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척사위정..일도1동 최익현 적거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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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척사위정..일도1동 최익현 적거 터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8.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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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의 친정 강조하고 흥선대원군의 퇴진 강력히 주창

일도1동 최익현 적거 터


 

위치 ; 일도1동 1289-1번지
유형 ; 위인선현유적
시대 ; 조선

▲ 최익현_영정부분
▲ 일도동_최익현적거_터

 

최익현은 14세 때 화서 이항로 문하에 들어가면서 정식으로 공부를 시작하였다. 이항로는 한말의 대유학자로 유림들에게 큰 존경을 받던 인물로서 제자들에게 특히 성리학의 명분론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의리(春秋義理)를 강조하였다.

당시는 조선의 성리학적 사회 질서가 파괴되어가는 시기였는데 그는 제자들에게 척사위정에 의한 전통 회복과 창의호국할 수 있는 정신적이며 실천적인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최익현의 사상은 척사위정이 바탕일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스럽게 민족 자주권의 회복과 구국항일 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당대 유림을 대표하며 수많은 선비들의 신망을 한몸에 모았던 면암 최익현은 1866년(고종 3년) 5월 사헌부지평으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2년 뒤인 9월 사헌부 장령으로 다시 복귀하였다.


이듬달에 그는 시정의 폐단 4개조를 들어 흥선대원군의 정책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때는 명성왕후를 중심으로 흥선대원군의 반대세력이 싹틀 때였으므로 그는 돈녕부도정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들이 상소를 문제삼아 강력 탄핵을 요구하자 그는 사임하고 낙향하였다.


이태 후에 다시 부승지로 발탁받자, 이 때부터 흥선대원군에 반기를 드는 선봉장이 되어 1873년(고종 10년) 10월 흥선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처음 상소에는 고종은 최익현을 호조참판에 제수하였으나 이듬달에 올린 상소는


「만동묘의 훼철은 군신의 윤리가 무너진 것이요, 서원의 혁파는 사제간의 의리가 끊어진 것이요, 거기에다가 토목 공사와 원납전은 서로 안팎이 되어 백성에게 재앙이 되고 나라의 화가 되는 요인이 되어온 지 몇 년이 되었으니, 이것이 선왕의 옛 법을 변경하고 천하의 인륜을 무너뜨리게 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고관이 아닌 왕족은 다만 지위를 높이고 국록을 후하게 하되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고종의 친정을 강조하고 흥선대원군의 퇴진을 강력히 주창한 것이었다. 고종은 임금을 능멸하는 말이 많고 부자간을 이간시켰다 하여 유배령을 내렸으나 신하들이 국청을 설치하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제주목에 위리안치하라고 명령이 내려졌다. 이 때부터 고종은 친정을 선포하게 되어 흥선대원군의 세도권불십년(권세가 십년을 가지 못한다는 말)이 되었다.

그는 추자섬을 지나 조천포에 도착하여 제주목에 있는 윤규환의 집(현재 칠성통)에 적소를 정하였다. 그는 적소에서 조용히 지내면서 유일하게 가지고 온 <주자서>를 외거나 송시열의 <우암집>을 빌려 읽으면서 글보기를 즐겨하였다. 어느 날 그는 얼핏 떠오르는 생각을 시로 읊었다.



우음


세월이 갈수록 성인 말씀 더 분명하니
섬 마을에도 글 읽는 소리 들려오네
가여워라 저 수없이 날뛰는 무리들
제 몸만 알고 나라 근심 몰라주네

제주목사 이밀희는 음식을 제주목에서 대어 주는 등 그에게 후하게 대해 주었다. 그는 귤림서원을 가보기도 하고 틈틈이 산수를 유람하여 제주 지리에 익숙할 정도였다.

한번은 문연사에 올라 직접 나무를 식수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동행했던 오라리에 사는 문인 이기온은 후에 스승을 기리며 사장수포차배(師長樹抱且拜, 스승이나 선배는 큰 나무와 같으니 때로는 친밀하게 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절하는 마음으로 공경을 표해야 한다)라는 글을 돌에 새겼다.(유배지에서 만난 한국역사에서)

그는 적거한 지 1년 4개월 만에 해배되었다. 열흘 후인 1875년 3월 27일에 그는 문인 이기온 등 선비들과 함께 한라산에 올라 백록담의 동벽 바위와 방선문에 그의 마애명을 새겼고 천불암 등의 명승을 두루 구경하였는데 기행수필<유한라산기>를 남겼다. 후일 유배 중 가장 큰 소득은 한라산 유람이었노라고 친구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다고 한다.

최익현의 길안내를 맡은 이기온은 광해군때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다 유배를 왔던 이익의 후손이다. 최익현과 이기온의 만남을 기리는 유적으로 문연사(文淵社)가 있는데 1931년에 만들어진 이곳은 최익현과 이기온을 추모하여 매년 정월 중순에 제사지내는 제단으로 제주시 오라리 2951번지에 소재하고 있었지만 1977년 도시 계획으로 이설되었다.


최익현의 위정척사 정신은 이기온의 아들인 이응호에게 이어져 제주도 항일 비밀 결사체인 집의계(集義契)를 결성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좌겸,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계숙, 김기수 등 12명이 의기투합했던 단체로서 외세의 도전에 의해 조성된 주체성의 위기에 대한 대응 문제를 모색했던 당대 제주도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

최익현이 유배생활을 했던 자리에는 지금 SK텔레콤 제주도직영점이 들어서 있으며 그 앞에 제주시가 세운 안내 표석이 있다.

그 후 선생은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을 강압하자 일본제품의 불매운동과 납세거부에 이어 1906년 6월 위정척사의 깃발을 들고 74세의 고령으로 의병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 때의 격문《布告八道士民》(팔도의 사민에게 널리 고함)은 다음과 같다.

古之亡國也, 只宗社滅而已; 今之亡國也, 並人種而滅. 古之滅國也, 以兵革; 今之滅國也, 以契約. 以兵革, 則猶有勝敗之數; 以契約, 則自趍覆亡之塗. 嗚呼! 去十月二十一日之變, 是或全世界今古曾有之事乎? 我有隣國而不能自交, 使他人代交, 則是無國也; 我有土地人民, 而不能自主, 使他人代監, 則是無君也. 無國無君, 則凡我三千里人民, 皆奴隷耳, 臣妾耳. 夫爲人奴隷爲人臣妾, 而生已不如死矣. 况以彼狐欺狙詐之術之施於我者而觀之, 其不肯遺我人種於此邦之域者, 不啻較然矣. 然則雖欲求爲奴隷爲臣妾而生, 寧可得哉?
……況以我堂堂大韓禮義自主之民, 區區屈首於讐賊之下, 而欲丐一日之生, 豈有愈於死者乎? 下蔭之木, 枝葉不茂; 餘踐之草, 萌蘖不長; 奴隷之種, 聖贒不生. 此非其性質有異也, 其壓迫伏制之勢, 使之然也.(이하 줄임)

今日 國事를 어찌 차마 말하랴. 昔日에 國을 亡함에는 宗社만이 滅하더니 今日에 國을 亡함에는 人種까지 滅하며, 昔日에 國을 滅하는 데는 전쟁으로 하더니 今日에 國을 滅함에는 契約으로써 하도다. 戰爭으로써 하면 勝敗의 數나 있지만은 契約으로써 하면 스스로 멸망하는 길로 달리게 되도다.

(옛날에는 나라가 망하면 종묘사직이 없어질 뿐이었는데, 오늘날은 나라가 망하면 인종까지 함께 없어진다. 옛날에 나라가 멸망한 것은 전쟁 때문이었는데, 오늘날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계약 때문이다. 전쟁 때문에 망할 경우에는 승패를 겨루어 볼 수라도 있지만, 계약 때문에 망할 경우에는 스스로 멸망하는 길로 달려가게 된다.)


嗚呼라! 지난 10월 21일 事變은 이것이 惑 全世界 古今에 일찍 있던 일이랴. 우리에게 隣國이 있지마는 스스로 交涉하지 못하고 他人으로 代身케 하니 이는 國이 無함이요, 我에게 土地가 있지마는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고 他人으로 다스리게 되었으니 이는 君이 無함이라. 國이 無하고 君이 無하면 我의 三千里 人民은 모다 奴隸이며 臣妾이니 남의 奴隸되고 臣妾이 되어서 生하는 것은 이미 죽음만 같지 못하거든 하물며 저들의 여호의 속임과 원숭이의 얼림수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건대 벌써 우리 人種을 이 나라에 남겨 두지 아니할 것이 뻔한 노릇이로다. 그렇고 본 즉 비록 奴隸되고 臣妾되어 生存하기를 求코자 한들 어찌 얻을 수 있으랴.

(아, 지난 10월 21일(양력 11월 17일)의 변고는 전 세계 고금에 없었던 일이다. 우리에게 이웃 나라가 있지만 스스로 외교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하게 되었으니 이는 나라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에게 국토와 국민이 있지만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고 타인을 시켜 대신 감독하게 하였으니 이는 임금이 없어진 것이다.

나라가 없고 임금이 없으니 우리 삼천리 인민은 모두 노예이고 신첩(臣妾)일 뿐이다. 남의 노예가 되고 남의 신첩이 되었다면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하다. 더구나 저들이 우리에게 교활한 속임수를 쓰는 것을 보면 우리 인종을 이 나라에 남겨두지 않으려는 속셈이 매우 분명하다. 남의 노예와 신첩이 되었는데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있겠는가.)


무슨 말이냐 하면 國에 財源이 있음은 人에 血脈이 있음과 같은지라 血이 끊어지면 人이 死하나니 今에 我國의 財源이 나는 바는 크나적으나 저이들이 움켜쥐지 아니함이 있느냐? 鐵路나 鑛山이나 漁業이나 蔘圃나 모다 一國의 生財의 源이어늘 저들이 빼앗은 지가 벌써 몇 년이요. 國의 經費는 오직 稅金收金이어늘 이제 모다 손아귀에 빼앗아 넣었으니 皇室의 費用까지도 저들에게 비럭질하여서야 得하며 海關出入의 稅도 그 數가 不少하거늘 我國이 간여치 못하고 電郵兩司는 通信의 機關이어서 國家에 關係됨이 매우 重大하거늘 저들이 亦是 奪取하였으며, 土地로 말하면 各港市와 停車場 等地가 縱과 橫으로 數千里 되는 것이 모다 彼의 所有가 되었고, 原野 기름진 땅과 森林禁養의 處도 저들에게 劫奪된 것이 몇 곳인지 알 수 없으며, 貨幣로 말하면 白銅貨의 弊가 진실로 大瘼이라 하거니와 저 私鑄한 僞造貨幣는 저들의 所爲어늘 그 개조함에 일으러서는 新舊의 正惡과 色質의 輕重이 조금도 差別이 없건마는 價格만 倍增할 뿐이었은 즉 다만 저들의 謀利의 資料가 되었으며 또 그 通行하지 못할 종이쪽을 元位貨라 억지로 命名하여서는 우리의 血脈을 마르게 하고 百物을 不通케 하였으니 그 凶計와 毒手는 眞實로 慘酷하다 하리로다.


人民으로 말하면 各處 鐵路의 役夫와 露日戰爭時의 짐군들은 소와 같이 채찍질하고 도야지와 같이 몰아쓰다가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풀포기를 베듯이 砲殺하여 吾民의 父子兄弟로 하여금 원한을 품게 하며 아픔을 안고서도 呼訴할 수 없게 하였으며, 高官貴族과 班常이 前後하여 상소한 것이 모다 國家를 爲하여 忠誠스러운 建議어늘 문득 捕縛하고 가두어 비록 大臣과 重臣까지라도 조금도 禮遇하지 아니하였은 즉 우리를 凌蔑함이 다시 餘地가 없었으며, 私人을 各部에 配置하고는 顧問官이라 하여 厚俸을 받아먹고 그 하는 일은 모다 우리를 말라 비트러지게 하며 저의들을 위하는 것뿐이니, 이러한 不法無道하게 壓迫抑奪하는 일의 큰 대목만 들더라도 오히려 이러하거든 그 約束하고도 信行치 아니하며 盟約하고도 固守치 아니하는 罪에 이르러서는 馬關條約으로부터 露日宣言書에 이르기까지에 大韓의 自主獨立을 외침이 정녕할 뿐 아니라 우리 領土를 保存한다 함이 하나둘뿐 아니어늘 모다 容易하게 抛棄하고 조금도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처음에는 賊子 李址鎔을 誘惑하여 議定書를 勒締하고 내종에는 逆臣 朴齊純을 협박하여 新條約을 맺어 通監을 國中에 置하고 外交를 日本에 옮기어 三千里 疆土와 二千萬人으로서 저들의 植民地 屬民을 삼았으니 世界의 所謂 保護國이 될 뿐만 아니로다. 그러나 屬民이 되었으면 오히려 그들의 人民과 平等이 對決하여 그 자리를 누리고 그 삶을 이루게 되어야 할 것이오. 國家는 亡하였으나 人種은 滅치 아니하련마는 말대답해 보라, 위에 列擧한 不法不道의 事로 볼진댄 그 果然 우리 人種을 이 地域에서 어디로 보내려는 것이냐? 必然코 吾民을 보다 險한 구덩이에 쓰러넣지 아니하면 반드시 허허벌판에 驅逐하고 저의 國民을 移植하고야 말지니 이는 西洋의 人種 바꾸는 法을 日本이 우리에게 베프는 것이라 그런 즉 먼저 말한 바 奴隸되고 臣妾되어 生을 求하여도 얻을 수 없다는 말의 眞理를 알지로다. 하물며 堂堂한 우리 大韓의 禮儀自主國民으로서 區區하게 怨讐의 발 아래 무릎꿇고 하루 살기를 求한다 한들 죽음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랴!


그늘 밑에 나무는 枝葉이 茂盛하지 못하고 짓밟힌 풀은 돋아나지 못하며 奴隸의 씨에는 聖賢이 나지 못하니 이는 그 性質이 다른 것이 아니로다.壓迫하고 억누르는 탓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니라.


我國이 高麗 以來로 이름은 비록 中國의 藩邦이라 하나 土地와 人民과 政事는 우리가 自主하였고 精兵이 百餘萬이요 財貨가 府庫에 가득차 있고 百姓이 殷富하고 人口가 잘 늘어 비록 隋煬帝와 唐太宗의 威嚴으로도 敗하여 돌아감을 免치 못하였고 元世祖의 勇으로도 用兵한 後에야 取服하였으며 我太祖時에 當하여는 倭人이히 侵略하다가 여러 번 敗하였고 壬辰의 役에 明의 救援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 恢復하고 全勝한 功은 모다 我兵이 倭船 數百을 鳴梁에서 沈沒함에 있으며 丙子의 亂에도 林忠愍公의 巢窟을 直接 파자는 計를 썼던들 淸人이 陷沒하였을 것이어늘 恨할 뿐이언정 力이 不足하였던 것이 아니니 이로써 보건댄 我國이 비록 좁고 작으나 人民의 性格이 强力함은 他國에 밀릴 것 없건마는 다만 지금은 文治의 餘波로 民氣가 줄어들어 되살지 못하고 또 能히 天下의 大勢를 알지 못하는 故로 死가 目前에 在함을 알지 못하도다.


萬一 사람마다 必死할 줄을 알면 生할 道가 그 中에 在하련마는 다 그 必死할 줄을 알지 못하고 或時나 살 것을 행여나 하는 故로 마침내 죽고 잘 살지 못하나니라. 必死의 證據가 이미 위에 말한 바와 같거늘 惑 生의 道를 장차 何處에서 보리요? 今日의 計로는 오직 제각금 氣力을 분발하고 心志를 鍊磨하여 愛國하기를 愛身하기보다 勝하게 하며 사람의 밑이 됨을 싫어하기를 죽음을 싫어함보다 더하여 능히 萬人의 心으로 一心을 삼으면 혹시나 죽음 가운데의 삶을 求하는 道가 되리로다.


저 日本人이 비록 가볍고 깜찍하며 無禮無義하여 人道에 合치 못하건마는 그 强力히 獨勝하는 것은 다른 것 아니라 能히 그 心力를 合하여 愛國하기를 愛身보다 더하는 탓이니 하물며 吾民은 本來 先王禮義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사람 사람의 腦髓 속에 용솟음치는 赤血이 저보다 다른 것이 없을까 보냐?


그런 즉 今日 吾人의 最先急務는 天下의 大勢를 살피어 必死할 必要性을 앎에 있으니 대개 必死할 줄을 안 後에야 氣力이 스스로 奮發하고 心志가 스스로 연마되어 愛國의 誠을 自然히 發하고 合心의 功은 自然히 나타나리니 이에 있어 依賴하고 仰望하면 心思를 버리고 懶惰하고 萎縮한 習慣을 저버리고 어물어물 지나가는 弊를 고치어 尺進이 있을지언정 寸退가 없으며, 차라리 함께 죽을지언정 홀로 살려 아니하면 衆心이 뭉치는 바에 하늘이 반드시 도우리라.


저 閔∙趙 兩忠正의 死를 보지 못하는가? 國家가 亡하고 人民이 滅하는 것이 二人의 責任이 아니언마는 이 二人인 者 能히 國家와 人民으로서 自己의 責을 삼았는지라 生命을 捐하기를 鴻毛와 같이 하면서 조금도 生命을 돌보지 않은 것은 吾民에게 必死의 義를 보이고 二心이 없는 까닭이니 만일 우리 三千里人民이 모다 二公의 心으로써 心을 삼아 그 必死할 마음을 가지고 두 마음이 없으면 어찌 逆賊을 除去치 못하며 國籍을 恢復치 못하랴?


崔益鉉은 誠이 淺하고 力이 薄하여 이미 能히 忠을 다하고 君에 告하여 患을 싹트기 전에 녹여 헤치지 못하였고 또 能히 身을 捐하고 國에 殉하여 民氣를 鼓吹 奮發케 못하였은 즉 내려보고 올려보니 낯이 뜨겁고 부끄러워 살아서는 우리 數千萬同胞를 對할 수 없고 죽어서는 二公을 地下에 뵈올 수가 없는지라 이에 敢히 비열을 不顧하고 今日 時局大勢의 듣고 본 바로서 簡略하나마 이렇게 全邦 士民에게 布告하노니 願컨대 全邦士民은 崔益鉉의 죽게 된 늙고 썩은 말이라 하여 소홀히 버리지 말고 各各 自勉自勵하여 저들로 하여금 人種 바꾸는 計策을 이루지 못하게 하면 幸甚이겠노라.(사단법인 독립동지회, 韓國獨立史 138~140쪽)


"아, 저 일본의 적(敵)은 실로 우리의 백대의 원수로서, 임진왜란에 이능(二陵)의 화를 입은 것을 어찌 차마 말하겠는가?

또한 병자수호조약(丙子修護條約)을 맺어 한갓 외국의 엿보는 바가 되게 하였다. 수호조약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공갈협박의 환란이 문득 이르러 우리의 정부를 능멸하고, 우리의 도망한 역적을 감싸주며, 우리의 강상(綱常)을 어지럽히고, 우리의 의관(衣冠)을 부쉈으며, 우리의 국모(國母)를 시해(弑害)하고. 우리 임금의 머리를 깎는가 하면, 우리의 관원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백성을 도륙(屠戮)하였고, 우리의 묘지와 재산으로써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는가. 이러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저들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호라, 작년 10월에 저들이 한 행위는 만고에 일찍이 없던 일로서......우리 의병군사의 올바름을 믿고, 적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에 격문을 돌리노니, 도와 일어나라"(<勉庵集 雜著> 격문 <사료로 본 한국문화사> 인용, 이광린.신용하 편저 일지사 참조)

전북 태인에서 거병하여 4백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체포되었다.

일제는 면암 최익현 선생을 의병전쟁의 최고수령으로 지목하여 서울로 압송하지 않고 멀리 바다 건너 대마도에 격리시켰다.

하지만 면암 최익현 선생은 대마도에서 일제가 주는 음식을 끝까지 거부하여 1906년 11월 17일 죽음에 이르렀다.

결국 살아 돌아오지 못한 채 유골이 되어 조국강산에 뿌려졌다. 대마도 이쯔하라 항구의 한켠에 그의 순국을 기리는 추모의 비석이 백년 풍파를 견디며 서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11월 17일을 순국선열의 날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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