생을 마감한 점, 당대의 유명한 석학(碩學)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류한 점 등은 공통적 삶을 살았던 궤적의 요인들이다.

규암이 을사사화로 낙향한다는 소식을 접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은 시를 지어 보내어 규암을 위로하기도 했다.

 

圭庵昔在風塵中(규암석재풍진중) / 규암이 예전에 풍진(風塵) 속에 있었으나

瀟灑不作風塵客(소쇄부작풍진객) / 깨끗하고 산뜻한 모습, 풍진객 아니라네.

今歸淸州學耕稼(금귀청주학경가) / 이제 청주로 돌아가 농사짓기 배운다니

淸城穀熟如姑射(청성곡숙여고야) / 청성의 곡식 익으면 고야산과 같으리.

肯將榮辱入靈臺(긍장영욕입영대) / 영광과 욕됨, 어찌 마음속에다 담아두랴,

一簞一瓢師顏回(일단일표사안회) / 안빈낙도의 삶, 안회를 스승으로 삼네.

吾聞天下有至樂(오문천하유지락) / 내 듣건대, 천하의 지극한 즐거움 있으니

非金非石非絲竹(비금비석비사죽) / 팔음(八音)의 화려한 풍악은 아니라네.

同志之人與我違(동지지인여아위) / 동지들이란 사람, 내 뜻과 서로 어긋나니

獨抱塵編荒是非(독포진편황시비) / 먼지 낀 고서나 잡고서 시비를 덮으려네.

 

위의 퇴계 시문의 기록은 《대동야승(大東野乘)》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을 비롯해서,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을사년의 당적(黨籍)>, 권별(權鼈)의 <해동잡록(海東雜錄>,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 등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한편 임형수의 죽음을 애도한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시조시가 유명하다.

 

“엊그제 버힌 솔이 낙락장송(落落長松) 아니런가

져근덧 두던들 동량재(棟樑材) 되리려니

어즈버 명당이 기울면 어느 이 받치리”

 

엊그제 잘라버린 소나무가 바로 곧고 높게 잘 자란 소나무가 아니었더냐?

좀 더 한동안 그대로 남겨두었던들 기둥이나 들보로 쓸만한 큰 재목이 되었을 텐데 잘라버렸으니 아깝기도 하여라.

뒷날 대궐 안의 정전(正殿)이 기울어지기라도 한다면, 어디 또 그와 같은 재목이 있어 쓰러져가는 전각을 떠받쳐 바로잡을 수가 있겠는가?

 

비통한 심경을 소나무에 빗대어 잘 묘사하고 있다.

금호 임형수와 규암 송인수는 평소 시작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정형(李廷馨)의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보면 규암(圭庵)의 시 <유거(幽居)>에 차운한 임형수의 시가 실려 전한다.

 

○ <송규암(宋圭庵)의 시에 차운하다[次宋圭庵幽居韻]> −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

身綰金章且索居(신관금장차색거) / 벼슬살이하면서 또한 고요히 거처하니
故人多病孟生疎(고인다병맹생소) / 맹호연처럼 병이 많아 찾는 친구 드무네.
鷄群此日還留鶴(계군차일환류학) / 오늘날 뭇 닭 속에 학처럼 위용 빛나고
澤畔當年未葬魚(택반당년미장어) / 당년에 굴원처럼 물에 빠져 죽진 않았네.
喚睡谷禽窺戶牖(환수곡금규호유) / 잠을 깨우는 골짜기, 새는 창문을 엿보고
入簾山翠潤琴書(입렴산취윤금서) / 주렴 속의 산의 푸름, 거문고 책을 적시네.
朝廻日日燒香坐(조회일일소향좌) / 공무를 마치고 돌아와 매일 향을 태우니
松月臨窓夜幌虛(송월임창야황허) / 소나무 속 달, 창에 비쳐 밤 장막 비었네.

 

한편 규암의 ‘평성(平聲) 어운(魚韻)’의 원운시(元韻詩)는 이렇다.

 

○ <유거(幽居)> −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

玉人乘月訪幽居(옥인승월방유거) / 옥 같은 사람, 달 아래 그윽한 거처 찾아와
柴戶推來樹影踈(시호추래수영소) / 사립문을 밀치니 나무 그림자가 성글도다.
山釀暫開千日酒(산양잠개천일주) / 집에 빚은 천일주를 잠깐 독을 열었고
盤肴偶得八梢魚(반효우득팔초어) / 쟁반의 안주는 우연히 팔초어를 얻었네.
狂詩不用傳驚俗(광시불용전경속) / 미친 시는 해져 세속을 놀랠 것 없지만
淸話方知勝讀書(청화방지승독서) / 맑은 이야기, 독서보다 나음 이제 알겠네.
明日送君山下路(명일송군산하로) / 내일 그대를 산밑 길에서 전송하고 나면
小堂寥落似逃虛(소당요락사도허) / 작은 집 적적해 텅 빈 곳 사는 것 같으리.

 

규암이 이 시를 지을 때는 중종 36년 신축(辛丑, 1541)년으로서 남산 아래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顏)이 살던 집에 세를 들어 살 때였다. 그때 마침 임당(林塘)과 정유길(鄭惟吉)이 방문하자 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다고 한다.

‘평성(平聲) 어운(魚韻)’으로 된 규암의 <유거(幽居)>란 시에 차운한 시들은 임형수 이외에도 문인 여럿이 더 있다.

《동각잡기》에 보면, 그들의 차운시가 차례로 실려 소개되고 있는데, 그 면면을 살펴보면 이렇다. 곧, 임당(林塘) ‧ 정사룡(鄭士龍) ‧ 신광한(申光漢) ‧ 신잠(申潛) ‧ 김인후(金麟厚) ‧ 임억령(林億齡) ‧ 박충원(朴忠元) 등의 작품이 그렇다.

평소 규암이 시우(詩友)로 사귀었던 인사들의 면면이 다양함을 보여주는 사례인데, 이로 미루어보면 평소 사대부 인사들과의 교류의 폭이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한 처지의 생을 살았으면서도 규암 송인수는 제주 오현으로 선정되어 귤림서원에 추향된 반면, 금호 임형수는 이 대열에 포함되지 않았고, 다만 귤림서원 옆에 있던 영혜사(永惠祠)에 추가 배향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규암은 현종 10년(1669)에 이미 귤림서원의 배향 인물로 선정된 청음 김상헌이나 동계 정온 보다도 시대적으로 앞선 인물이었음에도 이들보다 뒤늦게 합류해 사현(四賢)을 이루게 된 사연은 무슨 때문이었을까?

그의 사후 135년이 지난 숙종 4년(1678)에 와서야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된 점으로 미루어보건대, 그가 생전에 제주도에 끼친 영향보다는 파당적 이유에서 향사된 것임을 짐작케 한다.

송인수의 추향(追享)에 뒤이어 숙종 8년(1682)에 귤림서원이 중앙 조정으로부터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지정받게 된다.

사액서원으로 지정되게 되면, 자연적으로 공인 서원이 되어 전답과 노비 및 서책의 일정량을 중앙 조정에서 동시에 하사받으며 서원의 재정을 국가에서 뒷받침하기에 사액을 받기가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더욱이 숙종 초기의 조정 분위기는 사액을 통한 서원 보호책에 대하여 여러 중신들 간에 강력한 반발이 일기 시작하던 때임을 간과할 수 없다.

이들 과정으로 이어지는 형편상 특히 당시 사림의 영수격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등의 영향력이 직간접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나타난 게 아닐까 하고 추정해 본다.

 

현행복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예술진흥원장)

 

(연재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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