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일본군 진지..성산리 일출봉 특공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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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일본군 진지..성산리 일출봉 특공기지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7.12.06 0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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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에 대항,'신요오(震洋)'라는 자폭용 소형 보트 숨겨 놓았던 곳


성산리 일출봉신요오특공기지

 
日出峰 震洋魚雷艇特功基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311호
위치 ; 성산읍 성산리 산1번지 외, 남서쪽 절벽
시대 ; 일본강점기
유형 ; 전쟁 유적

 

▲ 성산리_일출봉신요오특공기지(고희범

▲ 성산리_진지동굴(시멘트).

일출봉 절벽에는 일본군이 파 놓은 동굴이 흉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일출봉의 남서쪽(수마포) 절벽에는 9개의 갱도진지가 있는데 서쪽 2개는 벽과 천정에 시멘트로 마감했고 나머지는 화산쇄설물퇴적층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이다.

동쪽에는 동굴 3개가 안쪽에서 서로 연결된 것도 있다. 모두 합하면 21개의 동굴이 있다. 시멘트로 마감한 굴에는 오늘날에는 해녀들이 쉼터로 이용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미군의 상륙에 대항하기 위한 '신요오(震洋)'이라는 자폭용 소형 보트를 숨겨 놓았던 곳이다.


결7호 작전에 따라 전남지방 광산 노동자들이 대거 동원돼 구축한 것으로 전해지는 진지갱도는 높이 3.5m, 길이 10m 내외의 '1'자형 외에 '王'자형으로 구축된 갱도도 1기가 있다

. '대양을 뒤흔든다'는 뜻의 일본 군함 이름을 딴 이 병기는 80마력짜리 엔진을 달고 뱃머리에 250kg의 폭약을 장착했다.

이 신요오 자살특공대로 인한 사망자는 필리핀 해역에서 9백여명, 오키나와 해역에서 159명이었지만 연합군의 군함에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고 한다.(제주포럼C 제13회 제주탐방 후기 고희범 글) 손인석은 2001년 발간한 《진지동굴 및 진지 조사연구보고서》에서 이를 전진거점기지로 분류하였다.

미군의 일본 본토 상륙을 저지하기 위하여 세운 '일본본토방어작전'을 "결□호 작전"이라고 하는데 이는 연합군의 예상 진격로를 7곳으로 설정하고 그 진격로를 막는 작전이다.

일본 본토 방어를 위한 제주도에서의 작전이 '결7호작전'이라는 것인데, 종전 직후 일본군 장교 두 사람이 작성한 『조선에서의 전쟁 준비』라는 책에 보면 "……濟州島に對する作戰準備の促進は最大の急務とな……"라는 귀절이 보인다.

서기1945년 4월초, 일본대본영 회의에서는 미군이 제주도를 거점으로 큐슈 북부를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미군의 제주도 상륙 시기를 8월 이후로 예상하여, 2-3개 사단을 제주도에 증강하여 제주도를 사수할 사령부를 신설하도록 결정하여 당시 인구 20만 정도였던 제주도에 일본 정규군 5만5천여명(조선인 포함 약7만명)이 집결하였다.

그리고, 독력으로 제주를 사수할 것을 명령한다.(sbs 『그것이 알고 싶다』"1945년 제주 결7호 작전의 비밀". 1993년 방송) 이 작전에 의하여 일본군은 제주도의 해안선을 1차 저지선으로, 중산간 오름들을 2차 저지선으로, 어승생에 지하요새를 만들어 최후의 결전장으로 작전을 세웠다. 해안 절벽 인공동굴은 일출봉을 비롯하여 삼매봉, 송악산, 수월봉, 사라봉 등에도 파 놓았다.


이들 격납고는 신요가 바로 출격할 수 있도록 해수면 바로 위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쪽 끝 격납고는 반쯤 모래에 묻혀있고, 바로 이웃 격납고는 바닥에서 4~5m 위에 위치해있다. 일출봉 동쪽에 설치된 방파제가 파도의 흐름을 바꾸면서 모래를 동쪽으로 밀어낸 탓이다. 시멘트로 잘 만들어놓은 격납고는 해녀들이 불턱으로 사용하고 있다.(헤드라인제주 110713)


다만, 연합군(미군)의 일본 침공 계획인 다운폴 작전(Operation Downfall)에는 연합군이 제주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규슈(1945년 8월)와 혼슈(1946년 봄)를 공격하는 것으로 계획이 되어 있었고, 맨하탄 계획의 성과로 원자탄이 개발되고 그에 피폭당한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였으므로 일본침몰작전은 시행되지 않았다. 다운폴 작전대로 진행되었다면 연합군은 제주도를 비켜갔을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성산포에서 신양 앞바다 쪽으로 일본군이 통신연락용으로 바다 밑에 매설한 약 1000m 정도의 구리선을 발굴하겠다고 허가 신청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 따른 해저촬영사진을 제시했다.(제민일보 1996. 4. 10.) 이 구리선은 아마도 어뢰정 기지와 섭지코지 동쪽 끝에 있었던 고사포 진지간의 연락용이 아니었나 하는 추정이 가능하다.
《작성 041205, 보완 1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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