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서학당..하가리 흥학비(한응호목사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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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서학당..하가리 흥학비(한응호목사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1.10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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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당 오등촌에, 서학당 상가촌에 각각 설치..순조때 4학당 세워


하가리 흥학비(한응호목사선정비)


하가리 흥학비 興學碑
위치 ; 애월읍 하가리 1504번지. 애월농협 간이집하장 앞
유형 ; 비석(선정비)
시대 ; 조선
뭄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애월읍 하가리 서학당 인근에 있는 흥학비는 순조34년(1834) 서민 자제의 교육 증진을 위해 창설, 조선시대말까지 제주 교육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西學堂을 세운 한응호 목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 후학들이 西學堂址(현 애월교 더럭분교장 서쪽 50m 부근)에 세웠다.

서학당의 유적과 유물은 거의 소실되고 유일하게 흥학비만 남아 있다. 서학당은 그 동안 문헌상으로만 전해져 정확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는데 제주대학교 박물관 강창언씨에 의해 처음 확인됐다.

이러한 서학당지의 흥학비는 감귤선과장 신축공사로 파헤쳐졌다가(제민일보 1994년 10월 25일) 다시 원래의 모습대로 세워졌다.

비석은 그가 떠난 후 2개월만에 세워진 것이다.(북제주군 비석총람 451쪽) 제주향교지에 의하면 한응호 목사가 순조33년(道光13년=1833)에 서학당(西學堂)을 세웠다고 한다.(제주향교지 293쪽)


비석에는 전면 ;〈使相韓公應浩興學碑〉 후면 ; 〈道光十四年九月〉이라 새겨져 있다.


한응호 목사겸방어사는 순조32년(1832) 2월에 부임하고 순조34년 7월에 떠났다. 1832년 연희각(延曦閣) 동남쪽에 영주협당을 중수하고 공제당(共濟堂)이라 이름짓고 군관들이 거주하도록 하였다.

1833년 봄에는 오등촌에 남학당(南學堂)을 상가촌에 서학당(西學堂)을 개설하고 포정문(布政門) 밖에 하마비(下馬碑)를 개건하였다.

제주시 화북에 동학당(東學堂) 건립, 한경면 차귀에 서학당(西學堂) 건립, 제주시 오등동 남학당(南學堂) 건립, 애월읍 하가리에 흥학당(興學堂) 건립. 이외 명지향편(名地向遍)을 축(築)하였다. (『탐라지(耽羅誌)』)
 

조선시대 제주도의 교육기관에 대해 살펴보면 조선시대 관학(官學)에 대한 사학(私學) 교육기관에 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학교조에 보면 제주에는 〈월계정사(月溪精舍)와 김녕정사(金寧精舍) 외에 성안에는 향학당(鄕學堂)이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성종17년(1486)으로 추정된다.

또 탐라기년에는 〈중종29년(1534) 겨울에 심연원 목사가 남성 안에 향학당을 세웠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건물을 신축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폐쇄되자 임형수(林亨秀) 목사가 인종 원년(1545)에 부임하여 김녕 포구 위에 김녕정사(金寧精舍)를 지어 동학이라 하였고 명월성 서쪽에는 월계정사(月溪精舍)를 지어 서학이라 하여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정사는 보통 명유(名儒)가 창건한 강학의 서재(書齋)이기 때문에 그의 문인들이 서원으로 발전시키는 모태가 되기도 하였으나 제주도의 경우는 향학당, 김녕정사, 월계정사가 일종의 개인의 서재적 서당으로 그치고 말아 정사가 서원으로 발전, 변모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이 두 정사의 기능이 상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무렵 좌우면에 학당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향교에서 시작되어 각청(各廳)과 각사(各社)가 안팎에서 호응하여 소장을 내었는데,

그 주된 내용은 ①주성 내에는 세 곳에 학당이 있으나 외곽인 좌우면에는 하나도 없다 ②좌우면은 주성과의 거리가 100리 정도 떨어져 있으므로 혹자는 집이 가난하여 출접할 수 없고 혹자는 길이 멀어 출접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목사인 이예연은 실질적인 이유를 주성은 노래와 여색, 술과 도박이 판치는 곳이므로 나이 어린 아이들이 방탕해질 것을 염려하여 그 부형들이 주성 내의 학교에 취학시키지 않으려고 각기 자기 면에 학당을 설치하게 해 달라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은 목사의 책임이라 여기고 1830년 겨울 학당 설치를 허락하였다. 각면에서는 자발적으로 공사에 참여하여 다음해인 1831년 2월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건물이 완공되자 각 15명의 접생을 두어서 항상 기거하며 학습을 익히게 하였다.(제주교육사 164쪽)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서당은 일반 서민의 자치적 성격을 내포한 서민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이 부각되면서 교육활동이 활발해졌다. 영조12년(1736) 김정 목사는 동문 안에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설립하고 재생 15인을 가려 늠료(廩料)를 주면서 교육시켜 많은 사람들을 배출시켰다.

삼천서당의 설립과 함께 제주삼읍에는 서당 설립의 움직임이 일어나 정조2년(1778) 정의서당이 설립되고 동왕19년(1795) 대정서당이 설립된다.


이원조의 「耽羅誌草本」학교조에 《순조31년(1831)에 이예연 목사가 좌학당을 세화촌에, 우학당을 명월리에 설치하였는데 부름접생(付廩接生 ; 름과를 주는 학생)이 각기 5인이었고, 순조33년(1833)에 한응호 목사가 남학당을 오등촌에, 서학당을 상가촌에 각각 설치하였는데 부름접생이 역시 5인이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이른바 4학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순조 때에 세워진 4학당(四學堂)은 재생들이 교육 때문에 출입하기도 하였지만 군역을 면하기 위한 구실로 출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유로 헌종12년(1846) 이의식(李宜植) 목사는 세화에 설치한 학당만 남겨두고 남서학당과 우학당을 폐지하였다.


이원조 목사는 이어서 《탐라록》에 쓴 1843년 3월 16일자의 《사학당이건기》에서 《탄환같이 작은 섬에 향교와 서원 서당이 설치되어 있는데다 4학을 더 설치하였고 그 늠사(4학의 학생)도 60명에 달하여 국학과 대등하게 되었으니 넘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넘치면 해이해지고 해이해지면 폐해지는 것이다.

이리하여 60명 중에는 선비다운 사람이 하나도 없고 4학에는 학교다운 학당이 하나도 없다.》하였으며, 〈전 영윤(令尹=牧使)이 나서서 4학의 학생 수는 줄였으나 학당을 줄이지 못한 것은 단지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여기서 전임 목사는 구재룡이며, 겨를이 없었다는 것은 구재룡 목사가 재임중에 파직되었음을 뜻한다.) 하여 4학당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그 결과 《강독과 제술을 독려하여 가르치자 날마다 제생이 주학에 모여들어 4학이 헛되이 설치되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하고, 그 중에서도 남학당이 더욱 심하였다고 했는데《우뚝하게 텅 빈 집 한 채가 바람과 흙비가 사방으로 침습하고 게다가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해 있었다.》고 하였다.

이런 연유로 선비들의 요청에 따라 남학당은 광양으로 이건하게 되었는데 《이는 먼 곳에서 가까워졌으니 나쁜 짓을 고쳐 착하게 되기를 바라고, 북쪽을 등지고 남면하여 방향을 바로잡고, 4학을 하나로 합쳐서 겉치레를 제거했다.》고 하였다.(제주교육사 162쪽, 교육제주 103호)

그러나 그 위치가 어디였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833년 가을에 饑饉이 있었으므로 곡식 600여석을 손수 준비하여 還耗穀을 충당하고, 또 820석을 준비하여 기민을 구휼하였으며, 또 봄에는 백성들에게 흉년에 대비하여 감저(甘藷=고구마)를 심도록 권장함으로써 도민의 기아를 구휼하는 데 노력하였다.(純祖 三十二年 牧使韓應浩建共濟堂以居軍官 在上衙東. 三十三年 春牧使韓應浩建南西學堂 南在梧登西在上加 秋機韓應浩自備穀六百餘石防還耗又以八百二十石給飢民․․․三十四年 春牧使韓應浩勸民貿種甘藷以備荒年) 고구마는 오늘날에도 귀중한 농작물의 하나가 되고 있다.


또한 순조24년(1824) 정월 한응호 목사는 김영락에게 명하여 효열록 6권을 만들어 향교, 영청 등에 배부하도록 했다.

이 효열록은 2009년 제주도 유형문화재28호로 지정되었다. 효열록은 1책 17장의 필사본으로 제주인의 효자 26인, 효부 5인, 열녀 27인, 의사(義士) 3인 등 의 행적을 수록한 것이다.(제주일보 090821)


제주목의 도로촌 효자 고한원(高漢元)과 송계호(宋繼豪)의 처, 하도촌 효부 김씨의 가문에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관덕정(觀德亭)을 중수하고 남취(南鷲)에 과수원을 만들었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그 밖에도 비변사등록에는 제주목사 재임기간에 1832년 익사한 康汝信의 생전 身還布를 탕감, 大靜縣에 漂到한 琉球國人을 陸路로 돌려보냄, 흉년이므로 舊還을 停退함, 1833년 익사한 7명에 대해 생전의 身還布를 탕감 등의 기사가 나온다.(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한응호 목사는


자 ; 양직(養直)
생년 ; 경인(庚寅) 1770년
합격연령 ; 31세
본관 ; 청주(淸州)
父 성명 : 한광적(韓光迪)
거주지 ; 안산(安山)
품계 :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 : 전행죽산부사 겸 여주진관병마동첨절제사후영장수어청후영장토포사(前行竹山府使兼驪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後營將守禦廳後營將討捕使)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참고문헌
제주사인명사전(제주문화원, 2002)
탐라지(耽羅誌)
증보탐라지(增補耽羅誌)
제주향교지
북제주군 비석총람
濟州市의 文化遺蹟(도서문화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제민일보 1994년 10월 25일
제주일보 2009년 08월 21일

《작성 041227, 보완 1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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