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삼군신(三軍神)' 故강승우 중위,국립제주호국원 안장(安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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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전투의 영웅 '삼군신(三軍神)' 故강승우 중위,국립제주호국원 안장(安葬)..
  • 김평일 명예기자
  • 승인 2024.04.15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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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안영권 하사, 故오규봉 하사와 배낭에 수류탄과 폭탄 넣고 중공군 진지 육탄 돌진 백마고지 탈환 산화

 

 

대한민국 ‘삼군신(三軍神)’이라는 칭호를 받는 백마고지 영웅 故강승우 중위의 유해(遺骸)가 그동안 고향인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리 가족묘지에 안장(安葬)되었다가 지난달 30일 국립제주호국원으로 이장(移葬), 안장(安葬)됐다.

이날 안장식(安葬式)에는 정길재 제주특별자치도보훈청장, 정영숙 국립제주호국원장, 제주도내 보훈단체장, 유자녀(遺子女)인 강응봉(대한민국전몰군경회제주특별자치도지부장) 내외와 친지, 그리고 전몰군경유족회 회원이 참여한 가운데 국립제주호국원 의전원(儀典員)의 담당하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거행됐다.

 

 

 

故 강승우 중위는 6·25 전쟁 당시 중공군과 무려 24회에 걸쳐 진퇴를 거듭한 난공불락인 백마고지 적진지에 故안영권 하사, 故오규봉 하사와 함께 배낭에 수류탄과 폭탄을 넣고 당시 백마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공군 진지로 육탄으로 돌진하여 난공불락이던 백마고지를 탈환하고 산화(散華)함으로써 백마고지 탈환의 신화(神化)를 이뤄낸 6.25전쟁사에 빛나는 제주가 낳은 영웅(英雄)이다.

故강승우 중위 일행이 적진지를 탈환한 후 국군은 그 여세를 몰아 북으로 진격의 혈로를 열 수 있었다고 한다.

6.25전쟁 자료에 따르면 당시 백마고지 전투 10일 동안 퍼부어진 피아간 포탄이 26만 여 발이고 이 전투에서 사상자는 아군 3천4백23명, 적군은 1만4천3백89명으로 이 전투로 인해 주변 호수가 시체로 모두 메워질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당시 백마고지를 탈환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휴전선은 최소한 30km 남쪽으로 그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 故강승우 중위는 누구인가?

故강승우 중위는 성산읍 시흥리 강치원 옹과 부남근 여사와의 사이에 1930년 11월 28일 1남 2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그는 어릴 적부터 심성이 착하여 부모의 사랑은 물론 동네 어른들로부터도 귀여움과 칭찬받으며 자랐다.

1944년 당시 성산서초등학교(현 동남초등학교)를 졸업한 강승우는 동네에서 낮에는 지역사회 개발을 위한 청년운동과 밤에는 야학당에서 동네사람들에게 글자를 가르치다가 18세가 되는 해 김춘일 여사와 결혼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신혼의 꿈도 행복도 뒤로한 채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위태로운 조국을 구하기 위해 군에 자원입대했다.

 

1951년 12월 육군 소위로 임관한 강승우는 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소대장으로 보직되어 백마부대와 인연을 맺었고 백마고지 전투에서 폭탄으로 온몸을 무장한 채 수류탄을 뽑아 들고 적의 화가가 불을 뿜는 가운데 육탄으로 진지로 돌진하여 적 기관총 진지 3개를 모두 파괴하고 장렬히 산화(散華)했다.

6·25전쟁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인 이 전투에서 육탄돌격을 감행한 故강승우 중위는 ‘백마고지의 영웅(英雄)’, ‘삼군신(三軍神)’이라고 불리고 있다.

정부는 고귀한 희생정신(犧牲精神)과 호국정신(護國精神)을 기리기 위해 1953년 7월 1일 금성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중위로 추서(追敍)했고 미국정부도 1953년 2월 은성무공훈장을 수여했다.

故강승우 중위 등 살신성인(殺身成仁)하신 육탄 3용사를 대한민국 국군의 삼군신(三軍神)으로 칭호하고 있으며 고귀한 목숨을 바쳐 산화(散華)하신 故강승우 중위의 위국충절(爲國忠節)과 호국정신(護國精神)은 후세를 살아가는 모든 국민들에게 영원한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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