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토문화]뇌물 근절,선세 감면..함덕리 이원팔선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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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문화]뇌물 근절,선세 감면..함덕리 이원팔선정비
  •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 승인 2019.02.06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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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 달래기 위하여 하급 관리 선발하는 과거 시취(試取) 실시

함덕리 이원팔선정비
 

•위치 ; 조천읍 함덕리 비석거리
•유형 ; 비석(선정비)
•시대 ; 조선(1824)

▲ 함덕리_이원팔선정비(
▲ 함덕리_이원팔선정비

앞면에 사상이공원팔휼민선정비(使相李公元八恤民善政碑), 뒷면에는 道光四년四月日 咸德里(도광사년사월일 함덕리)라고 새겨져 있다. 도광4년은 순조24년(1824)이다.

이원팔(李元八)은 조선 후기 제주목사(방어사)를 역임한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순거(舜擧). 아버지는 이이정(李耳鼎), 모친은 조진겸(趙鎭謙)의 딸이다.


정조14년(1790) 성균관 유생으로 도기(到記)의 강(講)에서 수석을 차지하고 전시에 직부(直赴)하여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사간원정언·진주목사를 역임하였다.

805년 평안북도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가산(嘉山)의 갈마창(渴馬倉)을 개선하여 고칠 것, 선천(宣川)의 탄도(炭島) 목장을 가도(椵島)로 이정(移定)할 것, 강계(江界)의 방수(防守 : 변쌍의 방어)를 변통시킬 것 등을 상소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807년 평안북도암행어사로 근무 중 뇌물을 받아 군명(軍命)을 욕되게 하였다는 이유로 사헌부장령 임업(任業)으로부터 탄핵을 받아 충청도 대흥군(大興郡)에 유배당하였다.

유배에서 풀려난 뒤 1827년 대사간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순조22년(1822) 1월에 백영진(白泳鎭)의 후임으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제주목사로 재임 중인 1822년 여름 전염병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죽은 자가 3천여 명이나 되자, 조정에서는 사헌부 집의 조정화(趙庭和)를 제주위유어사(濟州慰諭御使)로 파견하고 제단을 마련하여 제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 때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하급 관리를 선발하는 과거인 시취(試取)를 실시하여 문과에 신상흠(愼尙欽)[1794~1874] 1명을 합격시켰고, 마병도시(馬兵都試)를 신설하여 매년 10월 15일에 말 잘 타고 활 잘 쏘는 자 중에서 1명을 선발하였다.


또한 길거미(拮居米: 재정이 곤란할 때 쓰는 쌀) 47석을 사창(司倉)에 두어 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의 접대용으로 쓰게 하였다.

효열을 장려하여 영평촌 효자 부천겸(夫千謙)과 어도촌 효자 현원상(玄元祥)의 집안에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 송장을 묻어주고 뇌물을 근절시키고 선세(船稅)를 감면해 주었다. 순조24년(1824) 1월에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떠났다.


순조24년(1824) 이원팔의 선정을 기리기 위해 사상이공원팔휼민선정비(使相李公元八恤民善政碑)가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에 세워졌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牧師李元八 獎孝烈 埋僵屍 絶賂賄 減船稅 民追思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僵 쓰러질 강, 빳빳할 강, 賄 뇌물 회
《작성 061219, 보완 160207, 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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