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고려 군사 축조..애월리 환해장성 1구역(동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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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고려 군사 축조..애월리 환해장성 1구역(동쪽)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1.2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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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해장성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에 축조된 고려 후기 석성이라고 정의

애월리 환해장성 1구역(동쪽)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49호
위치 ; 애월읍 애월리 1880번지, 1947번지, 1947-1번지, 애월리 1957-1번지
시대 ; 고려∼조선
유형 ; 방어유적(성)

▲ 애월리_환해장성동쪽
▲ 애월리_환해장성_동쪽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는 환해장성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에 축조된 고려 후기 석성이라고 정의하고, 바다를 통해 침입하는 군선과 상륙 군사들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적인 성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고 해설하였다.


고려 시대에 원종은 진도에서 제주도까지 거점을 확보하려는 삼별초 군사들의 작전을 막기 위해 고려 군사들을 제주에 파견하여 방어하도록 하였다. 환해장성은 그런 당시 상황 속에서 고려 군사들에 의해 축조되었다.


『탐라기년』권1 ‘탐라’편에


〈全羅按察使權遣 靈光副使金須以兵二百來守 又遣將軍高汝霖以兵七千繼之 時 賊猶保珍島未至須汝霖等因築環海長城(전라안찰사 권〇은 영광부사 김수(金須)에게는 군사 200명으로 가서 지키게 하고, 장군 고여림에게 군사 7천명을 이어 보내며 이에 따르게 했다.

이 때 삼별초는 아직 진도(珍島)를 확보해 이곳에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김수와 고여림 등은 환해장성을 구축해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려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고여림 장군 등 고려 관군은 원종11년(1270) 9월 제주에 들어와 삼별초군과 싸우다가 같은 해 11월에 들어온 삼별초 별장 이문경의 군사에게 패전, 전사하였다.

고려 후기의 문신 최해(崔瀣)는 자신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 관군이 패전한 이유에 대해 ‘현지 방어군이 적극 협력하지 않았고 현지 주민들 또한 삼별초를 도왔기 때문에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고 기술하였다.

당시 제주도 주민들이 삼별초를 도운 것을 두고 학계에서는 삼별초의 대몽 항쟁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리들의 수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고 보고 있다.

제주도에 입성한 삼별초군은 진도에서 패전한 아픔 때문에 서둘러 방어진 구축을 시작하였다. 환해장성이 300여 리에 달하는 장성이 된 것은 삼별초군의 영향이 크다.

삼별초 군사들이 원종14년(1273)에 패전한 후, 헌종10년(1845)의 권즉(權莭)목사에 의해 대대적인 보수 때까지 환해장성은 계속 수리, 증축되었다.


환해장성의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분명한 것은 여몽 연합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 군사와 관련이 있으며, 전란 중에 전투적인 목적으로 고려 군사들에 의해 축조된 성이라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여몽에 항거하던 삼별초가 강도(江都)에서 남하하여 진도에 이르러 주위가 3만 8,741자, 높이가 5자에 이르는 용장성을 쌓고 오랑(五狼)이라는 해상왕국을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옛 장성은 연해 300리에 축조되었다. 고려 원종 때 반거한 삼별초가 진도에 머물렀다. 왕은 시랑 고여림에게 병사 1,000명을 주고 탐라를 수비하도록 하자 제주에 들어 온 고여림과 군사들은 삼별초 군사들을 대비하기 위한 장성을 축조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의 환해장성에 대해서는 1270년 삼별초의 입도와 관련된 기록이 있고, 바닷가 성 쌓기는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왜구왜구(倭寇)란 일본의 해적집단을 말한다. 고려 말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왜구는 남해안은 물론 연안항로를 따라 서해안과 중국에까지 침범했다. 고려말부터 18세기까지 50회 이상 제주에 침범했다.


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바닷가를 따라가며 성을 쌓고 보수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런데 삼별초 시기를 지나면 환해장성은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인데 그 효과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왜구가 제주도에 들어오는 목적은 재물을 약탈하기 위함이므로 재물을 약탈하려면 당연히 재물이 있는 곳 즉 마을이 있는 포구로 들어와야 한다. 포구가 아닌 곳으로는 배를 붙이기가 거의 불가능하고 약탈한 물건을 이동하는 데 시간도 많이 걸려 그들로서는 위험이 커지기 때문이다.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왜적이 들어와 도적질하였음에도 이 섬에서 한 번도 뜻을 얻지 못했던 것은 섬을 돌아가며 석벽이 바다 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하늘이 만든 험지여서 왜적들의 배가 정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제주도의 해안에 배를 붙이기가 어렵다는 것을 기록하였고 실제로도 왜구들은 별도포, 천미포 등 포구시설이 있는 곳으로 침입했었다.

왜구가 들어오지도 않을 곳에 성을 쌓으면서 백성을 고생시킨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닷가 일대에는 돌로 성을 쌓았는데 잇따라 이어지며 끊어지지 아니한다. 섬을 돌아가며 다 그러하다. 이것은 탐라 때 쌓은 만리장성이라 한다.〉라고 하여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기록하였다. 탐라시대부터 쌓은 것이라고 잘못 알기는 하였지만 환해장성이 오래되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1845년 권직 목사 때 영국 사마랑호 영국 군함 사마랑호(samarang)의 출현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탐라기년』에 따르면, 철종5년(1854)에 “이상한 선박이 나타나 측량하며 지도를 제작하자 권직 제주목사는 놀라서 마병과 총수를 총동원하고 변에 대비하였다.

이 때 대정현 사계리 사람 유명록이 "저 양이와 힘으로써 정면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싸우지 않고 파괴할 수는 있습니다. 소인에게 화약을 주시면 배에 몰래 싣고 접근하여 화약에 불을 놓아 양이와 함께 죽겠습니다." 하니 권직 목사가 그 충의심에 감탄하여 우대하고 화약을 준비하고 날을 정하여 시행하려던 중 영국 배는 홀연히 돛을 달아 동북쪽으로 떠나가 버렸다. 권직 목사는 그 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하여 환해장성을 크게 수축하였다 한다.

그 후로는 환해장성에 관한 기사가 없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환해장성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수축, 보수된 제주 특유의 방어유적이다.

원종11년(1270) 11월에 제주 지역을 점령한 삼별초 군사들은 원종14년(1273) 5월 패전할 때까지 2년6개월 동안 제주 지역에 있으면서 항바드리(항파두리)성을 축조하고 포구, 도로와 환해장성을 정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재까지 남아 있는 환해장성은 1845년에 수축한 것이다.


환해장성은 바다에서 들어오는 적을 육지에서 막기 위한 군사적인 성이다. 석성으로서 허튼층쌓기의 형태이며, 배가 부른 궁형(弓形), 직선인 단일경사형(單一傾斜型)의 성벽이 있다. 성의 내·외벽은 잡석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내부 역시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

주요한 위치에는 성처럼 넓은 공간을 두어 주성 역할을 하던 곳과 협축에 가깝게 축조되어 보조성 역할을 하던 성곽으로 이루어졌다.

성의 안쪽에는 말을 타고 달리거나 도보를 이용하여 군사들이 쉽게 이동할 수 있는 회곽도(回廓道)를 둔 곳들도 있으며, 배수로(화북1동, 귀덕리에서 확인됨)나 안팎을 왕래하는 성문(성벽을 어긋나게 축조하여 바다로 출입하는 성문은 북촌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훼손되어 없어짐) 역할을 했던 곳도 확인되었다. 이 석성은 군사적인 목적 외에도 해풍으로 인한 농작물의 염분 피해를 줄이는 역할도 했다.


환해장성은 제주 지역 전역에 분포한다. 제주시, 서귀포시, 애월읍, 한림읍, 대정읍, 남원읍, 표선면, 성산읍, 구좌읍, 조천읍 등지에서 조사, 확인되었다. 환해장성의 전체 길이는 약 300리(120km)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옛 문헌에 고장성·장성·환해장성·만리장성이라 기록되었다. 환해장성이라는 명칭은 《관풍안》기록으로부터 보이는데, 金錫翼(김석익)이 1918년에 편찬한 《탐라기년》에서 사용함으로써 보편화되어 나아갔던 것 같다.


환해장성 축조에 이용된 돌은 자연석으로 부서진 돌을 이용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현무암이 파도에 닳은 둥글둥글한 돌을 이용했다. 즉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한 것이다.

큰 것은 모서리의 길이가 1m가 넘는 것에서부터 보통 30∼50㎝인 돌들이 이용되었다. 비교적 큰 돌로 외벽을 쌓고 그 안에 작은 돌들을 집어넣어 채우는 방식이다. 요즘 복원하는 환해장성을 보면 석산에서 깬 돌을 가져다 사용하고 있어서 원래 환해장성을 모습을 재현하지 못하는 곳이 많다.


환해장성은 해안도로의 건설에 따라 거의 허물어졌으나 1998년 1월 7일 총계 5,120m만이 제주도 지방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형태가 양호하게 남아 있는 곳 10개소(온평, 신산, 곤흘, 별도, 삼양, 북촌, 동복, 행원, 한동, 애월)를 제주도기념물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제주도기념물로 지정된 곳은 수리 및 관리가 잘 이루어져 보존 상태가 양호한 반면, 지정되지 않은 곳은 훼손 정도가 심하다.


애월리 너븐여∼배무숭이∼가림돌로 이어지는 곳에 약 500m의 환해장성이 남아 있다. 지금과 같이 석성으로 쌓아진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왜구들이 자주 출몰하는 시기인 고려말∼조선초 사이에 바뀐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다.


애월리 환해장성 1구역의 규모는 다른 지역의 환해장성과 크게 다른 점이 성벽의 폭이 매우 넓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환해장성의 폭은 1.2〜1.5m이나 이곳 장성의 폭은 5m 정도나 된다. 1947번지, 1947-1번지 이외에 더 동쪽 1880번지 등에서는 폭이 1.5m 정도로 좁아진자. 높이는 부분적으로 무너진 곳이 있어서 일정치 않으나 2m 정도이며 회곽도는 관찰되지 않는다. 석재는 주변 바닷돌이어서 둥글둥글한 돌이 많다.
《작성 061214, 보완 1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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