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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준 기자의 제주올레탐방기"올레길, 나도 걷는다"
천년의 신비, 위대한 섬..비양⑬(하프올레걷기)흑염소 평화롭게 풀 뜯는 목가적 풍경, 비양도는 희망
고현준 기자  |  kohj00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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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승인 2017.11.22  00: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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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는 천년의 신비를 지닌 위대한 섬이다.

산에는 평화롭게 풀을 뜯는 흑염소가 노닐고, 아직 천연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어 신비롭기만 한 곳.

이곳에는 올레길이 없고, 배는 2시간에 한번씩 하루에 4번만 다니는 불편한 섬이지만 비양도는 아직 제주도의 희망으로 남아있다.

비양도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비양도 지명유래

조선시대 초기에는 죽순이 많이 났으므로 죽도라 부르기도 했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한 오름이 날아와 비양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날아온 섬이라는 뜻의 ‘비양도’라는 이름에 얽힌 전설은 다음과 같다.

먼 옛날 제주의 서북방향인 중국 쪽에서 산봉우리 하나가 제주를 향해 날아오는데, 굉음과 함께 한림 앞바다까지 왔을 때 소리에 놀라 밖에 나온 한 부인이 “거기 멈추어라(혹은 산이 날아온다)”고 소리치자 봉우리는 더 이상 날아오지 못하고 지금의 위치에 떨어져 섬이 되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정확히 1001년 전 화산 폭발로 생긴 섬이라고 전해지지만, ‘날아온 섬’이라는 뜻처럼 정확한 유래는 아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양도 [飛揚島] - 섬 특유의 외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화산 박물관 (한국의 섬 - 제주도, 2017. 3. 15., 지리와 역사)

 
   
 

하지만, 10여년 만에 다시 찾아가 보고자 했건만 비양도에 입성하기가 쉽지 않았다.
가려고만 하면 바람이 불어 배가 뜨지 않았고, 배가 뜨는 날은 이곳으로 발걸음을 하지 못했다.


날씨 때문에 비양도로 들어갈 수 없어 되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했던 곳.

지난 19일(일요일)은 전날(18일) 세찬 추위로 더욱 갈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느지막이 일어나 밖을 보니..예상과 달리 날씨가 아주 상쾌했다.

늦었지만 올레걷기에 나서기로 했다.

처음에는 비양도보다도 14코스를 거꾸로 걷자고 해서 나선 길이었다.

집에서 출발한 것은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지금 걸어도 4-5시경이면 끝나니, 괜찮을 듯 싶어 그냥 집을 나섰다.

한림항에 도착한 시간은 13시18분경..
14코스 종점스탬프를 찍고 걸으려던 참이었다.

비양도선착장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망설였다.

오늘 비양도를 들어가지 못하면 또 일주일을 미뤄야 하고 그 이후에도 비양도롤 들어간다는 기약을 할 수 없는 상황..

14코스를 걷기보다 우선 비양도를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2시 배를 타고 들어가면 마지막 배는 16시 15분..
2시간 정도면 비양도를 다 순례할 수 있을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걸어보니 40분 정도면 섬을 한바퀴 다 돌수 있었고 비양봉을 오른다 해도 1시간 정도..2시간이면 가능한 길로 생각됐다.

뱃삯은 도민할인을 받아 왕복 8천원(편도4천원,일반요금 편도 4,500원).
내가 탄 배에는 30여명 정도가 함께 배에 올랐다.

92명이 정원인 비양도로 가는 이 배는 아주 작은 어선형의 선박이었다.

   
 

   
 

처음에는 2시간이 아니라 한시간에 한번 정도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비양도를 돌아보니 이대로가 좋았다.

비양도는 우도나 가파도나 마라도처럼 사람들이 밀려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양으로 향한 배는 정확히 2시에 출항했다.
비양도로 가는 배는 오픈형이다.

선장이 움직임을 마치 연극을 관객석에 앉아 보듯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눈에 들어온다.

흔들리는 뱃속에 앉으니 세찬 바다와 함께 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10여분만에 드디어 비양도에 도착..

바양도에 내리자 처음 들어온 풍경은 하얗게 눈이 쌓인 한라산이었다.

바다와 함께 바라보는 한라산은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비양도의 역사

『탐라순력도』 등에 의하면, 이곳에는 양과 사슴이 방목되기도 했다. 『지영록』, 『남사록』, 『탐라지』에는 비양도에 화살용 대나무가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양도 부두에는 비양도 역사에 대하여 기록된 두 개의 비석을 볼 수 있다. 기록은 약간의 차이가 나지만 먼저 한 비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에 ‘고려 목종 5년(서기 1002년) 6월에 산이 바다 한가운데서 솟아 나왔는데 산꼭대기에 네 개의 구멍이 뚫리어 붉은 물이 솟다가 닷새 만에 그쳤으며 그 물이 엉키어 기왓돌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 고적’에 ‘고려 목종 10년(1007년), 서산이 바다 가운데서 솟아오르니 태학박사 전공지(田拱之)를 보내 살피게 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이 처음 솟아오를 때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고 땅이 천둥처럼 진동하였는데 일주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멈추었다. 산 높이가 100여 장이고 둘레는 40여 리나 되었다. 풀과 나무가 없었고, 연기가 그 위를 덮었다. 사람들이 두려워 감히 가까이 가려 하지 않자 공지가 몸소 산 아래까지 가 그 형상을 그려서 바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11세기 초에 비양도가 화산 활동으로 바다에서 솟아나 생겨난 것이라면 화산 활동이 무엇인지 그 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혼돈 속에 천지가 개벽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바다에서 수증기를 내뿜으면서 산이 솟아 올라오고, 지옥의 유황불처럼 펄펄 끓는 물을 목격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했을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양도 [飛揚島] - 섬 특유의 외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화산 박물관 (한국의 섬 - 제주도, 2017. 3. 15., 지리와 역사)

 
   
 

우선 비양봉으로 오르는 길을 찾아야했다.

안내된 길을 따라 왼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니 비양봉산책길이 나왔다.

억새꽃이 흐드러진 길..

억새와 바다가 만나 예의 그 제주도의 가을을 만끽하게 만들었다.

마을길을 따라 조금 더 걸어 들어가니 비양봉입구가 나온다.

정상까지 5백미터라는 문구가 보이고 짧은 오르막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비양봉에 오르고 나서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은 울창한 숲과 함께 바다와 한데 어우러져 비양봉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비양봉은 어느 쪽으로 보아도 2개의 봉우리가 나타난다.
그래서 비양봉의 화구는 쌍둥이처럼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쌍봉이니 화구도 두 개인 것은 당연한 일..
그러한 비양봉을 오르기 위해 몇 번이나 가지 못했던가..
오름으로 오르는 길, 중간중간 보이는 바다가 싱그럽다.

   
 

   
 

350미터가 남았다는 표시가 있는 곳에 다다르니..
어린 흑염소 한 마리가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리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치 "저 여기서 평화롭게 풀 뜯어먹고 살아요.."라고 말하듯이..

그리고 조용히 물러났다.

이제 비양봉으로 향하는 길..

길은 두갈래였다.

나는 오른쪽길을 선택했다.

천천히 걸어오르자 벌겋게 변한 비양봉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명칭 유래

예로부터 비양 오름 또는 가재, 암메 등으로 불렸다. 비양 오름은 비양섬·비영섬[비양도의 옛 이름]에 있는 오름이라는 데서 붙인 것인데, 오늘날은 비양봉이라 하고 있다.

비양봉에는 두 개의 굼부리[분화구]가 있는데 주봉에 딸린 큰 분화구를 큰암메라 하고, 작은 봉우리에 딸린 작은 봉우리를 족은암메라고 한다. 암메는 암메창이라고 하는데, 굼부리[분화구]에 대응하는 제주어이다. 가재의 뜻은 확실하지 않다.

높이는 114.1m, 비고 104m, 둘레는 2,023m, 면적은 260,428㎡, 폭은 651m이며, 모양은 복합형으로 되어 있다. 비양봉 서남쪽 기슭에는 동산밧굴이라는 천연 동굴이 있고, 그 남서쪽 바닷가 일대에는 신석기 시대의 곽지리식 토기가 확인되는 유물산포지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양봉 [飛揚峰]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속살이 다 드러난 정상..
그곳 등대를 뒤로 하고 앉아 가지고 간 무화과를 하나 먹었다.
빨리 도착하려고 아침도 먹지 못하고 떠난 길이었다.

커피도 과자도 꿀맛이다.

비양봉 정상은 바람이 매우 세찼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는 풀조차 자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꽃을 심었었는지 꽃씨를 뿌렸다는 표지가 있었지만 다 부숴져 나가고 흔적만 남아있을 정도였다.

아마도 비양봉 정상에는 세찬 바람으로 식물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다만 분화구안으로는 숲으로 울창한 건강성을 보여주고 있어 이곳이 결코 척박한 곳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올레길은 아니었지만 나는 올레를 걷듯 찬찬히 주위를 살피며 능선을 따라 내려왔다.

비양봉 정상 바로 아래쪽은 아예 사막처럼 변해 있었다.
재선충이 이곳을 침범한 듯 수많은 나무가 잘려진 채 그대로 뒹굴고 있었고 그 길을 마른 흙이 휘날렸다.

비양봉 정상쪽은 거의 황폐화된 상태다.

그렇다고 대안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아 보이는 곳이었다.

   
 

   
 

   
 

   
 

   
 

   
 

정상부근에 비해 능선은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이중분화구를 갖고 있는 이곳은 신비함 그 자체다.

비양봉 정상에 서 있는 등대 하나가 정상임을 말없이 상징할 뿐..능선을 따라 걷는 비양봉은 아름답기가 그지 없었다.

나는 올라온 길을 따라 내려가 바다쪽을 한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비양봉을 거의 내려오는 길에 흑염소 두 마리가 보였다.

비양봉의 흑염소는 평화의 상징이었다.

해안길을 따라 걷는데 감태작업을 하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했더니 “네..”라고 답해 주신다.

이곳 코너를 도는데 어마어마한 노두가 펼쳐졌다.

이러한 노두는 비양봉을 따라 몇군데나 보였다.

   
 

   
 

   
 

   
 

   
 

애기업은 돌(부아석)

해안산책로를 걷다가 만나게 되는 슬픈 사연의 기암괴석이 있다. ‘부아석’이라고 부르는 이 돌은 옛날 물질나간 남편을 기다리던 임신한 여인이 한라산을 바라본 채 돌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보통 용암굴 내부에 형성되는 용암 기둥이 지상으로 나와 있는 희귀한 형태다. 애기업은 돌 앞에서 치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양도 [飛揚島] - 섬 특유의 외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화산 박물관 (한국의 섬 - 제주도, 2017. 3. 15., 지리와 역사)

 

10여년전 이곳을 찾았을 때 북쪽 바닷가에는 경찰초소가 있었는데..이제 그런 초소는 사라지고 없었다.
코끼리바위를 지나니 아기 업은 바위가 나타나고..해안길을 따라 한라산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코너 하나만 돌면 부둣가다.

부두를 가는 길에는 펄랑못이라는 연못이 있다.

   
 

펄랑

비양도를 더욱 특별한 섬으로 만드는 못 ‘펄랑’은 우리나라 유일의 염습지로 밀물 때는 해수가 밀려들고 썰물이 되면 다시 담수호가 되는 신비로운 곳이다. 영화 ‘쥬라기공원’의 원시 연못을 보는 느낌이다. 길이 500m, 폭 50m의 호수로 비교적 얕은 편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비양도 [飛揚島] - 섬 특유의 외로움을 그대로 간직한 화산 박물관 (한국의 섬 - 제주도, 2017. 3. 15., 지리와 역사)

사진을 찍고 나니 핸드폰 게이지가 다 됐다.

배터리가 없어 시간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시간은 2시가 다 돼 가는 중이었는지 벌써 손님을 싣고 갈 배가 비양을 향해 오고 있었다.

배를 타고 한림항으로 돌아나오는데..
비양도라는 신비의 섬이 위대해 보였다.

아직 천연의 섬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올레길로도, 관광객들에게도 함부로 길을 내어놓지 않은 그런 위대함이었다.

제주도에도 아직 미지의 섬으로 있는, 섬 하나 정도는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새삼 고맙기만 한 것일까..

비양도로 들어가는 배가 2시간에 한번이라는 것이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싹 가셔버렸다.

비양은 은둔자의 모습으로 그냥 그대로 남아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인생열전(박영만 저)이 열한번 째로 소개한 인물은 블라디미르 레닌이다.

“세계 유명인들 중에서 가장 무거운 뇌를 가졌던 사람은 누구일까?..

17세기 영국의 정치가 올리버 크롬웰의 뇌는 2.222g이었다고 전해지지만 남겨진 두개골의 크기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 무게는 믿어지지 않는다.

다음으로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의 뇌가 2.002g으로 가장 무거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것 역시 정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뇌의 무게가 머리의 크기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아주 커다란 머리에 어울리게 매우 명석한 두뇌를 가졌던 인물을 들라면 단연 러시아의 정치가 블라디미르 레닌을 들 수 있다.


(중략)..기지가 있었고 풍자감각도 대단했다. 그러면서도 절대로 거만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그는 질문이 질문이 자기에게 오지 않으면 절대 앞으로 나서지 않았고,일단 자기에게 질문이 떨어지면 현명하고 사려깊게 대답했다고 한다.

레닌은 이미 이때부터 ‘거짓말과 비굴함은 가장 큰 악덕’이라는 신조를 갖고 살았다.


...레닌이 혁명가가 된 것은 그가 카잔대학에 다니는 동안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며서부터이다. 그는 입학 초기에 학생데모에 참가했다가 구속되었고, 곧 이어 학교에서 나와 1년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189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제1급의 대학졸업장을 받고 나와 보조변호사가 되었다가 1895년에는 유럽사회를 공부하기 위해 제네바 등을 여행하고 귀국한 뒤 ‘노동자계급해방투쟁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사회주의 선전 선동을 전개했지만 곧 체포되었다.


그래서 1897년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풀려났고, 1898년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형성될 때 이를 지지하였으나, 내부분열로 혼란해지자 1905년 런던에서 볼셰비키 회의를 조직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켜 소련 공산당 및그 전신인 볼셰비키당을 창설했다.

그는 유능한 사상가인 동시에 혁명지도자였으므로 1917년 러시아 국내외에서 혁명운동을 정력적으로 이끌어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하고 사회주의 최고지도자가 되었다.


1918년 레닌은 카플란이 쏜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그리고 총상의 후유증 때문에 2년 뒤에는 뇌동맥경화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병세가 악화되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당권을 스탈린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죽은 다음 우수했던 그의 뇌를 검사하기 위해 별도의 연구소가 만들어졌으며, 거기에서 그의 뇌는 3만4천 조각으로 분해,연구되었다.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말이 새겨졌다.


“미래의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게 살 것이다. 그들의 삶에는 그토록 잔혹한 일이 많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럽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 세대는 놀랄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일을 성취했으니까.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불가피했던 모든 잔혹한 일들은 결국 이해되고 변호될 것이다”

소위 혁명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도와 체제를 만들어내는 수장들이다. 혁명가에게는 사상적 정신무장과 확고한 신념, 그리고 강력한 실천력이 있어야 한다...

그는 잔혹한 희생을 치르고 이룩한 공산주의가 이해되고 지속될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그가 최상의 인간 사회체제로 확신했던,그리고 한때 자본주의와 대치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공산주의는 오늘날 붕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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