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태권사단..상모리 주먹탑(제29사단발상지탑)
상태바
[향토문화]태권사단..상모리 주먹탑(제29사단발상지탑)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2.22 00: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군이 주최하여 민간인을 대상으로 태권도대회 열기도


상모리 주먹탑(제29사단발상지탑)


주먹탑
위치 ; 대정읍 상모리 2820번지 농남못(녹남못) 옆
유형 ; 비석(기념비)
관련 사건 ; 한국전쟁

 

 

▲ 상모리_주먹사단비

▲ 주먹탑만만한투

1953년 모슬포 육군 제1훈련소에서 창설된 제29사단은 '태권사단' 또는 '주먹사단', '익크부대'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 부대가 태권사단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당시 사단장이었던 최홍희 장군의 각별한 태권 사랑 때문이었다.

최 장군은 그 시절 당수도·공수도 등으로 불리던 무술에 태권도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부대원들의 경례 구호도 '태권'으로 외치게 하고 장병들에게 처음으로 태권 훈련을 실시하는 등 태권도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최홍희(崔泓熙)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생몰 1918년 11월 9일 ~ 2002년 6월 15일
함경북도 명천 출신


14세 때 명필가였던 한일동 선생에게서 서예와 고대 "태껸"을 배웠다.
1938년 일본으로 가서 선배로부터 가라데를 배우기 시작


1943년 일본 주오(中央)대학 전문법학과 졸업하였다. 이 시기 경도에서 '가라데'에 입문하여 이단까지의 기량을 숙달했다. 동대학 법학과 1학년에 재학중이던 1944년 1월에 징용되어 평양의 42부대에서 근무하였다.

그는 조선 학병을 중심으로 전국 반일동맹 조직을 도모하다가 검거되어 6년형을 선고받아 평양 형무소에서 복역중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http://blog.daum.net/itf-tkd/태권일신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사형 집행 2일 전에 해방이 되었다’고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서울에서 영어군사학교(국군창설요원) 수료
1946년 국방경비대 입대(육군 참위 임관), 대령 시절 미육군 군사학교에서 초등군사반, 고등군사반 수료 직후 한국전쟁 발발로 귀국.


1953년 9월 제주도 모슬포에서 제29사단(별명 ‘익크부대’) 창설 및 사단장 역임. 사단 마크는 '한반도 형상에 가운데 주먹'이 그려져 있다. 이 때 주먹탑 건립


1954년 여름 강원도에서 오도관 창설 및 사범 양성
1954년 말경 ‘태권도’명칭 창안, 당시 일부 관(군대)을 중심으로 ‘태권도’라는 명칭 쓰이기 시작


1955년 4월 11일 명칭제정위원회 회의에서 ‘태권도’채택
1955년부터 3군관구 사령관으로 1960년부터 제 2훈련소장, 1961년부터 6 군단장을 역임하였으며 1962년에 예편하였다. 1958년에 대한태권도협회를 창립하였다.


1958년 대한체육회 가입절차를 밟고 있던 중 1960. 4. 19의거로 인해 결실을 보지 못함
1961년, 논산 육군훈련소장으로 근무하던 그는 박정희와 쿠데타를 논의하였으나, 쿠데타 성공 후 소외되어 주말레이시아 대사로 근무하였다.


1965년 1월 대한태수도협회(1961년 9월 16일 창립) 제3대 회장(1965.1.15∼1966.1.29)으로 추대된 최홍희는 '태권도'라는 명칭을 회복하고자 이사회를 소집, 제3차 회의에서 가까스로 한 표차로 '태수도'에서 '태권도'로 개명하는 데 성공(1965. 8. 5)


1966년 3월 22일 국제태권도연맹(ITF ; 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폴, 미국, 서독, 이탈리라, 터키 9개국)를 창립한 후 총재로 취임


1972년 3월 캐나다로 망명한 후 박정희의 유신체제 반대 운동을 펼쳤고 북한을 몇 차례 방문
1980년 10월 평양체육관에서 태권도 시범


1999년 9월 2일 국제무도경기위원회 창설(17개국 가입)
2002년 6월 15일, 평양에서 사망한 뒤 혁명열사릉에 안장

높이 5.5m, 둘레 14m인 이 탑은 삼각기둥 모양의 각면에 〈剛健한 體力〉〈徹底한 訓練〉〈滿滿한 鬪志〉(글씨는 최홍희 장군의 친필임)라는 구호가 새겨져 있으며, 맨 위에는 한반도의 모양을 단순화한 도안 속에 오른손 주먹을 그려 넣은 돌(이 그림은 부대 마크였음)을 세웠었다.

옛사진을 보면 삼각기둥 밑에는 사각기둥이 받치고 있고, 그 밑에는 돌을 쌓아 만든 3단의 원형 계단이 받치고 있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정읍 상모리 2831-1번지에 있었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 버렸었다. 제주도의회 강호남 의원에 의하면 탑이 사라진 것은 1985년 11월이었다고 한다.

전경환이 모슬포 군비행장을 방문하기로 예정된 때였다. 전두환이 아니라 전경환이었는데도 전두환 못지 않은 힘을 느꼈던 것인지 그가 방문할 곳이라고 해서 탑을 깨고 묻어 버린 것이다.

이유는 '친북인사 최홍희와 관련이 있는 탑이라서'이다. 없어진 것을 알아챈 강 의원이 읍장에게 따져 물어서 '비밀'을 지킬 것을 전제로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누가 시킨 일인지는? 모르겠다.


그 후 2000년 11월 대정읍 개발협의회는 대정 지역이 태권도의 발원지라는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탑을 복원하기로 하고 탑 매몰 추정지인 상모리 2849-5번지 일대를 발굴한 결과 29사단 발상지 탑을 찾아내었다.

주먹 부분이 분리되어 있었고, 삼각기둥 모양의 탑신도 두 조각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글자도 만만한 투지의 일부는 훼손된 상태였다.

개발협의회는 캐나다에 거주하는 최 장군을 찾아가서 글씨를 다시 받아오기도 하였다. 2002년 복원할 때에는 약간 훼손되기는 했지만 원래 탑신을 그대로 끼워맞춰서 복원했다.

기단은 3단 사각형 계단 모양이다.
(제민일보 2000년 9월 23일, 2000년 11월 3일, 2001년 8월 29일, 2003년 3월 21일) (서귀포신문 2000년 11월 10일) (제주일보 2001년 11월 17일) (http://enc.daum.net/dic100/위키백과) (http://cafe.daum.net/kwonkoktkd/권곡태권)


발굴 당시 탑은 3등분으로 동강났고, 글씨도 심하게 훼손됐다. 강수일 대정읍개발협회 회장은 복원을 위해 캐나다에 망명 중인 최홍희 총재로부터 탑에 새길 친필을 받아왔다.

 그런데 부서진 조각을 붙여 각인된 글자를 복원하는 데 전문적 기술이 부족했고, 예산도 모자랐다. 또 공사를 하던 인부가 추락 사고를 당해 복원은 더디게 진행됐다. 이로 인해 발굴 후 4년이 지난 2004년 3월에야 원형을 유지한 발상탑이 세상에 모습을 보이게 됐다.


이를 계기로 ‘모슬포와 태권도’를 제목으로 회고록을 집필한 강호남 전 의원은 태권도공원 유치에 앞장섰다. 정례회의 도정 질문 때마다 발상탑의 문화재 지정 필요성을 강조했었다.


강 전 의원은 “모슬포가 태권도 발상지인 것을 널리 알리기 위해 용역을 입안, 보고서를 작성했으나 북이 주축이었던 국제태권도연맹(ITF)에 대한 이념적 갈등 때문에 공무원들은 용역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며 “태권도공원을 무주로 결정한 것은 후보지 선정에 대한 역사와 고증을 외면한 정치적인 논리에 따른 것이지만 당시 제주도와 남제주군이 반론 제기를 않고 포기한 것이 더 안타까울 뿐”이라고 밝혔다.(제주일보 130211 좌동철 기자)


1960년대말 월남파병과 맞물려 전군 태권도 의무화가 시행되었고
1971년 박정희에 의해 국기(國技)로 제정되었다.

2006년 7월 발간된 '제주태권도50년사'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 있다.


"한편 1953년 9월 모슬포에 창설된 육군 제29사단(사단장 최홍희) 일명 '익크사단'에서 장병들의 기초체력 단련과 호국무술로서 태권도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제29사단에서 행한 것은 군대 조직 내에서 훈련과정으로 행해진 것으로 민간인들에게는 영향력이 없어 제주 태권도와는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모슬포 주민 증언으로는 군이 주최하여 민간인을 대상으로 태권도대회를 열기도 했다고 한다. 구태여 관련없다고까지 기술한 까닭이 의심스럽다.
《작성 050220, 보완 140528》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