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공덕동산..건입동 고서흥공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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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공덕동산..건입동 고서흥공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8.08.29 00: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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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장(警民長) 고서흥, 일년내 농사지은 조 3백석 내놓아 도로개척

건입동 고서흥공덕비
 

高瑞興功德碑
위치 ; 제주시 건입동사무소 동쪽 20여m 지점
유형 ; 마애명(기타 비석, 공덕비)
시대 ; 조선

▲ 건입동_고서흥공덕비
▲ 건입동_고서흥공덕비

 

제주시 건입동 기상청 북쪽에 있는 바위언덕길을 속칭 「공덕동산」이라고 한다. 공덕비는 이 길을 뚫은 高瑞興을 기리기 위해서 설치한 것이다.


자연암석을 다듬고 새긴 비문을 보면 상부에 「高瑞興」이라고 이름을 새기고, 그 아래쪽에 조금 작은 글씨로 두 줄로 「捐出私財 攻石治路」라 새겼으며, 오른쪽 구석에 「丁丑 二月 日」이라 되어 있다.

정축년은 당시의 기록 등을 종합해 볼 때 고종14년(서기1877)으로 해석된다. 이 비문을 중심으로 암벽에 붙여 석실을 만들었다.


당시 건입포 주민들은 동문 밖으로 통하려면 북문과 동문을 거쳐 우회해야 했으므로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젊은 사람들은 바위언덕을 타고 넘어다녔는데 자칫 실수하면 낭떠러지에 떨어질 위험이 많았으므로 그것도 밤에는 도저히 건너다닐 수 없었다.


경민장(警民長)이던 고서흥은 일년내 농사지은 조 3백석을 고스란히 내놓고 석수와 인부를 사서 도로개척공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암반을 부수어 길을 뚫는 일이었으므로 여러 차례 난관에 부딪혔다. 그래도 끝까지 이를 극복하여 길을 개척하는 데 성공했다.

동리 사람들은 그의 공덕에 감사하여 그 바위언덕을 「공덕동산」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가 뚫어놓은 길목에 비문을 새겨 그의 은혜를 기렸다.(제주의 문화재 332쪽)


그의 손자 고인도(高仁道)는 일제강점기에는 18년 동안 건입리장을 했으며 초대 도의회 의원을 지냈고, 산지천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점유허가되어 물의를 빚자 관이 점유 및 신축허가를 내주지 않도록 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때 위원장이 되기도 하였다.

또 일본 군인들이 삼성혈 경내의 소나무를 베어 목재로 쓰려고 하자 단신으로 군사령관을 방문하여 담판을 벌여 벌목을 방지하기도 하였다.(제주인물대사전)


지금은 공덕비가 있는 곳 위로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고, 공덕비는 철제 울타리를 두르고 주위에 깎은 돌을 깔아 단장하였으며, 옆 벽면에 안내문과 함께 [健入里民人等狀]이라는 제목의 옛문서를 돌에 새겨 붙여 놓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健入里民人等狀


右等狀事段夫道路修□莫先於國政而至於本里僻左海窮地陷地處則里東禁山兩岐者危險長遠來往右 攀綠崖壁蜀道至難難於上靑天也自設洞數百年以來老少民人雖欲(?)治平有志未就矣去月分本府修□道路傳今之下鄕會公議則面徒後言者十尙八九故警民長高瑞興素非富民□玆□年自辨粮米與財力招□石工及役夫□高□低如彼險路便作平地不半月而畢役且備酒肴至於落威以昔衆民之所□賴今一人之極力難可報恩也非但里民之穩涉亦□島人之安步則豈不美事哉如此萬世流傳之恩功不□一鄕曲會之論議是乎所玆以齊聲仰訴爲去乎伏乞 洞燭敎是後特垂 處分之澤千萬祝手爲白□爲 行下向敎是事 使道 處分 丁丑二月 日 (초서 큰 글씨로) 聞極嘉尙□此之 人不可無褒賞 公□入分□□ (手決) 큰 도장 꽉


《작성060305, 보완 17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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